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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08화 (108/168)

108화

“아가씨, 또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알베르가 편지가 수북하게 쌓인 트레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엘레노어는 기가 질린 눈으로 편지 더미를 바라보았다.

아니, 저게 다 뭐람.

“또요? 아직 반도 답장하지 못했는데요.”

“한동안은 답장만으로도 하루가 짧으시겠습니다.”

“그러게요. 거절도 일이네요.”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카데미 시험 결과가 나오고, 백작저에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저희 아이가 올해로 아홉 살…….」

「저희 아들의 선생님이 되어 주신다면 무척이나 기쁠 것 같습니다.」

「사례는 원하시는 대로…….」

열에 일곱은 제 아이의 선생님이 되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아이들 셋이 모두 합격한 데다, 데미안은 수석 합격까지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그건 그냥 데미안이 똑똑해서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까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럼 나머지 셋은 무엇이었냐고? 거기에는 나름대로 다양한 유형이 있었다.

「새로 생각하시는 사업이 있으시다면 저희 로시엘 상단과 함께하시는 것은 어떠실지요? 계약 조건은 영애께 최대한 맞추어 드리고자 하니…….」

제일 흔한 유형은 역시 사업에 대한 제안이었다. 자기네들과 함께 사업을 진행해 보자거나, 고견을 듣고 싶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는데, 엘레노어는 당연히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됐거든요.’

「에버렛 백작가와는 선조 때부터 인연이……. 언제 한번 근사한 식사라도 대접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요.」

두 번째 유형은 조금 더 독특한 것이었다.

이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대부분 약간의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친근한 안부 편지로 시작된 편지는 점점 에버렛 백작가와 제 가문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변해 갔다.

‘요약하면 줄을 대고 싶다는 거잖아?’

엘레노어는 제 가문의 달라진 위상을 새삼 실감했다.

에버렛 백작가는 나름대로 부유하지만, 특별히 눈에 띄지는 않는 가문이었다. 에버렛 백작은 야심이 없고 안정 지향적이라 정치에서는 늘 한 발짝 물러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와이트가 황태자의 보좌관이 되고, 엘레노어가 황실 훈장까지 받으면서 수도에서 에버렛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 에버렛 백작가는 제국민의 존경을 받는 발렌타인 공작가,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을 소유한 블레이크 후작가와도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것은 후작가, 아니, 공작가라 해도 에버렛 백작가를 쉽게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좀 부담스럽네.’

하지만 마지막 유형의 편지만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항상 멀리서 응원하고 있답니다! 연회에서 봤는데 너무 예쁘세요. 정말 친해지고 싶어요. 다음번 연회에서 뵌다면 인사할게요. 꼭 받아 주세요.」

분홍빛, 살굿빛, 하늘빛 편지지에서는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로 쓰인 편지들은 여타 편지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팬레터. 그래, 한국에서는 이런 걸 보통 팬레터라고 부를 것이다.

엘레노어는 그녀가 얼마나 대단하고 예쁘고 멋있고 귀엽고 근사한지에 대해 줄줄 늘어놓은 편지를 읽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은 당장에라도 펑 터져 버릴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맙긴 한데…….’

「안녕하세요. 엘레노어 에버렛입니다. 편지 잘 받았어요.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펜을 들고 답장을 쓰던 엘레노어가 책상에 이마를 쿵 하고 박았다. 오글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죽는다면 사인은 수치사일 거야…….’

엘레노어는 잘 몰랐지만, 수도의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엘레노어 에버렛’은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은 드레스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기본, 수수하게 반만 묶은 머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아카데미 진학을 희망하는 여자아이들도 늘어났다.

엘레노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 수도의 한쪽, 음습한 기운이 스멀스멀 솟구치기 시작했다.

***

아나이스는 현관으로 들어선 이젠트 공작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초저녁인데……?’

매주 목요일은 사교 클럽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젠트 공작은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늘 밤늦은 시간에나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 왜 이렇게 일찍 돌아오셨어요?”

아나이스가 다가가자 공작은 버럭 역정을 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물러나라.”

사교 클럽은 벨리움의 귀족 중에서도 허가받은 몇몇만 출입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고위 남자 귀족들의 살롱 같은 곳이었다.

클럽 내에도 계급이라는 게 존재했는데, 이젠트 공작은 그 꼭대기인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만큼 클럽에 투자하는 돈과 시간이 엄청났고, 아름다운 딸 아나이스를 욕심내는 이들 역시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클럽에서는 늘 그렇듯 화려한 내기판이 열렸지만, 공작은 평소처럼 낄 수 없었다. 최근 자금난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구석에 앉아 애써 굴욕감을 누르고 있는 공작에게 크로반느 후작이 다가왔다. 클럽의 차기 회장직을 노리는 남자였다.

“각하, 오늘은 어쩐 일로 끼지 않으십니까?”

이젠트 공작이 입술을 떼려던 때였다. 그의 곤란함을 뒤늦게 눈치챘다는 듯, 후작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참, 제가 무신경했군요. 용서하십시오. 괜찮으시다면 오늘 술값은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비싸고 좋은 술이 들어왔다 하더군요. 기꺼이 대접하고 싶습니다.”

“됐소. 오늘은 몸이 조금 좋지 않아 쉬고 싶은 것뿐이니.”

이젠트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제까짓 게 감히 나를 무시해?’

