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엘레노어는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던 아이가 부모를 만난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그에게 오해받기 싫어 애를 태웠던 것.
그가 저를 밀어내는 줄 알고 혼자 상처받았던 것.
그와 연락이 닿지 않는 이유를 알고 내심 안도했던 것.
하지만 그가 전쟁터로 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던 것.
이즈멜과 협력한 일로 훈장을 받았던 것.
타블로이드지에서 그녀를 헐뜯는 기사를 냈던 것.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 준 것.
그리고 이젠트 공녀가 그녀에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낸 것…….
엘레노어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서러움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카이델과 마주 선 순간 엘레노어는 불현듯 깨달았다.
괜찮다고 했지만, 때로는 정말 괜찮은 것 같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괜찮지 않았다.
“엘레노어.”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엘레노어가 그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미워요.”
엘레노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오해인데, 아드리안이랑은 아무 일도 없었는데, 오해라고 말할 틈도 안 주고 가 버렸어.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은 줬어야죠.”
“엘레노어.”
“내가 그래서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는데. 혼자 얼마나 속을 태웠는데……!”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애처럼,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향한 원망을 토로했다. 감정에 북받쳐 횡설수설 늘어놓는 말들을 카이델은 묵묵히 들었다.
엘레노어가 입을 꾹 다물고 눈가를 팔로 문질러 닦아냈다. 카이델이 그런 엘레노어에게 다가서며 나직하게 말했다.
“미안해.”
“미워…….”
“내가 잘못했어.”
“거짓말.”
엘레노어가 한 걸음 물러섰고, 카이델이 세 걸음 더 다가섰다.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알아. 그리고 얼마나 힘든 일을 견뎠는지도.”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엘레노어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는 신중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엘레노어의 젖은 뺨을 닦아냈다.
카이델의 손은 손바닥 전체에 돌처럼 단단한 굳은살이 잡혀 약간 까슬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피하지 않았다.
“다 들을게. 그대의 설명, 나에 대한 원망, 그동안 그대가 겪었던 일들. 전부 다 얘기해 줘.”
듣고 싶어.
그가 속삭이듯 덧붙인 말에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당신은 이상해요.”
“…….”
“당신이랑 있으면 내가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마음대로 날뛰고, 준비했던 말들은 기억도 안 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투정을 부리게 되는 게, 당신 앞에서 자꾸만 내가 어려져요.”
엘레노어의 원망 섞인 말에 카이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엘레노어가 제게 완전히 실망한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그를 보는 엘레노어의 눈빛은 차갑지 않았다. 전혀.
“……왜 그런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정원으로 달려 나와 그를 본 순간, 엘레노어는 깨달았다. 금방이라도 펑 터져 버릴 것처럼 가쁘게 뛰어대는 심장이 가르쳐 주었다.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답이 너무나도 쉽고 명확해 모를 수가 없었다.
모른 척 감출 수는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먼 길을 돌아왔기에.
“왜지?”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물어오자, 엘레노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런 것 같아요?”
“……모르겠어.”
“잘 생각해 봐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향해 아주 조금 더 다가섰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발자국도 채 되지 않는 거리만이 남아 있었다.
카이델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그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럼 힌트를 하나 줄게요. 나는 당신이 답을 꼭 맞혔으면 좋겠거든요.”
엘레노어가 턱을 들어 카이델과 똑바로 눈을 맞췄다. 방금까지 눈물을 쏟았던 두 눈은 평소보다 배로 반짝거렸다.
‘무슨 뜻일까.’
카이델은 숨을 죽인 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심장의 진동이 그치지 않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초겨울의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는 기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가진 용기를 전부 그러모아 입술을 뗐다.
“……카이델, 보고 싶었어요.”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감정은 더욱 선명해졌다. 엘레노어의 커다란 눈에 다시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매일, 매 순간 당신이 그리웠어요. 하루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도 그랬어요?”
대체…….
카이델의 심장이 쿵,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오르내렸다.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제가 지금 짐작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그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카이델이 홀린 듯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랬어.”
“…….”
“늘, 나는 늘 그랬어.”
엘레노어는 말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안에 수많은 감정이 차오르고 맥동하며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의 흉곽이 부풀며 제복 상의가 팽팽하게 당기어졌다. 그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꾹 내리누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카이델.”
“응.”
아이러니하게도, 키가 자라고 나이가 들수록 세상 속의 ‘나’는 작아졌다.
‘나’는 사실 그리 특별하지 않으며, 수많은 결점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었다.
광활한 우주 속의 제가 얼마나 작고 작은 존재인지 생각하다 보면, 약간의 공허함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엘레노어는 제 존재가 점점 부푸는 것만 같았다. 커지고 커지고, 그렇게 끝도 없이 커져서 우주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거울 속의 모습은 먼지처럼 작고 초라했지만, 카이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광활한 우주였다.
