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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16화 (116/168)

116화

아드리안의 얼굴은 후회와 자책, 미안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네 잘못 아냐.”

“내 잘못 맞아.”

“아니래도.”

“맞다니까.”

하여튼 고집은.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가볍게 흘겨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조금은 네 탓도 있지. 있지만, 전부는 아냐. 내 잘못이 더 커.”

엘레노어가 뒤늦게 밀려오는 쪽팔림에 뺨을 발그레 붉혔다.

“아까는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진짜 무모하고 위험한 짓이었어. 나중에 부모님 오시면 엄청나게 혼날걸.”

“다신 그러지 마.”

“안 그래…….”

아드리안이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승마는 언제 배운 거야? 나는 네가 말을 탈 줄 아는 것도 몰랐어.”

“전에 공작령에서.”

“아.”

공작령이라는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다시 서먹해졌다.

어색한 정적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두 사람은 춤추듯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아드리안을 불렀다.

“리안.”

아드리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너는 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야. 그건 널 처음 만났던 그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사실이야.”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알아.”

“앞으로도 넌 내게 나 자신만큼 중요한 사람일 거야. 평생.”

엘레노어는 부드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 좋아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내 첫사랑인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나한테 정말 의미가 컸어.”

“엘렌.”

“그런데 그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을 것 같아.”

욱신.

아드리안이 입안의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인데도, 며칠을 밤새워 고민했는데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마음을 거절당하는 일에는 대비할 방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네 마음을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 리안.”

가슴 아프기는 엘레노어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남동생 같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든든한 오빠 같았다. 그에게서 설렘을 배웠고,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법도 배웠다.

정말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더는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래.”

아드리안이 고개를 툭 떨구며 대답했다.

“받아들일게, 네 사과. 고마워. 그런 말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

“치졸하게 굴어서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네 사과 받아들일게.”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약간 붉어진 눈이 엘레노어를 담았다.

늘 그렇듯 다정하게.

“그리고…… 축하해. 이번엔 비꼬는 게 아니야. 여전히 진심은 아니지만, 노력할 거야. 언젠간 진심으로 두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게.”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우리 예전처럼 지낼 수 있는 거야? 다시 좋은 친구로, 그렇게?”

엘레노어를 잠시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

아드리안의 입에서 나온 두 글자에 엘레노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밝은 초록색 눈동자가 충격으로 깨어졌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이마를 짚었다. 여전히 미열이 있지만, 아까처럼 펄펄 끓지는 않았다.

안심한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시간이 필요해, 엘렌.”

“하, 하지만…….”

엘레노어가 힘겹게 손을 들어 아드리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드리안은 잔뜩 힘이 들어간 가느다란 손가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아니, 아니, 이해하기는 하는데…….”

엘레노어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는 아드리안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 사이에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했잖아.”

엘레노어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살짝 잠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편하게 생각하라고, 걱정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고 네가 그랬잖아.”

그런데 인제 와서 그러면 어떡해.

기어이 엘레노어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흐느낌이 짙어지자 갈비뼈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때는.”

“싫어.”

“그런데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었나 봐.”

아드리안은 손을 뻗어 엘레노어의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엘렌. 나 너를 정말 오래 좋아해 왔어. 아니, 사랑해 왔어. 그걸 빼고 내 인생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리안.”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내가 얼마나 느린 놈인지. 널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지, 너도 봤잖아.”

그렇게 멍청하게 널 한 번 놓쳤으니까.

아드리안은 제 손에 폭 감싸인 조막만 한 얼굴을 보며 울컥하는 감정을 삼켰다.

늘 그렇듯 고왔고 사랑스러웠다. 이 순간까지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원망스러웠다.

잊을 수 있을까.

괜찮아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너를 친구로만 생각했던 날들이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정말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그래.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이해해 주면 안 될까?”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의 말에서 깊은 진심을 느꼈다.

그를 붙잡을 말도, 위로할 말도, 설득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의 뺨을 감싼 아드리안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착하다, 내 친구.”

아드리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엘레노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언제부턴가 생긴 버릇 같은 행동이었다.

“한동안 내가 네게 거리를 두겠지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 나름대로 애쓰는 중인 거야.”

“……응.”

“너는, 그냥 행복하게 지내 주면 돼.”

너의 그 사람과.

아드리안이 가볍고 폭신한 이불을 조금 더 끌어 덮어 주며 말했다.

