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황궁에서 루카스의 아카데미 입학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루카스가 주인공으로 참석하는 첫 연회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나이가 어려 공식적인 자리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었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아드리안과 함께 입장한 엘레노어가 긴장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잘 해내야 할 텐데…….”
장내에 모인 모두가 그녀를 힐끔거리고 있었으나, 오늘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루카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데,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혹시 실수해 쓸데없는 꼬투리가 잡히지 않을까.
전처럼 못된 어른들이 떠들어대는 말에 상처받지는 않을까.
엘레노어는 안절부절못하며 루카스의 등장을 기다렸다. 아드리안이 그런 엘레노어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엘렌. 괜찮을 거야.”
“응, 그렇겠지.”
엘레노어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때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황족 입장 순서가 된 것이다.
“루카스 아이반 드 벨리움 황자 저하 드십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루카스가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루카스는 앨버트로스 문양이 금사로 수 놓인 흰색 예복을 입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준비된 자리에 앉은 루카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도 희던 얼굴이 오늘따라 더 창백했다.
연회가 시작되고, 사람들은 루카스 앞에 줄을 서서 선물과 인사를 건넸다. 잔뜩 긴장한 루카스는 긴장한 나머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황자 저하는 황태자 전하와는 많이 다르신 것 같군. 저렇게 긴장한 티가 역력하셔서야…….”
“황태자 전하께서는 저 나이 때도 어른스럽고 의젓하셨지. 기억하나?”
“암, 기억하고말고. 아카데미에서 좀 잘 배우셔야 할 텐데 말이야. 그래야 형님의 반절이라도 미치지 않겠어?”
노귀족들이 낄낄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엘레노어가 두 주먹을 꼭 그러쥐었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일 뿐이다. 아이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데 긴장하지 않고 의연한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저렇게 사사건건 전하와 비교당해 왔겠지.’
어떻게든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던 이즈멜도, 그런 형과 늘 비교당하는 루카스도 짠하게 느껴졌다.
엘레노어의 차례가 되고, 엘레노어는 루카스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입학 선물을 내려놓았다.
“선생님!”
엘레노어를 본 루카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축하드려요, 저하.”
“저하 싫어.”
존댓말을 쓰는 엘레노어가 낯선지 루카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듣다 보면 익숙해지실 거예요.”
엘레노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루카스를 달랬다. 하지만 루카스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선생님은 그냥 루크라고 불러 주세요, 평생!”
“알았어요.”
“존댓말도 싫어요.”
내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는지, 루카스가 울먹였다. 엘레노어는 그런 루카스의 어리광을 웃으며 받아 주었다.
“그래, 알았어.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그렇게 할게.”
작게 속삭인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정말 잘하고 있어. 선생님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힝.”
“그나저나 오늘 루크 진짜 멋있다. 에나가 봤으면 반했겠는데?”
엘레노어가 루카스의 옷 주름을 살짝 펴 주며 말했다. 반듯하게 차려입자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진짜요?”
“응, 진짜.”
엘레노어의 말에 루카스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입가에 사르르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루카스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지자, 엘레노어는 한층 마음이 놓였다. 아드리안도 루카스를 향해 몇 마디 축하를 건넨 뒤 엘레노어의 뒤를 따랐다.
홀의 중앙으로 걸어간 두 사람은 익숙하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경쾌한 춤곡이 시작되고, 이제는 제법 능숙해진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방금까지 루카스를 어르고 달랬기 때문일까.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팔의 감촉이 오늘따라 생소하게 느껴졌다.
엘레노어가 씩 웃으며 물었다.
“리안, 너는 네 입학식 날 기억나?”
“아니. 거의 안 나.”
“너도 저만한 시절이 있었는데……. 그땐 나보다 작았는데 언제 나보다 이만큼이나 커진 거야?”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애정 어린 말이라는 걸 알지만, 아드리안은 가끔 엘레노어가 제 어린 시절을 전부 기억하는 게 조금 싫기도 했다.
‘이제는 그냥 남자로 보이고 싶다고.’
아드리안이 어깨를 쭉 펴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약간의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니었던 척한다? 누가 들으면 넌 처음부터 어른이었는 줄 알겠네.”
“난 처음부터 어른이었어. 인생 2회차라고.”
엘레노어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말했다.
아드리안이 낮게 웃었다. 진담이었지만, 당연히 아드리안에게는 농담으로만 들리는 이야기였다.
춤추는 동안 아드리안은 엘레노어의 얼굴을 슬쩍슬쩍 살폈다.
장밋빛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엘레노어는 늘 그렇듯 예뻤다. 하지만 어쩐지 조금 지쳐 보이기도 했다.
“엘렌, 괜찮아?”
“뭐가?”
“한동안 난리였잖아.”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들었잖아. 잘 해결되었으니 됐어. 나는 뭘 할 필요도 없었다니까?”
“그건 잘된 일이지만…….”
엘레노어가 마음 놓으라는 듯 둥글게 눈을 휘며 웃었다.
“괜찮아. 걱정했어?”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네가 그런 걸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아니까.”
“피곤하긴 했지. 처음엔 머리끝까지 화도 났고.”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익숙해져야지. 다행히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조금 더 많은 것 같더라고.”
