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리안, 잠깐만!”
엘레노어가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지만, 아드리안은 멈춰 서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카이델과 아드리안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가도 돼, 엘레노어.”
그때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니 가서 얘기해. 풀릴 때까지. 제일 친한 친구잖아.”
“하지만…….”
아직 카이델과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 들을 이야기도 많았고, 해 줄 이야기는 더 많았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인 데다, 힘들게 마음을 확인한 직후였다. 그도 방해받고 싶지 않을 터였다.
“오랜만에 본 거잖아요. 할 이야기도 많고.”
“앞으로 계속 볼 거잖아. 나는 그럴 생각인데.”
카이델이 엷게 웃어 보였다.
“그대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 지금 이렇게 보내면 내내 불편해할 거잖아.”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툭 손을 얹었다.
“가, 엘레노어.”
***
엘레노어는 카이델을 뒤로하고 열심히 달렸다. 아드리안이 사라진 방향으로 한참을 갔지만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어두운 황궁 정원을 뒤지던 엘레노어는 포기하고 황태자궁으로 들어섰다. 파티가 슬슬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엘레노어가 블레이크 후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셰릴, 혹시 리안 보셨어요? 찾고 있는데 못 봐서…….”
후작 부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까 리안도 널 찾으러 갔었는데, 길이 엇갈렸나 보다. 리안은 방금 먼저 돌아갔어.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다고.”
“아…….”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아드리안의 마음에 단단히 상처를 남긴 듯했다.
사실 여러 개의 마음이 얽힌 이상 누군가가 상처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드리안을 선택했다면 카이델과 이즈멜의 속이 썩어갔으리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엘레노어는 마음이 불편했다.
적어도 이렇게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접 만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려 했다. 그게 정말 나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엘레노어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후작 부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급한 일이니?”
곧바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까? 혼자만의 시간을 좀 주는 게 낫나?
잠시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내일 이야기하면 돼요.”
“리안에게 뭐라고 전해줄까?”
“제가 많이 찾았다고 전해주세요. 꼭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
“그래, 알았다.”
지금은 아드리안이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좀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네 마음을 아프게 해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뿐이었으므로.
***
다음 날,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후작저를 찾아갔다.
“어머, 엘렌. 어쩌지? 리안이 오늘은 거래처 사람들과 늦게까지 있어야 할 것 같다는데.”
하지만 아드리안은 없었다.
“정말요? 어쩔 수 없죠.”
처음에는 일이 많이 바쁘면 그럴 수 있지, 생각했다.
요즘은 새벽에 출근하고 낮에 돌아온다고 해서 낮에도 가 보고, 아예 브로든 상단 사무실로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며칠씩 이어지자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를 피하고 있었다.
‘일단 만나야 무슨 이야기든 할 텐데…….’
엘레노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카이델에게 편지를 썼다. 그를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기도 했고.
「카이델.
안녕.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편지해요.
그날 잘 들어갔나요? 잠은 잘 잤고요?
저는 그날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답니다. 어쩐지 당신도 그랬을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글로 쓰려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에요. 막 부끄럽고요.
살면서 연애편지는 써 본 적이 없거든요.
아무튼…… 리안은 여전히 절 피하고 있어요. 애는 쓰고 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전하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고, 부모님께도 그렇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보고 싶어요.
-엘레노어 드림」
「사랑하는 엘레노어에게.
그대의 편지로 시작하는 하루라니. 오늘은 온종일 기분이 좋을 것 같아.
나는 그날 잘 들어갔어. 그대의 짐작대로 잠은 못 잤고. 어떻게 잠들 수 있었겠어.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꿈 같았던 그 하루를 곱씹는 것만으로 하루가 모자라.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기다리는 일을 잘하니까.
부모님께는 함께 인사드리고 싶은데, 부담스러울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 미리 연습해 둘게.
그리고, 나도 많이 보고 싶어.
영원한 그대의,
카이델 이드리스 발렌타인.」
아, 진짜 어쩌면 좋지.
편지를 보낸 다음 날, 발렌타인 공작가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카이델의 답신이었다.
봉투를 조심조심 열고 편지를 꺼낸 엘레노어가 종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사랑하는 엘레노어’라니!
편지를 제대로 읽기도 전인데 펑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너무 좋아…….”
한 글자 한 글자 반듯반듯 눌러 쓴 글씨도, 담백하고 다정한 말들도, ‘많이’ 보고 싶다는 말도 전부 좋았다.
“어머니는 엄청 좋아하실 것 같은데 아버지 반응은 예상이 안 되네.”
