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엘레노어에게.
날이 제법 쌀쌀한데,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되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는지도.
아마 웃으며 괜찮다고 하겠지. 그댄 늘 강하고 씩씩한 사람이니까.
아이들이 아카데미로 가기 전에 다 함께 축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 해.
수고해 준 그대를 위한 자리이기도 하니, 꼭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어.
깊은 감사를 담아,
그대의 벗」
***
평소보다 날이 따뜻한 저녁, 황태자궁은 색색의 꽃들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축 입학>
<선생님 사랑합니다>
대문짝만한 플래카드가 걸리고, 커다란 5단 케이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에버렛 백작가, 발렌타인 공작가, 블레이크 후작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즈멜과 가까운 대신들과 브로든 상단 사람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커다란 인형부터 보드게임, 달콤한 디저트도 가득했다.
“와, 우리 주사위 게임 하자!”
“그래!”
“빨간색 말은 내가 찜할 거야.”
“그럼 난 초록색.”
시에나와 데미안, 루카스는 너 나 할 것 없이 장난감 무더기로 뛰어들었다. 여전히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세 사람이었다.
가까운 사람들만 모인 축하연은 작지만 화기애애했다.
오랜만에 만난 에버렛 백작과 블레이크 후작은 티격태격하며 회포를 풀었다.
“얼굴 보기 어렵군, 클로드.”
“그야 물론. 내 얼굴은 우리 딸만 쉽게 볼 수 있으니까.”
“내 딸이 언제부터 자네 딸이 된 거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잊었나? 내게 대부가 되어 달라 부탁한 건 자네야.”
“그야 10개월을 징하게 졸랐으니 그렇지!”
에버렛 백작 부인과 아드리안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리안, 요즘은 통 백작저에서 널 볼 수가 없구나. 많이 바쁘니?”
“일이 많아 격조했어요.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고 인사드릴게요.”
“바쁜데 괜히 부담 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식사는 제때 꼬박꼬박하는 거지?”
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이즈멜이 가볍게 와인 잔을 두드렸다. 그러자 시끌벅적 정신없던 장내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킨 이즈멜이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적포도주빛 프록코트를 걸친 이즈멜은 우아함 그 자체였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군. 그간 각자의 자리에서 애써줘 고마워.”
이즈멜의 시선이 옅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엘레노어에게 꽂혔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엘레노어에게 특히 고맙고, 루크와 시에나, 데미안 모두 수고했어.”
부모님과 함께 있던 엘레노어가 미소로 가볍게 화답했다.
“다들 즐겁고 편안한 시간 보내길 바라. 이상.”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축하사였다.
간이 단상에서 내려온 이즈멜이 성큼성큼 아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루카스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이거 다 우리 거야?”
“그럼. 사이좋게 나눠 가져. 마음에 들어?”
“엄청!”
이즈멜이 루카스의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았다.
“저기 저 완전 큰 곰 인형도 가져가도 돼요?”
시에나가 황금빛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물론이지. 곰 인형은 아무래도 같이 마차를 타고 가기에는 좀 덩치가 큰 듯하니 따로 수레에 실어 보내 주마.”
“감사합니다!”
이즈멜은 반듯한 자세로 예의 바르게 서 있는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굽혀 데미안과 눈을 맞춘 그가 칭찬을 건넸다.
“수석 입학이라지? 대단하구나.”
“감사합니다.”
“축하의 의미로 선물을 준비했어.”
이즈멜이 데미안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받아 든 데미안이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금 풀어 봐도 되는 걸까?
그런 데미안의 고민을 눈치챈 이즈멜이 고개를 까딱했다.
“풀어 봐.”
허락을 받은 데미안은 조심조심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이내 데미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데미안의 이름이 금박으로 각인된 만년필이었다.
“루크가 그러는데, 네가 만년필을 갖고 싶어 했다기에 준비했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데미안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 박힌 듯 반짝거리는 보랏빛 눈동자만 보아도 데미안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걸로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래. 우리 루크도 잘 부탁한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루카스가 괜히 툴툴거렸다.
“난 혼자서도 잘하거든? 선생님은 내가 제일 든든하다고 했는데.”
“그건 엘레노어가 착해서 그냥 해 준 말이야.”
루카스의 어깨에 손을 얹은 이즈멜이 시에나와 데미안을 보며 말했다.
“멀리 혼자 보내는 게 처음이라 염려가 좀 되는데, 너희가 있어 마음이 좀 놓여.”
“걱정 마세요!”
“네. 사이좋게 지낼게요.”
이즈멜이 데미안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려 놓았다. 그때 그의 시선 끝에 누군가 걸렸다.
이즈멜이 데미안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데미안, 뭔가 더 원하는 거 없어? 좋은 날인데, 뭔가 좀 부족하지 않아?”
이즈멜의 말에 데미안이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없어요.”
“정말? 내가 잘못 생각 했나…….”
고개를 갸웃한 이즈멜이 데미안의 등 뒤를 보며 말했다.
“힘들게 올라왔을 텐데 이를 어쩌나. 데미안은 자네가 별 필요 없는 모양인데.”
“제 동생에게 너무 짓궂으십니다.”
깊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데미안의 귀에 무척이나 익은 것이었다. 데미안이 곧바로 돌아서서 팔을 뻗었다.
“형!”
오랜만에 수도로 돌아온 카이델이었다.
카이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데미안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동안 별일 없었고?”
