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아드리안은 말을 타고 후작저를 나섰다. 똑똑히 지켜보라는 듯, 그는 속도를 내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엘레노어의 오기를 자극했다. 엘레노어의 안에 있는 버튼이 꾹 눌린 것이다.
“오늘은 끝을 볼 거야.”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엘레노어는 바로 옆에 있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죄송한데 말 한 마리만 빌릴게요. 제일 얌전한 아이로요.”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마구간지기가 엘레노어를 보고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에버렛 영애?”
“부탁드릴게요. 급해요!”
엘레노어는 마구간지기의 도움을 받아 작은 말 위에 올랐다. 높아진 눈높이에 순간 머리가 아찔했다.
‘그동안 계속 연습했잖아. 할 수 있어……!’
엘레노어는 카이델에게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달려 본 건 겨우 두어 번뿐이었지만,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았다.
엘레노어는 무사히 말을 타고 후작저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새 멀리까지 간 건지, 아드리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빨리…….’
엘레노어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산책하다시피 느긋하게 걷던 말이 아주 조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길이 곧은 데다 갈림길이 없어, 엘레노어는 금세 아드리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는 듣지 못한 건지 여전히 터덜터덜 말을 몰고 있었다.
“아드리안 블레이크!”
엘레노어는 있는 힘을 다해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그 순간, 아드리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려!”
그는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이쯤이면 엘레노어도 포기했겠거니 생각했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엘레노어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온갖 감정이 들끓었다.
왜 내가 아닌 그여야 했냐고.
내 마음이 네게 부족했냐고.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 안 되느냐고.
세상에 존재하는 못난 말이란 말은 다 하게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는 네 선택이니 존중한다고 깔끔히 승복할 만큼 어른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덤덤하게 웃으며 행복을 빌어 줄 만큼 마음이 넓은 사람이 못 되는 것은 분명했다.
‘제발 따라오지 말아 줘, 엘레노어.’
커브를 돌면 갈림길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이 구간을 벗어나면 엘레노어도 더는 쫓아올 수 없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속력을 높였다.
‘아니, 속도를 더 올린다고?’
엘레노어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드리안 너 진짜…….”
추격의 의지를 꺾어 놓겠다는 의미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의 도발은 오히려 엘레노어의 승부욕에 불을 지펴 놓을 뿐이었다.
“놓치면 안 되는데…….”
눈앞에 커브가 나타났다. 바짝 긴장한 엘레노어가 어설프게 고삐를 틀어쥐었다.
히이잉!
그때였다.
“꺄악!”
엘레노어의 자세가 무너지자 불편함을 느낀 말이 몸을 크게 털었다. 엘레노어는 말 등에서 떨어져 야트막한 언덕을 굴렀다.
“윽……!”
나무 그루터기에 강하게 부딪히고 나서야 엘레노어가 멈춰 섰다. 말은 저 멀리 도망친 뒤였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갈비뼈 쪽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숨이 턱 하니 막힐 정도였다.
엘레노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푹신했기 망정이지, 돌바닥이었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줘, 아드리안!”
엘레노어는 힘껏 외치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지나치지도 않을 텐데, 아침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혼자는 못 일어날 것 같단 말이야…….”
바둥거리던 엘레노어는 이내 포기하고 몸의 힘을 풀었다.
차가운 흙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으니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객기를 부린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아드리안이 미웠다.
그리고 아드리안이 그리웠다.
한 명이 넘어지면 너무나도 당연히 손을 뻗어 주는, 티격태격했다가도 모른 체 져 주는, 무슨 말이든 전부 할 수 있는 소꿉친구가, 그리웠다.
엘레노어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몸이 아픈 것인지, 마음이 아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 가 버리지 마…….”
***
히이잉!
저 멀리서 말이 길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안이 말고삐를 당겨 급하게 멈춰 섰다.
‘혹시…….’
아드리안은 멈춘 채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겠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잠시 망설이던 아드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머리를 돌렸다.
“진짜 세상 걱정은 혼자 다 시키지.”
결국 엘레노어에게 휘말린 것인지도 모른다. 늘 그렇듯, 그녀에게 또 한 번 패배한 것인지도.
하지만 이렇게 찝찝한 마음으로는 절대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엘레노어가 꾀를 내어 저를 속이는 것이라 해도, 아드리안은 그 고운 얼굴이 멀쩡한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무모하고 황당하고 부주의하기 짝이 없어.”
눈썹을 찡그린 아드리안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물가에 아이를 홀로 남겨 두고 온 것처럼 불안했다.
‘말이 왜……?’
그때, 말 한 마리가 숲으로 달음질하는 것이 보였다. 엘레노어가 타고 있던 말이었다.
“안 돼. 엘렌, 안 돼!”
아드리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드리안은 말에 박차를 가해 길을 거슬러 갔다.
“으…….”
커브를 보고 속도를 낮춘 아드리안의 귀에 가느다란 신음이 들렸다. 아드리안은 급하게 말을 멈춰 세우고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엘렌!”
