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백작 영애의 세 남자」
자극적인 소제목에 엘레노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를 잘 안다는 한 측근은 무척 충격적인 첫 마디로 말문을 열었다.
“엘레노어 에버렛은 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엘레노어 에버렛은 세 남자와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놀랍게도 세 남자 역시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제보자는 이것이 지인들에게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라 덧붙여 말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로 첫 번째 제보에 관한 내용을 마무리하겠다.
“사랑은 한 사람과 나누는 고귀한 감정 아닌가요? 그렇게 세 사람을 가지고 놀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부당한 것 같아요.”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겠다.」
엘레노어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해받기 쉬운 말들만 쏙쏙 골라 사용하고는 슬쩍 한 발을 뺀다. 엘레노어 측에서 기사를 문제 삼는다면 오리발을 내밀 심산인 것이 빤히 보였다.
“이제는 더 읽기도 겁난다. 혈압 올라 뒷목잡고 쓰러질까 봐.”
엘레노어가 한쪽 입매를 비뚜름하게 끌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가르침의 자격」
두 번째 소제목은 처음 것과 비교하면 약간 점잖았다.
「백작 영애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델른 아카데미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정작 엘레노어 에버렛 백작 영애는 아카데미 졸업생이 아니다. 이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고급 가정 교사들이 아카데미 졸업생인 것과는 사뭇 다른 이력이다.
수많은 학부모가 백작저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마무시한 조건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꼭 한번 점검해 보았으면 한다.
백작 영애에게 그만한 실력과 자격이 있는가?」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꼭 그녀를 실력 없는 사기꾼 취급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했다.
「날개 없는 천사 혹은 자본의 노예」
마지막 소제목을 본 엘레노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둘 중에서 고르면 자본의 노예지. 말이라고…….”
돈 최고. 자본 최고. 노동 안 최고.
“이런 식으로 기사 쓰는 사람들을 죄다 펜을 꺾어야 해.”
엘레노어는 천사도 아니거니와, 남들이 저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기를 원한 적도 없었다. 자의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이미지로 꼬투리를 잡히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원치 않았는데 주어진 유명세란 이토록 피곤한 것이었다.
“날개 없는 천사의 반대가 자본의 노예야? 무슨 이런 멍청한 기사가 다 있어.”
엘레노어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엘레노어 에버렛 백작 영애에게 탁월한 사업적 감각이 있다는 것은 학습지 사업과 뫼젠어 소책자 사업으로 충분히 검증되었다.
그런 영애가 황실과 손잡고 평민들을 위한 문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생인가! 평민들 사이에서 에버렛 가의 이름이 드높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다.
하지만 영애는 그 대가로 절대 적지 않은 봉급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그 봉급은 제국민들의 세금으로 지급된다.
이에 더해 교재를 그녀의 사업 파트너인 ‘B’상단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 등 뒤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그녀의 행동을 아름다운 선행으로만 보기 힘든 이유다.」
“내가 무슨 막대한 이익을 얻어……?”
요약하자면, 그녀를 돈독 오른 속물로 매도하는 기사였다. 교묘하게 사실을 비틀고 사람들이 오해하기 좋은 말들을 늘어놓으며 군중 심리를 선동하고 있었다.
“정당하게 일해서 봉급을 받은 건데, 그게 왜 문제가 되지? 저는 월급 안 받고 사나 보지?”
이런 걸 쓰고 봉급을 받다니, 참 양심도 없어……. 양심이 없으니 이런 쓰레기 같은 기사를 쓰는 거겠지만.
엘레노어가 기사를 쓴 기자를 욕하며 신문을 구겨 쥐었다.
“제대로 준비해서 대응할 거야.”
엘레노어가 속으로 칼날을 갈았다. 이런 일은 강력하게 대응해야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본의 노예가 어떤 건지 알려 줘야지.”
***
“신문 사세요!”
자극적인 제목을 내세운 타블로이드지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수도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판매가 이어질 정도였다.
엘레노어는 이 일로 제 영향력을 확실히 실감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엘레노어 에버렛’이라는 이름은 벨리움에서 일종의 흥행 보증 수표가 되어 있었다.
모두가 그녀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하자, 엘레노어는 덜컥 겁이 났다.
‘이거 그냥 지켜봐도 괜찮은 걸까……? 일이 좀 커지는 것 같은데.’
하지만 상황은 엘레노어의 생각과 반대로 흘러갔다.
‘……아니, 이게 이렇게 풀린다고?’
그러니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뜻이다. 그것도 아주아주 좋은 쪽으로.
“분명히 이 제보자라는 사람이 영애를 질투한 게 틀림없어. 이건 그냥 인기가 많은 거잖아.”
“남자들끼리도 서로 안다는 건, 공공연하고 적극적인 구애라는 건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그러고 보니 전에 한창 시끄럽지 않았어? 발렌타인 공작 각하와 블레이크 소후작 말이야.”
“그렇게 대단한 분들이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걸 보니 더 믿음이 가. 그만큼 영애가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사람들은 악의적이고 자극적인 기사에 휘둘리지 않았다. 엘레노어의 연애사에 대한 폭로는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부럽다. 나도 다음 생에는 그렇게 살아 보고 싶어. 생각만 해도 황홀하지 않아?”
“맞아. 두 사람 말고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굴지 궁금하다. 분명 그분도 발렌타인 공작 각하만큼 멋진 분이겠지?”