***
두 곡을 연달아 춘 뒤, 아드리안은 사업 파트너들과 함께 잠시 연회장을 비웠다.
그러자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 하나가 엘레노어 앞에 등장했다. 꼭 엘레노어가 혼자 남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아,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아나이스였다.
“오랜만이에요, 엘레노어.”
엘레노어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펴며 마주 인사를 건넸다.
“워낙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식이 많다 보니 꼭 자주 본 사이 같네요.”
“그런가요?”
“오늘은 블레이크 소후작이랑 함께 오셨나 봐요. 매번 엘레노어가 누구랑 같이 올지 예상하는 재미가 있다니까요.”
아나이스가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이었지만, 엘레노어는 의연하게 웃으며 넘겼다.
“드레스가 참 예쁘네요.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왜 갑자기 칭찬을?
엘레노어가 의아함에 눈썹을 찡그렸을 때였다.
“어머!”
쨍그랑!
와인 트레이를 들고 가던 하녀 하나가 엘레노어의 치마 위에 그것을 엎질렀다. 연기처럼 어설픈 실수였다.
‘지금 일부러 이런 거지……?’
엘레노어가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손등을 타고 와인 방울이 흘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엘레노어의 치마폭이 불그죽죽하게 물들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아나이스가 안타깝다는 듯 제 손수건을 내밀었다.
“드레스가 망가져서 어쩌면 좋아요, 엘레노어. 일단 이걸로라도 좀 닦아요.”
“죄, 죄송합니다, 영애.”
새파랗게 질린 하녀가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얘, 뭐하니? 제대로 사과드려.”
아나이스가 하녀에게 손짓했다. 하녀가 무릎을 꿇으려는 듯 몸을 굽혔다.
엘레노어가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됐어요.”
엘레노어가 힐끗 아나이스를 쳐다본 뒤 말을 이었다.
“괜찮으니 바닥 정리나 하도록 해요.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하지만…….”
“같은 실수하지 말고요.”
엘레노어의 말에 아나이스가 활짝 미소 지었다.
“역시 엘레노어는 마음이 참 넓어요. 전부터 느낀 건데, 아랫사람들에게 참 친절하네요.”
무슨 소리냐는 듯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었다.
“참 편견도 없고, 차별도 없으세요. 가끔은 좀 염려가 될 정도로요.”
아나이스가 훈계하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랫사람을 대하면, 분수도 모르고 주인의 것을 탐낼지도 몰라요. 위아래를 정확히 가르쳐 주는 것도 귀족의 도리랍니다.”
엘레노어는 그제야 아나이스의 꿍꿍이를 완벽히 파악했다.
‘내가 뭘 선택하든 상관없는 거였구나.’
만일 하녀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게 했다면, 아나이스는 그것을 꼬투리 잡아 엘레노어를 공격했으리라. 그리고 엘레노어가 그녀를 제지하자, 이제는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하긴, 저런 하녀나 본인이나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었죠? 배움이 깊어서 그런지 사고가 참 특별하세요. 한낱 하녀 따위와 자신을 같이 보다니.”
주위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벨리움은 한국과 달리 철저한 계급 사회였고, 이는 귀족들에게 무척 민감한 문제였다. 여기서 조금의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신분과 황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몰려 곤경에 빠질 수도 있었다.
엘레노어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던 때였다. 엘레노어의 뒤에서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젠트 공녀.”
루카스였다.
“지금 나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예상치 못한 황자의 개입에 장내가 술렁였다. 엘레노어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잔뜩 움츠러들어 인사 한마디 제대로 못 하던 황자였다. 그런데 지금 아나이스의 앞에서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소년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평소의 장난기도, 수줍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엘레노어는 루카스에게서 이즈멜을 완벽하게 겹쳐 보았다.
“저, 저하? 그게 무슨…….”
루카스가 아나이스의 말을 끊었다.
“내 어머니가 하녀 출신이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이 자리에 없을 텐데.”
“그, 그건…….”
“목소리가 워낙 커 듣지 않을 수가 없던걸.”
제 약점을 피하지 않고 내보인 루카스가 턱을 치켜들었다.
“날 위한 연회에서 나를 모욕하는 걸 가만히 지켜봐야 해?”
루카스의 말에 아나이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닌가. 생각해 보면 내 아버지에 대한 모욕 같기도 하고.”
황제 이야기까지 나오자 아나이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저는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그저 엘레노어에게 충고를 해 주려고 했을 뿐이랍니다.”
“충고? 그렇구나.”
루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모습에 아나이스가 안심한 듯 살짝 미소를 띠었다.
“그럼 나도 충고 하나 해 줄게.”
루카스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앞으로 내가 참석하는 황실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루카스는 황자였다. 황실의 주요 연회에는 모두 참석할 것이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황궁에서 열린 모든 연회에 얼굴을 비출 것이었다.
황실 연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상 사교계에서의 퇴출이나 다름없었다.
사색이 된 아나이스가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저하라 해도 제게 그러실 수는…….”
“있지. 나는 황족이고, 영애는 공녀인데.”
루카스가 씩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내가 윗사람이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