이 순간 그녀의 눈에 비친 그도 그러했다.
‘나는 이 사람을…….’
심장이 간질거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엘레노어는 네 글자에 제 모든 진심을 꼭꼭 담아 건넸다.
“좋아해요.”
“…….”
“당신이 좋아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카이델은 엘레노어가 그의 마음을 받아주는 순간을 종종 상상했다. 하지만 빈약한 상상력 탓인지, 매번 허무하게 깨어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토록 생생한 것을 보면, 꿈은 아니라는 것인데.
카이델은 멍한 눈으로 눈앞의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달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그녀는 꿈처럼 아름다워서 더욱 분간이 가지 않았다.
카이델에게서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엘레노어는 살짝 불안해졌다. 복숭아처럼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서서히 자두처럼 익어갔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호, 혹시 다른 마음이라면, 그러면…….”
“사랑해.”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랑.
카이델이 조금의 망설임도 뱉어낸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금의 의심도 없이 곧바로 믿어지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한 손을 뻗어 엘레노어의 뺨을 감쌌다. 따뜻한 손의 온기가 차게 식은 뺨을 데웠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 간지러워서,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가 심장을 꾹 눌러서, 엘레노어는 작은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사랑해, 엘레노어.”
카이델이 다른 한쪽 손으로 엘레노어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엘레노어의 고개가 자연히 뒤로 젖혀지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카이델은 허락을 구하듯 잠시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갔다.
이내 엘레노어의 손이 카이델의 가슴께를 가볍게 짚었다.
그것이 신호였다.
카이델의 입술이 엘레노어의 입술 위로 빠르게 겹쳐졌다. 따뜻하고 말캉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달래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건 너무…….’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생경한 감각에 엘레노어는 속수무책 얼굴을 붉혔다.
카이델의 입맞춤에서 서서히 처음의 서투름이 가셨다. 놀리듯 멀어졌다가 달래듯 쓸어내린다.
척추뼈를 타고 찌르르 내려가는 간지러움에 발끝이 절로 곱아들었다. 허리를 감싼 그의 손이 델 듯이 뜨거웠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세상에 단둘만 남겨진 듯, 엘레노어는 카이델이 주는 감각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숨이 모자라.’
얼굴이 발개진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가슴을 슬쩍 밀어냈다. 그와 저 사이, 틈이 생기자마자 엘레노어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카이델이 그런 그녀를 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엄지로 엘레노어의 입술을 닦아 갈무리해 주었다.
“그냥 편하게 숨 쉬어도 되는데.”
목소리에 웃음기가 짙게 배 있었다.
“그럴 틈도 안 줬으면서.”
엘레노어는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괜히 구두코만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입술에는 알알하게 그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향과 맛, 감촉. 무엇 하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엘레노어.”
“네.”
“나는 이제 안 보려고?”
“……몰라요.”
머리 위에서 카이델이 소리 없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조르듯 말했다.
“보게 해 줘. 보고 싶어.”
낮고 굵은 음성이 귓가에서 사르륵 녹았다. 오로지 그녀에게만 한없이 다정해지는 목소리였다.
‘이건 반칙이지!’
저런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엘레노어가 못 이긴 척 고개를 들어 힐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예뻐.”
카이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목소리와 표정은 퍽 의연했지만, 그의 귀와 목덜미는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엘레노어는 그가 손을 어디로 둘지 몰라 주먹을 쥐었다가 푸는 것을 보며 슬며시 웃고 말았다. 그도 그녀만큼 이 순간 긴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연애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이었나?’
연애.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엘레노어가 뺨을 붉혔다.
‘무려 카이델 이드리스 발렌타인 공작이 내 연인이라니.’
엘레노어는 제 앞에서 온몸을 붉히고 있는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제국, 아니, 이 세상을 탈탈 털어도 그만한 남자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가 나를 사랑한다니.
“정말 잘할게.”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이마에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엘레노어는 대답 대신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잠시 움찔한 카이델이 이내 엘레노어를 마주 꼭 안아 주었다.
“아직도 잘 안 믿겨. 전부 꿈일 것 같아서 무서워.”
“사실 저도요.”
그의 가슴에 귀를 대자 살갗을 뚫고 나올 기세로 뛰어대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엘렌.”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엘레노어가 빠르게 돌아섰다.
그곳에는 새하얗게 질린 아드리안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리안.”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드리안은 말없이 엘레노어와 카이델을 번갈아 보았다.
“축하해.”
고저 없는 억양으로 짧은 축하를 건넨 아드리안이 성큼성큼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