“영애 같은 분은 과연 누굴 선택하시려나…….”
또 엘레노어의 실력에 대해 의심한 기사 역시 아무런 공격력도 지니지 못했다. 우연히 벨리움을 방문한 아스터 로고스토아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쐐기를 박았기 때문이다.
“요즘 항간에 시끄러운 말들이 많이 돌던데…… 기회가 온 김에 말해 두지요. 엘레노어 양의 실력은 제가 보증합니다. 제가 그녀를 따로 시험해 보았기에 확실히 압니다.”
아스터는 덧붙여 발표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로고스토아 재단의 국제 연구생 자리도 제안한 바가 있습니다. 악의적인 기사로 재능 있는 한 젊은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국제 연구생.
그 말은 다른 어떤 설명보다 강력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 단 세 명만이 가질 수 있는 자격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필요도 없었다는 거네. 더 대단한 거 아니야?”
“국제 연구생까지 제안받았다니 말 다 했지, 뭐.”
“다음번 제자로는 또 어느 집 아이들을 받으시려나. 내가 학부모라도 맡기고 싶겠다.”
엘레노어가 가장 걱정했던 마지막 기사 역시 엘레노어를 공격하지 못했다.
“세금이야 그런 곳에 쓰라고 있는 거 아닌가?”
“애초에 황태자 전하께 이 사업을 제안한 것이 에버렛 영애였다 들었어. 영애가 아니었다면 이 일은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 거야.”
기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엘레노어를 향한 사람들의 호감이 생각보다 강력했다는 것이다. 이는 거의 팬덤에 가까웠다.
특히 벨리움의 젊은 여성들에게 엘레노어는 일종의 롤모델이었다. 그녀의 선택 하나하나가 유행이 되고 기준이 되었다.
“우리가 이런 말 몇 마디로 홀라당 선동되어 넘어갈 줄 알았나 보지?”
“애초에 우리가 이런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게 누구 덕인데. 못된 신문사 놈들.”
“누구 하나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꼭 있다니까.”
그런 엘레노어를 건드리자,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해 분노하기 시작했다. 마을 광장에 모여 타블로이드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신문사 사장의 집 앞에 침을 뱉기도 했다.
“이런 곳은 혼쭐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주 쫄딱 망해 봐야 해.”
결국, 신문사는 타블로이드지 1면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또한 백작저로 길고 긴 사과 편지와 약간의 배상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다시 한번 깊이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신문사 사장의 편지를 읽은 엘레노어가 한쪽 코를 씰룩했다.
‘망하는 건 무서운가 보지.’
이렇게 깨갱 하며 꼬리 내릴 거면서 무슨 자신감이었담.
“손 안 대고 코 풀었네.”
배상금의 액수를 세어 보던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주 만족스러운 돈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피해 본 것도 많지 않았기에 받아들일 만했다.
엘레노어는 신문사에서 받은 배상금을 모두 보육원에 기부했다. 이 돈은 그녀를 위해 나서서 싸워 준 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제국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이렇게 마음씨가 고운 분인데…….”
“앞으로도 영애는 우리가 지켜드리자!”
***
“으으!”
회심의 일격을 장렬히 실패한 아나이스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엘레노어를 무너뜨리기는커녕, 그녀의 명성만 오히려 한층 드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도대체 어떤 악연이기에 이다지도 질긴지 모를 노릇이었다.
“운 좋기는……! 정말 마음에 안 들어. 확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이대로 안 놔둘 거야.”
그런 아나이스를 옆에서 바라보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녀님, 아무래도 백작 영애는 그만 놓아주시는 게…….”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하지만 하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철썩.
순식간에 하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뒷골이 징하게 울릴 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하녀가 얼얼한 뺨을 손으로 감쌌다.
“네가 뭔데 나한테 충고야? 너도 이젠 내가 우습니? 네가 내 친구라도 되는 것 같아?”
아나이스가 싸늘한 눈빛으로 하녀를 노려보았다.
“……아닙니다, 공녀님.”
“너는 네 할 일이나 해. 주제넘게 굴지 말고.”
아나이스가 쿠션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고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녀가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어. 곧 무도회가 열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하녀가 또 혼날세라 얼른 대답했다.
“예, 공녀님. 어제 황궁에서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가지고 와.”
아나이스의 손 위에 빳빳한 초대장 봉투가 놓였다.
「……황자 저하의 아카데미 입학 축하연을 개최하오니 귀빈 여러분께서는…….」
초대장을 대충 읽어 내린 아나이스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카데미, 아카데미, 아카데미!
온 세상이 그 얘기만 떠들어대는 것 같았다.
“그깟 학교가 뭐라고 다들 이 난리인지.”
재수 없어.
아나이스는 연회에서 엘레노어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그 시작은 등장부터 장내를 압도해 버리는 것이었다.
아나이스가 몸을 일으켰다.
“드레스를 보러 가야겠어.”
“죄송합니다. 고, 공작님께서 아가씨 몫의 예산을 전부 깎으셔서…….”
“뭐? 그럼 뭘 입고 연회에 가란 소리야?”
아나이스가 펄쩍 뛰었다.
한 번도 돈이 부족해 뭔가를 못 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게 죄다 엘레노어 에버렛 그 계집애 때문이다.
“아악! 짜증 나!”
정말이지 뜻대로 풀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