카이델의 어깨에 고개를 폭 묻은 데미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금색 견장에 뺨이 쓸릴 텐데도 데미안은 조금의 틈도 없이 제 형에게 꼭 붙어 있었다.
“또 내려갈 거예요?”
“어쩌면. 그래도 한동안은 여기 있을 거야. 네 입학식은 봐야지.”
데미안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실은 카이델이 이즈멜을 보며 물었다.
“보고는 내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오늘 밤이라도 머리를 좀 식히도록 해. 고생했다.”
이즈멜이 카이델의 팔을 툭 두드렸다. 카이델은 가볍게 묵례한 뒤 데미안을 땅에 내려놓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카이델의 시선 끝에 엘레노어가 들어왔다.
그리웠던 얼굴을 발견한 카이델의 심장이 덜컥 멈췄다.
‘……엘레노어.’
사람들 가운데 둘러싸인 엘레노어는 밝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이 공간의 주인공이었다.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휘황한 빛은 오롯이 그녀에게만 내리는 듯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환해서 거의 빛 그 자체처럼 보였다. 그녀에 비하면 카이델은 어둠이었다.
‘소후작과 함께 있군.’
그녀의 곁에는 아드리안이 서 있었다. 그는 활짝 웃는 엘레노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그런가.’
기분 나쁘게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소후작에게는 사랑받으며 곱게 자란 사람 특유의 천진함이 있었다. 빛과 어둠을 가르자면, 그는 분명하게도 빛에 속한 사람이었고 엘레노어도 그러했다.
그때였다.
‘!’
시선을 느꼈는지, 엘레노어가 카이델이 서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
엘레노어는 블레이크 후작 부부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복덩이’.
요즘 클로드가 엘레노어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황실과 엘레노어의 협업은 브로든 상단에 엄청난 호재였다. 엘레노어가 브로든 상단의 로고를 교재에 함께 인쇄한 것이 기대 이상의 홍보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다음번에 오면 소를 잡아 주마. 제일 크고 튼실한 놈으로.”
“정말요?”
“그럼. 내가 네게 뭘 못 해 주겠니. 우리 아들을 갖고 싶다고 해도 냉큼 내어줄 텐데.”
잘 씻기고 곱게 입혀서 곧장 보내주마.
클로드가 옆에 서 있던 아드리안의 어깨를 슬쩍 떠밀었다.
“아, 아버지.”
아드리안은 살짝 찡그리면서도 순순히 떠밀려 엘레노어의 옆에 붙어 섰다.
헤헤 웃던 엘레노어는 어디선가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아까부터 뺨이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레노어의 숨이 멈췄다.
‘카이……델?’
카이델이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잘못 본 것인지도 몰라.’
엘레노어가 눈을 꽉 감았다.
가끔 그를 너무 많이 생각한 날이면 옷장에 걸린 재킷만 보고도 혹시 그인가, 가슴이 내려앉곤 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헛것을 보고 착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엘레노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깜빡여도 보고, 손등으로 비벼도 봤지만 눈앞의 카이델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여전히 있어.’
카이델은 검은 제복 차림이었다. 엘레노어는 그런 그의 가슴께에 붙은 총사령관 배지와 온갖 훈장들을 잠시 응시했다. 그가 움직이며 한쪽 어깨에 늘어뜨린 망토가 살짝 흔들렸다.
‘정말 돌아온 거야?’
카이델은 엘레노어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놀란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좁지 않은 거리가 있었지만, 엘레노어는 그의 벽안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엘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불렀다.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며 아드리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왜 말이 없어졌어?”
“응? 아, 그냥.”
“마실 거라도 가져다줄까?”
“아니, 괜찮…….”
문득 카이델이 있는 쪽을 다시 돌아본 엘레노어가 말을 멈췄다.
그가 없었다.
“내가 직접 가서 가져올게. 잠깐 둘러도 보고.”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향해 살짝 미소 지은 뒤 빠른 걸음으로 홀을 가로질렀다.
혹시 다른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인 건 아닐까, 주변을 꼼꼼히 살폈지만 그는 없었다.
애초에 카이델은 힘들여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디서나 가장 눈에 띄는 이였기에.
‘어디 간 거야…….’
엘레노어는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밤이 내려앉은 황태자궁의 복도는 어둑하고 적막했다.
“카이델?”
엘레노어가 소리 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엘레노어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엇갈리지 않으리라. 그를 붙잡고 이야기하고야 말 것이다.
그날 일은 전부 오해였다고.
곧바로 해명하려 했지만, 당신과 내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고.
데미안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들었느냐고.
그동안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있느냐고.
그리고…….
엘레노어의 발이 푹신한 잔디 위를 내디뎠다. 열 걸음쯤 떨어진 거리, 카이델의 뒷모습이 보였다.
엘레노어가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카이델!”
그 순간 카이델의 걸음이 마법처럼 멈췄다. 돌아선 그의 눈이 놀란 듯 약간 커져 있었다.
“엘레노어?”
“…….”
분명 할 말이 많았는데, 달려오는 내내 그에게 쏟아부을 말들을 준비했는데.
“왜…….”
그와 마주 선 순간, 익숙한 그의 향기를 맡은 순간, 깨끗한 푸른 눈동자에 서서히 번져 가는 걱정을 느낀 순간 엘레노어의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그저, 코끝이 시큰하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엘레노어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무슨 일이야?”
안도감.
그래, 안도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