그런 와중에 빌어먹을 사업 계획서를 들이민 아나이스와 맞닥뜨리자 그 분노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네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어디서 헛바람만 잔뜩 들어와서는…….”

공작이 노기 성성한 목소리로 아나이스를 윽박질렀다.

“이번 일로 손해 본 돈이 얼마인지 아느냐? 별장을 두 채나 처분했어! 내가 바깥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단 말이다.”

“하지만…….”

아나이스가 억울함에 눈썹을 찡그렸다. 사업을 제안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검토하고 승인한 것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아나이스가 작게 항변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도 좋은 계획이라고 하셨잖아요? 저 혼자 사업을 진행한 것도 아니었고…….”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답이냐!”

공작이 호통을 쳤다. 그는 아나이스의 얼굴에 바짝 손가락을 들이대며 삿대질을 했다.

“이게 벌써 두 번째다. 방에서 근신하고 다시는 가문 일에 관여하지 마라!”

공작이 홱 돌아서며 낮게 뇌까렸다.

“에버렛 백작은 딸 하나 잘 둬서 요즘 승승장구하던데……. 돈을 쓸 줄이나 알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쯧.”

공작의 말에 아나이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엘레노어와의 비교는 그 어떤 모욕보다 더 뼈가 아팠다.

방으로 돌아온 아나이스는 치욕감에 몸을 떨며 생각했다.

‘엘레노어 에버렛……. 이게 전부 그 운 좋은 계집애 때문에!’

공작가의 재정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 그 사업들은 전부 엘레노어의 아이디어였다. 그럴 리 없겠지만, 엘레노어가 일부러 그녀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평생 짝사랑한 남자인 카이델이 그녀를 짝사랑한다. 제게 집중되던 사람들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흘러간다.

사업 실패로 공작가의 재정이 기울자, 아나이스에게 딱 달라붙어 온갖 아부를 늘어놓던 영애들은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자존심 상해!’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까지 그녀와 저를 비교하다니.

아나이스는 근신 기간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이를 갈았다. 엘레노어의 하녀였던 클로에는 그런 아나이스의 분풀이 대상이 되었다.

클로에에게 머리 손질을 맡긴 아나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카락이 아주 살짝 당겨진 것뿐이었지만, 트집을 잡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

“죄, 죄송…….”

“머리 손질 하나 야무지게 못하다니, 쓸모없기도 하지. 네 전 주인을 닮아서 그런 거니?”

엘레노어를 헐뜯는 말에 클로에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너를 거둬 주었으니 너도 내게 도움이란 게 좀 되어 보렴. 엘레노어 에버렛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할 정보라도 말해 보란 말이야. 하녀들에게 손찌검했다거나…….”

클로에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엘레노어 아가씨는 저희에게 늘 친구처럼 잘 대해 주셨어요.”

“친구처럼이라. 하긴, 수준은 딱 맞겠구나.”

클로에의 말에 아나이스가 코웃음을 흘렸다.

“그 이야기나 더 해 봐. 엘레노어 에버렛이 대체 어떻게 그 남자들을 가지고 놀게 된 건지.”

클로에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그런 분이 아니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여기저기 꼬리 치고 다닌 거지.”

가식적인 계집애.

아나이스가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쟁쟁한 남자들이 그런 평범한 여자에게 목을 맬 리가 없었다.

‘그래, 그렇지.’

아나이스의 머릿속에 엘레노어를 망가뜨릴 수 있는 아이디어가 문득 떠올랐다.

‘엘레노어 에버렛이 얼마나 가식적인 사기꾼인지 사람들도 전부 알아야 해.’

아나이스가 클로에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엘레노어의 아래에 있다가 온 아이인 만큼 완벽히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가서 잔느보고 들어오라고 전해.”

“아직 머리 장식이 끝나지 않았는데요.”

“됐으니까 나가. 말 두 번 시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천것들은 역시 못 배워먹어서…….”

클로에가 얼굴을 붉히며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예, 공녀님.”

***

「엘레노어 에버렛, 그녀의 사생활」

며칠 뒤, 타블로이드지가 엘레노어에 대한 기사를 1면에 내세웠다. 벨리움에서 가장 악의적이고 끈질기기로 유명한 신문이었다.

「근래 벨리움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인물을 꼽자면, 단연 엘레노어 에버렛 백작 영애일 것이다.

황자 저하를 비롯해 공작가 영윤, 후작가 영애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알려진 그녀는 최근 사회사업으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녀는 문해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황실 훈장을 받기도 했다.

‘에버렛 신드롬’의 주인공인 그녀는 평민들과 귀족들의 사랑을 말 그대로 ‘독차지’ 하고 있다. 엘레노어 에버렛, 그녀는 정말 보이는 것만큼 좋은 사람일까?

우리는 그녀의 최측근이라는 한 사람의 증언을 확보했다. 사실에 대한 판단은 모두 독자에게 맡기겠다.」

“허.”

기사를 읽던 엘레노어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뭐라는 거야, 이 똥멍청이들은.”

엘레노어가 짜증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그야말로 예의도 개념도 언론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는 짓이었다. 명백한 사생활 침해였으며, 명예 훼손이었다.

엘레노어는 싸늘한 표정으로 기사를 쭉 읽어 내려갔다.

“무슨 개소리를 이렇게 장황하게 지껄여 놓았는지 읽어나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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