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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06화 (106/168)

106화

사람들은 황실에서 새롭게 내놓은 프로그램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따로 홍보에 나설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나름대로 넉넉하게 찍어낸 쓰기 교재는 금세 동이 났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교재를 받아갔다. 일부러 두 번, 세 번씩 줄을 서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저녁마다 각 마을 광장에서 열리는 강의는 배움에 대한 열의를 가진 사람들로 늘 만석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열리던 강의는 두 번이 되고, 종국에는 하루 세 번으로 늘어났다.

“황태자 전하는 뭔가 좀 다르시군. 우리까지 전부 굽어살피는 분이시라니.”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이 나이에 글공부를 시작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공부는 귀족 나리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인 줄 알았지.”

제국민들 사이에 이즈멜의 인기가 드높아졌다. 엘레노어와 브로든 상단에 대한 평판이 올라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기왕 살 거라면 브로든 상단에서 취급하는 물건을 사는 게 낫지 않겠어?”

“물론이지. 그런 곳이 잘되어야 하는 거야.”

이는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에버렛 가문과 관계를 더 돈독히 해야겠는걸. 아들이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라 들었는데, 딸도 그렇다니……. 나중에 전하께서 황위를 이어받으시고 나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가 되겠군.”

“황실 사업에 함께할 정도라니, 신뢰가 가는군. 거기다 두루두루 평판도 좋으니, 사용한다면 내 평판에도 도움이 되겠어.”

브로든 상단의 매출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자, 다른 귀족들과 상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브랜드의 이미지가 매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이다.

‘홍보 효과가 저렇게나 좋다니! 어떻게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

‘우리도 뭔가 사회사업에 투자를 해야 하나?’

‘그동안은 귀족 고객층만 신경 썼는데……. 전략을 좀 바꿔 보는 게 좋겠어.’

어느 순간 황궁에 문해 교육 사업을 후원하고 싶다는 문의가 줄을 이었다. 다르게 말해, 광고를 넣고 싶다는 것이었다.

브로든 상단의 로고 아래에 다른 가게의 이름들이 쭉 적히기 시작했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후원금의 액수 역시 날로 높아져만 갔다.

결국은 처음에 들어간 사업비를 전부 회수하고도 남는 돈이 들어왔다. 이는 엘레노어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였다.

“훈장이요? 저한테요?”

황실은 제국의 문맹률을 낮추는 데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엘레노어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엘레노어는 어쩐지 겸연쩍어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저는 돈을 받고 한 일인데요?”

그것도 적은 돈도 아니었는데.

훈장 수여 소식을 전하러 온 황실의 시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뜻입니다.”

엘레노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황태자 전하의 뜻이 아니라요?”

“두 분은 대체로 뜻을 같이하십니다.”

……그렇다는데 더 덧붙일 말은 없었다.

***

‘무, 무서워!’

단상 아래, 난생처음 황제를 마주한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황제는 무척이나 날카롭고 서늘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이목구비는 이즈멜과 닮아 있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그대가 엘레노어 에버렛인가?”

“예, 폐하.”

엘레노어가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답했다.

“흐음.”

황제가 엘레노어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는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채 조금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이 그대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황자의 스승이었다지.”

“예, 그렇습니다.”

황제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가 그대의 칭찬을 많이 하더군. 한 번도 그 애가 누굴 그리 치켜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전하께서 저를 높이 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거기다 황후도 그대를 퍽 아끼는 것 같고, 황자도 그대를 잘 따른다지?”

엘레노어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그런 엘레노어를 시험하듯 살폈다.

“그대가 내 마음에도 들 수 있을지 궁금하군.”

황제가 슬쩍 입매를 휘었다. 그녀에게 호의적인 것도 같고, 적대적인 것도 같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올라가지.”

엘레노어는 황제를 따라 단상 위로 올라갔다. 단상 아래 모여 선 사람들을 본 엘레노어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옆에서 시종장이 지시하는 대로 삐걱삐걱 따르는 엘레노어는 긴장으로 반쯤 얼어붙어 있었다. 황제의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타의 모범이 되었다. 하여 엘레노어 에버렛에게 황실 훈장을 수여한다.”

황제는 엘레노어에게 훈장이 담긴 상자와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 올리브 가지를 건넸다. 그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영광입니다, 폐하.”

황제가 엘레노어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앞으로도 지켜보겠다.”

