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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07화 (107/168)

107화

아이들의 시험 결과 발표일이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백작저에 세 아이가 모두 모였다. 결과는 꼭 다 함께 확인하자며 성적표의 수신처를 에버렛 백작저로 지정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에나!”

“야, 너 키 컸다? 이젠 네가 나보다 조금 큰 것 같기도 한데?”

“데미, 너는 피부가 조금 탔네? 엄청 재미있게 보냈나 보다.”

오랜만에 응접실이 떠들썩한 것을 보자, 엘레노어는 약간의 뭉클함을 느꼈다. 그리웠던 풍경이었다.

엘레노어뿐만 아니라 백작 부부와 사용인들도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모두 응접실을 기웃거리며 아이들과 눈인사를 나누려 애썼다.

엘레노어가 손뼉을 쳐 어수선한 분위기를 환기했다.

“다들 배고프지? 일단 밥부터 먹자.”

“좋아요!”

“얼른 손부터 씻을까?”

식탁 가득 아이들의 입맛에 딱 맞춘 음식이 차려졌다.

루카스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시에나가 좋아하는 단호박 수프, 데미안이 좋아하는 새우 요리까지. 이렇게 다 함께 둘러앉아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이제 많지 않을 것을 알기에 더 신경 써서 준비한 식사였다.

“맛있겠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거야.”

약간의 어색함과 긴장감은 식사와 함께 눈 녹듯 사라졌다. 아이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그때 알베르가 엘레노어를 향해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잠시 나와 보시지요.’

엘레노어가 살며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가자, 알베르가 편지 봉투 석 장을 건네주었다. 엘레노어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아카데미 시험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하아……. 왜 이렇게 긴장이 되죠?”

봉투를 받아 든 엘레노어가 기도하듯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제 시험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었는데, 심장이 마구 벌렁거렸다.

“괜찮을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

다른 아이들은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시에나가 문제였다.

‘만약에라도 결과가 나쁘면…… 그땐 따로 살짝 전해주는 게 나을 테니까.’

엘레노어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시에나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잘 접힌 종이가 손끝에 닿자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엘레노어가 성적표를 꺼내 들었다.

‘제발…….’

엘레노어는 눈을 꼭 감은 채 종이를 펼쳐 들었다. 실눈을 뜨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엘레노어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어떻습니까?”

알베르가 애타는 목소리로 엘레노어를 재촉했다. 담담한 척했지만, 그도 무척이나 궁금했던 눈치였다.

한참이나 멍하니 성적표를 내려다보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그게 말이에요…….”

***

“먼저, 다들 정말 많이 수고했다고 말해 주고 싶어.”

엘레노어가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거실에 올망졸망 모여 앉은 세 아이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커다란 눈들이 자꾸만 엘레노어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로 이끌려 내려갔다. 엘레노어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열심히 잘 따라와 줘서 정말 고마웠어. 너희처럼 착하고 예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선생님한테 행운이었던 것 같아.”

울컥.

순간 엘레노어의 안에서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밝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니까…….”

숨을 한번 고른 엘레노어가 말을 이었다.

“세 사람 다 아카데미에서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행복하게, 또 서로 친하게 잘 지내야 해.”

붙잡을 틈도 없이 엘레노어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엘레노어는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다고, 겨우 1년 남짓을 함께 보냈을 뿐인데 핏덩이 때부터 업어 키운 것처럼 군다고 제게 핀잔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가슴을 뻐근하게 하는 뿌듯함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합격 축하해, 얘들아.”

엘레노어의 말에 아이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깜빡이고만 있었다.

루카스가 물었다.

“합격이에요?”

“응. 합격이래.”

이번에는 데미안이 물었다.

“우리 다요?”

“응. 너희 다.”

얼떨떨한 표정의 시에나가 확인하듯 물었다.

“진짜예요?”

“응, 진짜야.”

엘레노어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우리 아가들.”

그제야 실감이 나는지, 아이들의 얼굴이 해처럼 환해졌다.

“와아!”

“우리 다 합격이래.”

“우리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

흥분으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어이들이 엘레노어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선생니임, 저희 다 합격했어요!”

엘레노어는 세 아이의 무게에 잠시 휘청했지만, 이내 두 팔을 쫙 벌려 아이들을 힘껏 마주 안아 주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집사와 하녀들도 몰래 눈가를 훔쳤다. 그들도 그동안 아이들과 정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엘레노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거기다 더 좋은 소식도 있어.”

엘레노어의 말에 시에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더 좋은 소식이요?”

“응, 그것도 두 개나 있단다.”

뭘까.

아이들의 눈이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데미안이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대.”

엘레노어의 말에 데미안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레노어가 팔을 뻗어 데미안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트려 놓았다.

“축하해, 데미. 형이 알면 정말 기뻐하실 거야.”

엘레노어의 말에 데미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루카스가 데미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감탄했다.

“와! 너 진짜 대단하다.”

시에나도 활짝 웃으며 데미안의 성취를 축하해 주었다.

“축하해, 데미.”