“해 뜨려면 멀었어. 다시 자, 엘렌. 자는 거 보고 갈 테니까.”

아드리안은 엘레노어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엘레노어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이 흥얼흥얼하는 콧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잠이 들었다.

슬픈 자장가였다.

***

“엘렌!”

“세상에나, 이게 무슨 난리냐. 응?”

해가 뜨자마자 에버렛 백작 부부가 후작저에 들이닥쳤다. 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은 침대에 누운 엘레노어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오셨어요?”

“어어! 일어나지 마렴, 아가.”

백작이 눈썹 끝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목소리를 키워 봐야 그리 효과가 없었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늦은 시간에……. 다 커 놓고 어릴 때도 안 부리던 말썽을 부려!”

“말썽 총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있어요.”

엘레노어가 헤헤 웃었다. 백작 부인이 엘레노어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며 타박했다.

“이 녀석이. 부모 속을 이렇게 까맣게 태워 놓고 웃음이 나와? 응?”

주치의를 붙들고 몇 번이나 괜찮을 거라는 확답을 듣고서야 백작 부부는 마음을 놓았다.

“아버지, 일하러 안 가세요?”

“못 간다. 딸이 어찌나 말썽꾸러기인지, 눈을 뗄 수가 있어야지.”

“흥, 어차피 못 움직이는데…….”

흔들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던 백작이 엘레노어를 슬쩍 흘겨보았다.

“어머니는요?”

“집이나 여기나 다를 게 없는데, 뭐. 이따 셰릴이랑 차나 한잔 하기로 했어.”

“재밌겠다…….”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였다.

카이델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아무것도 못 하게 생겼다.

하지만 무모한 짓을 감행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이 정도 벌쯤은 견뎌야 했다.

‘하여튼 우리 부모님도 은근히 유난이라니까…….’

부모님의 과잉보호를 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잤는데도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으니 졸음이 밀려왔다. 베개를 끌어안은 엘레노어가 하품을 하려 입을 쩍 벌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엘레노……어?”

얼굴이 사색이 된 카이델이 방문을 부술 기세로 달려 들어왔다.

깜짝 놀란 엘레노어는 턱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어머?”

“공작 각하……?”

놀란 것은 에버렛 백작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벌컥 들어온 것만으로도 깜짝 놀랐는데, 그 주인공은 무려 발렌타인 공작이었다.

그가 아침 댓바람부터 블레이크 후작저의 손님방을 찾을 이유가 도대체 뭘까.

부부가 의아한 시선을 몰래 주고받았다.

‘당연히 엘레노어 혼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카이델이었다.

이른 아침, 블레이크 후작가로부터 날아온 급신은 카이델의 심장을 바닥까지 내려앉게 했다.

그는 곧바로 말에 올랐다. 허둥지둥 뛰어나온 조나단에게 카이델이 짧게 명령했다.

“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해라.”

지금껏 한 번도 없던 명령에 조나단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약속을 제 목숨처럼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일 취소라니.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예……? 오전, 오후 전부 말씀입니까?”

“그래.”

말을 출발시키려던 카이델이 툭 덧붙였다.

“아, 급한 일정 빼고, 앞으로 일주일은 정리해 두도록.”

의아함에 넋이 나간 조나단을 뒤로하고 카이델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괜찮을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엘레노어의 얼굴을 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좀 더 생각했어야 했는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단란한 가족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정말이지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책도 잔뜩 샀다. 「아부의 정석」, 「친해지고 싶은 첫인상 만들기」, 「말 한마디로 천 골드 빚을 갚는다」.

문제는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했다는 거다. 카이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에버렛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 여기까지 어인 일로…….”

인사. 그래 일단 인사를 하자.

뻣뻣하게 굳은 카이델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어머님.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노크부터 해야 했는데 마음이 급한 나머지 실례를 했습니다.”

“……예?”

아버님? 어머님?

카이델의 말에 에버렛 백작 부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부는 급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여보, 방금 들었어?’

‘들었어요.’

‘무슨 뜻일까?’

‘글쎄요……. 우리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두 사람의 시선이 병상에 누운 말썽꾸러기 딸에게로 향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엘레노어의 입이 꾹 다물렸다. 엘레노어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고운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전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틈을 봐서 자연스럽게 알리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깜짝 폭탄을 투하한 셈이 되었다.

계획과는 달라도 한참 달라졌지만, 어쩔 수 없지.

엘레노어가 한 손으로 카이델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인사하세요. 제 남자친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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