부모님의 반응을 가늠해 보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신분도 훨씬 높은 데다, 워낙 빈틈없는 인상이라 대하기 어려워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허락하실 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드와이트야 반대하든 말든…….
문제는 아드리안이었다.
엘레노어는 아드리안과 어색해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렇게 흐지부지 멀어질 사이는 아니었다.
아드리안의 마음을 알았을 때 걱정했던 부분도 이것이었다. 제일 소중한 친구를 잃는 것.
‘일단 만나서 대화하는 게 급선무야.’
엘레노어는 오늘만은 반드시 아드리안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다짐했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어도 그를 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매번 이런 소식만 전하게 되어 참 송구스럽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아마 밤늦게야 돌아오실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드리안은 후작저에 없었다. 예상했던 바이기에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아, 리안.’
엘레노어는 마차가 들어오는 입구에서 아드리안을 기다리기로 했다. 일부러 블레이크 후작 부부에게도 귀띔하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대문을 지키는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휴게실 앞 계단에 걸터앉았다.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리안을 만나려고 잠복까지 해야 하다니…….’
엘레노어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괜히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하늘은 짙은 보랏빛을 머금었다가 서서히 검게 변했다. 반쪽짜리 달 옆에 수많은 별이 주근깨처럼 흩뿌려졌다.
“으…… 추워.”
나름대로 도톰하게 입었는데도 계속 앉아 있으니 몸이 덜덜 떨렸다. 엘레노어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체온을 유지하려 애썼다.
바로 옆에 마구간이 있어 말똥 냄새가 풍기는 것도 고역이었다. 엘레노어는 빨리 제 코가 마비되길 기도했다.
“진짜 늦게 오네.”
몇 시간이나 이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자정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얼얼하던 손발의 감각이 조금씩 둔해졌다. 설상가상 서서히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손바닥으로 뺨을 짝짝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자면 안 돼. 이런 데서 자면 입 돌아가는 거야.”
그때였다.
저 멀리서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는 본능적으로 아드리안임을 느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아드리안!”
엘레노어가 길 한복판에 서서 두 팔을 쫙 벌렸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말을 몰던 아드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급하게 말을 멈춰 세웠다.
“……엘레노어?”
“이제야 온 거야?”
아드리안이 훌쩍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너 정말…….”
다친 곳은 없는지, 엘레노어를 이리저리 살핀 아드리안이 버럭했다. 그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너 미쳤어? 내가 제대로 못 보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길을 막아서. 네가 어린애야? 왜 이렇게 무모하게 굴어.”
아드리안이 매섭게 다그치자, 엘레노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누군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시간이 없어서 몇 시간을 죽치고 기다리고, 따뜻한 집이 없어서 차가운 돌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엘레노어가 원망 섞인 눈으로 아드리안을 올려다보며 따지듯 물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네가 날 상대해 주기나 해?”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바빴어.”
“거짓말하지 마.”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해.”
아드리안이 한 발짝 물러섰다.
“나중에. 지금은 돌아가. 시간이 늦었어. 마차 불러 줄 테니까…….”
“나중 언제?”
“…….”
엘레노어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리안, 나랑 이야기해.”
아드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할 이야기, 이미 다 알아. 굳이 어색하게 이런저런 말 늘어놓을 필요 없어. 축하한다고 했잖아. 그게 내 대답이야.”
“그리고 그 이후로 넌 날 쭉 피했지.”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은 침묵했다. 그녀를 피해 왔음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리안.”
엘레노어가 간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너랑 이렇게 멀어지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아드리안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럼 나 그만 피해. 그만 도망쳐. 영영 안 보고 살 사이처럼 대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넌 지금 내 눈도 안 보잖아.”
그 순간 꾹꾹 참던 눈물이 펑 하고 터져 나왔다. 속상하고 서러웠다. 가슴에 멍이 든 듯 욱신거렸다.
바닥으로 굵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드리안은 흙바닥에 점점이 남은 눈물 자국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잠시 침묵하던 아드리안이 나직이 속삭였다.
“……너랑 이런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드리안이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엘레노어, 돌아가.”
계속된 거부에 울컥한 엘레노어가 까칠하게 대답했다.
“싫다면?”
“그럼 내가 갈게. 넌 여기서 자고 가.”
아드리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 등에 올라탔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정말로 떠나려는지, 말고삐를 두어 번 감아쥐며 엘레노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엘레노어도 화가 치밀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아드리안의 행동은 적정선을 넘은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말머리를 돌렸다.
“아드리안 블레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