“고마워, 에나.”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졸업할 땐 내가 1등 할 거니까 긴장하고 있어.”

시에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데미안의 어깨를 툭 쳤다. 내심 시에나가 신경 쓰였던 데미안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엘레노어가 뿌듯하게 웃었다. 아이들이 정말 많이 자랐다는 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키도, 지식도, 마음도 말이다.

“자자, 성적표 나눠 줄게.”

엘레노어가 아이들에게 각자의 성적표를 나누어 주었다.

「데미안 녹스 발렌타인(수험번호 3-10-0125)

필기: 375/400

면접: 91.6/100

실기: A-A-A

전체 석차 1/120

델른 아카데미 최종 합격을 축하합니다.

-귀하는 우수한 성적으로 본교의 시험을 통과하였으므로, 입학생 대표로 선정되었음을 알립니다.

입학생 대표에게는 장학금 및 각종 혜택이 제공되며, 입학식에서 대표로 선서문을 낭독하게 됩니다.

입학식과 장학 혜택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동봉한 안내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에나 블레이크(수험번호 4-10-0623)

필기:265/400

면접: 99.3/100

실기: A-A-A

전체 석차: 117/120

델른 아카데미 최종 합격을 축하합니다.

입학식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동봉한 안내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루카스 아이반 드 벨리움(수험번호 3-10-0201)

필기: 315/400

면접: 96.4/100

실기: B-A-A

전체 석차: 69/120

델른 아카데미 최종 합격을 축하합니다.

입학식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동봉한 안내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엘레노어가 시에나에게 다가가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기대했던 것과 달라도 한참 다른 결과였기에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을지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시에나는 그런 엘레노어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힘 있는 미소였다.

시에나가 말했다.

“선생님이 그때 해 준 말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무슨 말?”

“역전할 기회가 왔다는 말이요.”

시에나가 성적표의 석차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거의 꼴찌나 다름없는 등수였다.

“이제 저는 올라갈 일만 남은 거잖아요? 생각해 보니 이쪽이 더 멋있는 것 같더라고요.”

시에나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들 깜짝 놀라게 해 줄 거예요!”

시에나가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엘레노어가 웃으며 그런 시에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선생님도 깜짝 놀랄 준비 하고 있을게.”

그때 루카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선생님.”

“왜?”

“다른 좋은 소식은 뭐예요? 아까 두 개나 있다면서요!”

“아.”

엘레노어가 작게 웃었다. 시에나와 데미안도 궁금하다는 듯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다들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아. 미리 집에다 연락해서 허락을 받았거든.”

“신난다!”

엘레노어의 말에 아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싱글벙글 웃던 루카스가 물었다.

“그런데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요?”

“그것도 미리 받아 뒀지.”

엘레노어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는 밤샐 거야! 하나도 안 졸려.”

“나도.”

“안 자고 계속 놀아도 돼요?”

아이들이 잔뜩 들떠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그 순간 아주 약간의 후회를 느꼈다.

결정하기 전에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했어야 했는데!

“밤새는 건 안 돼. 일찍 자야 키도 쑥쑥 크는 거야.”

엘레노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쳇.”

“처음으로 다 같이 자고 가는 건데…….”

“백작저에서 다 같이 자는 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요.”

아이들이 눈썹 끝을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엘레노어는 그런 아이들을 기가 찬 눈으로 잠시 내려다보았다. 힐끔힐끔 엘레노어의 눈치를 살피는 게, 아기 여우들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늦게 자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 어설픈 연기에, 엘레노어는 또 한 번 넘어가 주고 말았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엘레노어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아마 언제까지나 이렇지 않을까. 너희가 쑥쑥 자라 어른이 다 되어도……. 너희가 응석을 부리면, 나는 모른 척 져 주고. 그렇게.’

***

너른 침대 두 개를 이어 붙이자 넷이 누워도 여유가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아이 셋을 다루느라 기진맥진한 엘레노어가 까무룩 잠들어 버린 사이, 아이들은 배를 깔고 누워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푹신한 침대 위를 뒹굴뒹굴하던 시에나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우리 같은 반 안 되고 떨어지면 어떡해?”

“몇 반까지 있댔지?”

“6반.”

“그럼 다른 반일 확률도 높은 거네.”

데미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쉬는 시간마다 만나면 되지. 밥도 같이 먹고, 공부도 같이하고.”

그러자 시에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들 하잖아. 못 들어 봤어?”

“그렇긴 하지만…….”

그때 루카스가 제안했다.

“그럼 우리 미리 약속하자.”

“약속?”

“우리 셋은 계속 같이 다닐 거라고 말이야. 아무리 다른 친구들이 생겨도, 제일 친한 사이는 우리인 거로 하자.”

루카스의 말에 데미안과 시에나가 동의했다.

“좋아.”

“나도 좋아.”

루카스가 새끼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다들 손가락 걸어. 빨리.”

자그마한 새끼손가락을 대충 걸어 잠근 후, 루카스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는 제일 친한 친구인 거야. 평생!”

영원한 삼총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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