아드리안은 길옆에 난 언덕 아래 길게 누운 엘레노어를 발견했다.
“엘렌, 괜찮아?”
급하게 목덜미에 손을 댄 아드리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맥박은 안정적이었다.
엘레노어의 뺨에는 길게 긁힌 상처가 나 있었고, 옷 밖으로 드러난 살갗도 울긋불긋했다. 엘레노어는 충격 때문인지 정신을 잃은 듯했다.
“금방 올게, 엘렌. 잠깐만 기다려.”
아드리안의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옷을 벗어 엘레노어를 꽁꽁 싸매놓았다.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드리안이 달려가 말 위에 올랐다. 도와줄 사람을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젠장! 젠장!”
말을 타고 가는 내내 아드리안은 격하게 자신을 자책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멍청한 놈……!”
그냥 져 줄 걸 그랬다. 어차피 엘레노어를 상대로 이길 수도 없을 거면서,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내가 틀렸다, 내가 잘못했다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빌어먹을 자존심 그깟 게 다 뭐라고.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 흉내라도 내 볼 걸 그랬다. 어차피 검게 탄 속, 엘레노어의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치기 어린 행동이 엘레노어를 다치게 했다. 아드리안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일단 어서 눕히거라. 세상에, 백작저에 당장 연락해야겠어.”
“의사를 불러라!”
엘레노어는 후작저의 손님방에 눕혀졌다. 급하게 달려온 후작가의 주치의가 엘레노어를 진료했다.
“손목과 발목은 삔 것뿐이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다만 갈비뼈에 금이 간 듯합니다.”
“그러면……!”
“너무 심각할 정도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장기가 다치지는 않은 듯하니, 한 달 정도 충분히 휴식하시면 자연적으로 치료될 겁니다.”
의원의 말에도 아드리안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열은 왜 끓는 거지?”
“몸이 큰 충격을 받으면 고열을 동반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게다가 추운 날씨에 밖에 쓰러져 계셨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아드리안은 문득 길 한복판을 막아서던 엘레노어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얼굴이 푸르게 질려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단순히 밤이 늦어 어두운 탓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오래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었나.
얼마나 기다렸을까.
엘레노어의 성격대로라면 초저녁부터 몇 시간을 거기서 죽치고 있었겠지.
‘나 때문이야.’
아드리안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아드리안의 속을 모르는 의원이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도 도련님께서 금세 발견하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체온이 그리 많이 식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괜찮으실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드리안은 밤새 엘레노어의 곁에 앉아 그녀를 간호했다.
한숨도 자지 않고, 하녀들도 전부 물린 채.
그는 손수 미지근해진 수건을 갈아 주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늘 환하게 반짝이던 황금빛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멍청한 놈.’
상처들에 연고를 발라 주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아드리안은 입술을 꾹 깨물며 속으로 자책했다.
‘너는 엘렌을 욕심낼 자격도 없어.’
얼마나 지났을까. 엘레노어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엘레노어는 눈도 제대로 떼지 못한 채 바싹 마른 입술을 뗐다.
“……물.”
“엘렌!”
아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엘레노어가 깨어났다는 것이 기뻤기 때문이다.
엘레노어가 통증에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아드리안은 재빨리 그녀의 뒤에 푹신한 쿠션을 받쳐 주었다.
물 잔을 가져온 그가 조심조심 엘레노어의 입술 사이로 물을 흘려 넣었다.
“천천히.”
목을 축이자 정신이 좀 드는지. 엘레노어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아드리안이 설명했다.
“손님방이야. 적어도 일주일은 이동하지 않고 쉬는 게 좋대.”
“나 많이 다쳤어?”
“갈비뼈에 금이 갔어. 한 달 정도 조심해야 한대.”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심하게 다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열은 몸이 받은 충격 때문일 수도 있고, 밖에서 오래 떨어서일 수도 있다고 하더라.”
“금방 내리겠지, 뭐……. 괜찮아.”
엘레노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정말로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아드리안의 굳은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속삭이듯 물었다.
“……얼마나 기다렸어?”
“응?”
“밖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냐고.”
엘레노어가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적당히.”
“적당히라는 게 몇 시간인데.”
“몰라. 꽤 오래.”
아드리안은 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른 어깨가 둥글게 굽어졌다. 커다란 손에 가려진 그의 얼굴은 참담함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엘레노어가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는데, 힘이 없어 그냥 무릎에 얹어야 했다.
“나 괜찮아. 자러 가. 피곤해 보이는데.”
“너 같으면 잠이 오겠어?”
“음, 아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엘레노어가 물었다.
“아, 우리 부모님은 아셔?”
“말씀드렸어. 치료받았고 잘 쉬고 있다고 하니 날이 밝는 대로 오시겠대.”
“응, 잘했어. 고마워,”
잠시 침묵하던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미안하다.”
엘레노어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드리안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다 내 탓이야.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