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루카스의 말에 아나이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레노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런 아나이스와 루카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카스는 당당하고 오만한 눈빛으로 아나이스의 얼굴을 슥 훑었다.
“선생님, 가요.”
루카스가 엘레노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엘레노어는 얼떨결에 제 앞에 내밀어진 자그마한 손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연회장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주변으로 비켜서는 것이 느껴졌다. 이 순간 루카스는 완벽한 벨리움의 황족이었다.
사람들과 충분히 멀어졌다고 여겨질 때쯤, 루카스가 툭 물었다.
“선생님, 나 형님 같았어요?”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응?”
“형님 흉내 낸 건데. 비슷했어요?”
루카스가 엘레노어를 올려다보며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평소처럼 장난기로 말갛게 반짝이는 얼굴을 보자 서서히 나갔던 넋이 돌아왔다.
엘레노어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긴장이 풀린 엘레노어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리자, 루카스가 눈을 휘며 웃었다.
“선생님도 속았구나? 그렇죠?”
엘레노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깜짝 놀랐잖아, 루크.”
“헤헤.”
“카리스마가 전하보다 더하던데? 다들 놀란 눈치였어.”
기분 좋은 듯 헤헤 웃던 루카스가 엘레노어의 드레스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옅은 장밋빛 드레스에 진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드레스가 완전 엉망이 됐어요.”
엘레노어가 생긋 웃어 보였다.
“괜찮아. 옷이야 갈아입으면 그만이지.”
“그래도 찝찝하잖아요.”
“그렇긴 해.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 봐도 될까?”
잠시 고민하던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좋아요. 대신 또 놀러 와야 해요!”
“그럼, 당연하지. 다시 한번 입학 축하해, 루크.”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일 정말 고마웠어. 곤란했었는데, 루크 덕분에 속 시원했어.”
엘레노어는 루카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루카스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깔끔하게 상황이 마무리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잖아도 나이 많은 대신들을 무서워하는 아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목소리를 높여 주었다. 제 상처까지 내보이면서.
그것을 알기에 엘레노어는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루크.’
루카스가 가슴을 쫙 펴고 두 손을 허리에 착 얹으며 말했다.
“또 누가 괴롭히면 말만 해요! 다 혼내 줄게요.”
“정말?”
“네!”
아이고, 귀여워라.
엘레노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루크가 아카데미에 있을 땐 어떡하지?”
“음…….”
곰곰이 생각하던 루카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때는 형님이 다 혼내 줄 거예요!”
힘찬 대답에 엘레노어가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스러웠다. 엘레노어는 루카스를 당장이라도 꼭 안아 주고 싶은 것을 꾹 누르며 말했다.
“선생님은 아무래도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제자를 둔 것 같아. 그렇지?”
***
엘레노어가 연회장을 빠져나와 황궁 정원을 가로질렀다. 동관에 있을 아드리안을 부르러 가기 위해서였다.
“엘레노어 에버렛.”
등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이젠트 공녀님……?”
엘레노어가 빠르게 돌아섰다.
“너 때문에……. 겨우 네까짓 것 때문에!”
표독스러운 표정의 아나이스가 엘레노어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푸른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렸다.
엘레노어가 흠칫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뭔가 일을 칠 것 같은 얼굴인데. 빨리 몸을 피하는 게 나을까?’
엘레노어는 아나이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저를 향한 적의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 우아하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아주 미묘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며 아나이스의 적의는 점점 뚜렷한 형태를 띠어 갔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녀는 특유의 세련된 도도함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이 순간 아나이스는 온몸으로 날것의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눈이 반쯤 뒤집힌 듯했다.
“네가 나보다 나은 게 뭔데 내 것들을 다 빼앗아 가는 거야? 재수 없는 년.”
귀에 꽂히는 욕지거리에 엘레노어의 눈썹이 움찔했다. 하지만 일단은 아나이스를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공녀님, 일단 진정하세요. 트인 공간이라 듣는 귀가 있을 수 있어요.”
“교양도 모르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계집애 주제에……!”
실핏줄이 선 눈을 부릅뜨며 아나이스가 이를 드러냈다. 여신처럼 아름답던 얼굴이 추하게 일그러졌다.
“너 때문에 내가 이런 개망신을 당한 거잖아.”
억지스러운 궤변이었다.
엘레노어는 차분한 목소리로 사실관계를 짚어 나갔다.
“공녀님, 저는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오늘뿐만이 아니라 지금껏 저는 공녀님께 어떤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공녀님의 폭언을 인내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옳은 말만 조곤조곤 늘어놓는 엘레노어의 화법은 오히려 아나이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아나이스가 목소리를 높여 바락바락 우겼다.
“네가 황자 저하를 들쑤신 거잖아! 우습지도 않아서. 평생 제 형의 그림자에 가려 살던…….”
아나이스가 루카스를 건드린 순간, 엘레노어의 표정이 변했다. 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엘레노어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 조심하세요. 지금 하시는 말, 책임질 수 있으신가요?”
아나이스가 아차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발언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엘레노어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자 저하께서는 공녀님이 제게 하시던 행동을 공녀님께 그대로 돌려드린 것뿐입니다. 거기서 부당함을 느끼셨으면, 공녀님께서 제게 하신 행동부터가 부당했다는 뜻이겠지요.”
엘레노어의 말에 아나이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반박하고 싶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무언가 공녀님께 잘못을 했다면 말씀해 주세요. 반성하고 고치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엘레노어에게 말로도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아나이스의 혈기가 또 한 번 울컥 솟았다. 아나이스가 엘레노어의 뺨을 내리치려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감히 누굴 가르치려 들어? 여기저기서 조금 떠받들어 준다고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
엘레노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짝!
선명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뺨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뭐지? 분명 맞은 소리가 들렸는데.”
엘레노어가 눈을 번쩍 떴다. 누군가 엘레노어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달리아……?”
그녀의 정체를 알아본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달리아 모리스였다.
달리아는 엘레노어 쪽을 뒤돌아보지 않고 아나이스를 향해 말했다.
“아나이스, 여기서 멈추세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아나이스가 달리아를 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녀가 거기서 끼어들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듯했다.
“……달리아 모리스, 지금 나를 배신하는 건가요? 이젠트 공작가와 척을 지겠다는 거예요?”
발갛게 부어오른 뺨을 손으로 슥 쓸어내린 달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을 배신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요. 공녀님께 남은 우정을 전부 그러모아 한 번의 기회를 더 드린 거예요.”
“그게 무슨…….”
“엘레노어에게 사과하고, 상황을 수습할 기회 말이에요.”
달리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젠트 공작가와 척을 지는 거냐고 물으신다면, 아마도요. 그거야 공녀님 처분에 맡기겠어요.”
“허…….”
아나이스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달리아가 끼어든 이후로 그녀는 조금씩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엘레노어를 더는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 여기서 멈추지 않으신다면 공녀님이 배후에서 움직이신 일들을 전부 폭로할 테니까요.”
달리아의 말에 아나이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달리아 당신은 무사할 것 같아요? 당신도 깨끗하지 않잖아.”
달리아는 선선히 인정했다.
“알아요. 하지만 감당할 준비가 되었어요.”
“미쳤어, 정말…….”
아나이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이미 일은 커질 대로 커져 버렸다.
창피를 당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교계에서의 입지도 더욱 좁아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했던 일들이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녀의 위기가 아닌 가문의 위기가 될 것이 훤했다.
어쩌면 법정 싸움까지 갈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더는 뻗댈 수가 없었다.
“그러죠.”
아나이스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그러모아 엘레노어를 턱짓했다.
“하지만…… 저 여자한테 사과만은 절대 못 해요.”
“그럼 하지 마세요.”
엘레노어가 곧바로 대답했다. 늘 그렇듯 덤덤한 말투였다.
“저도 마음에도 없는 사과, 억지로 받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요. 솔직히 사과할 기회를 드리고 싶지도 않아요.”
엘레노어가 아나이스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말했다. 단단하고 곧은 시선에 아나이스가 어깨를 잘게 움찔했다.
“달리아를 봐서 한 번의 기회를 더 드리기는 하겠지만,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엮이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저는 오래 참는 사람이지만, 그냥 당하고만 사는 사람은 또 아니라서요. 슬슬 한계이기도 하고…….”
엘레노어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건넸다.
“부디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안녕히.”
***
뒤늦게 루카스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이즈멜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엘레노어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이젠트 공녀의 행동에는 화가 났지만, 그에 대한 루카스의 대처는 뿌듯했다. 연회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은 루카스가 무척이나 영민하고 용감하다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엘레노어가 그만큼 좋은 선생님이 되어 줬기 때문이겠지.’
이즈멜은 새삼 루카스가 엘레노어를 만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동생에게는 제가 자라며 겪었던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은데. 엘레노어에게 고마움도 표현하고 싶고…….”
이즈멜이 생각한 것을 무심코 입 밖으로 흘렸다. 그러자 곁에 있던 수석보좌관 헨리가 대답했다.
“작은 축하연을 한 번 더 여시는 건 어떻습니까?”
“응?”
헨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잖습니까. 이번 연회가 사실 황자님께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렇지.”
“가까운 몇몇 사람들만 초대해서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 좋지 않겠습니까? 에버렛 영애께는 작은 감사패라도 준비하고요.”
이즈멜이 옳다구나 무릎을 탁 쳤다.
“좋은 생각이야, 헨리. 그렇게 준비해 줘.”
“예, 알겠습니다.”
“자네가 괜히 수석보좌관인 게 아니라니까.”
헨리가 씩 웃으며 이즈멜의 칭찬을 받아쳤다. 오랜 기간 합을 맞춰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물론입니다. 드와이트 에버렛이 일은 완벽하게 잘하지만, 이런 센스는 제가 훨씬 낫지요.”
“그렇군.”
“초대 명단을 완성해 주시면 제가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 엘레노어에게는 내가 직접 보내지.”
헨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