***

「……그 공로를 인정해 황실 훈장을 수여하였다.」

사령관실에 앉은 카이델의 손에는 며칠 전 신문이 들려 있었다. 이미 내용을 다 외웠건만, 카이델은 틈만 나면 그 짧은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신문을 내려놓은 카이델이 이번에는 얇고 누런 종이 몇 장을 집어 들었다. 제일 가까운 민가에서 어렵사리 구한 제국어 교재였다.

「엘레노어 에버렛.」

카이델의 시선이 구석에 진하게 인쇄된 이름 위에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머물렀다.

돌처럼 단단한 손끝이 활자 위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꼭 그 글자가 누군가의 손등이라도 되는 것처럼.

얇은 종이는 체온도, 향기도 없이 그저 서걱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카이델은 그마저도 소중해 쉽사리 내려놓지 못했다.

‘그대는 잘 지내는 것 같아.’

늘 그렇듯 건강하고, 똑 부러지고,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환하게 엘레노어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카이델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엘레노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사륵 녹았다.

‘다행이야.’

카이델이 감상에 젖어 들려는 때였다.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정각입니다.”

부관이 들어와 훈련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카이델이 책상 위에 종이뭉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지.”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평소 같은 서늘함을 되찾았다.

살이 좀 빠진 탓에 전보다도 더 날카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창백한 피부 위에 기다란 속눈썹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자 퇴폐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각하.”

“왜.”

그런 카이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부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각하께서 강건하시다는 것은 잘 알지만…… 사람이 좀 쉬는 날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다들 각하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

“못 미더우시겠지만, 이런 훈련은 그냥 제게 맡겨 주셔도 됩니다. 회의 참석만으로도 바쁘시지 않습니까.”

“다 함께 고생하고 있어. 나 혼자 쉴 수는 없다. 그게 내가 맡은 일이고.”

“다들 번갈아 가며 휴식을 취하고 있지 않습니까. 잠시라도 긴장을 풀고 오침이라도 청하십시오.”

카이델이 걸음을 멈춰 부관을 바라보았다.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원래라면 그저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엘레노어를 만난 후, 카이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에 새롭게 눈을 떴다. 호의를 받는 법,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법을 배웠다.

카이델이 부관의 이름을 불렀다.

“레온하르트.”

“예……?”

부관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카이델에게 성도 아니고 직책도 아닌 이름이 불린 것은 처음이었다.

행여 제 주제넘은 걱정이 상관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아닐까. 그가 바짝 긴장했다.

그런 부관과 눈을 맞추며 카이델이 입술을 뗐다.

“네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다. 나는 너를 신뢰해. 네가 나만큼 잘 해낼 것도 안다. 내가 없어도 너희가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이라 믿고 있다.”

카이델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약간의 쑥스러움을 이겨내자 그 뒤는 쉬웠다.

“하지만 아직은 내 선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오히려 다른 생각 하지 않을 수 있어 좋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버겁게 느껴진다면 그때는 반드시 네게 부탁하도록 하지.”

카이델의 말에 부관은 감격하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드디어……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 주신 건가!’

부하들은 카이델을 무척 존경하고 또 좋아했지만, 좀처럼 틈을 내어주지 않는 그의 정중함에 내심 상처를 받기도 했다. 외모는 불곰 같아도 감성만은 열여섯 소녀 같은 남자들이었으니까.

남몰래 콧물을 훔친 부관이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각하. 언제든 맡겨만 주십시오!”

“모두에게 전해줘. 걱정해 주어 고맙다고.”

씩 웃은 카이델이 부관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고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그 순간 부관은 다짐했다.

‘돌아가자마자 일기부터 쓴다.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옮겨 적어 둬야지.’

***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고강도의 훈련을 마친 뒤, 카이델이 숙소로 돌아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에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카이델이 열 오른 뺨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따라 몸이 무거웠다.

‘좀 무리했나.’

신발과 땀에 젖은 훈련복을 훌훌 벗어 던진 카이델이 욕실로 들어섰다.

복귀가 늦어진 탓에 목욕물이 식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온몸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카이델은 욕조에 들어가 몸을 뉘었다. 미지근한 물에 몸을 담그자 긴장이 풀리며 아득한 감각이 밀려왔다. 그가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처음에 내려올 때는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가 지방 요새로 내려갈 것을 명령했을 때, 부끄럽지만 조금은 다행이라 여겼다. 엘레노어와 마주 앉아 나누어야 했을 어색한 대화를 유예할 수 있을 테니까.

정신없이 긴장하며 움직이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만큼 고된 하루를 보내면, 엘레노어를 향한 감정도 조금은 정리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지.’

카이델이 서늘하게 웃으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하지만 아무리 바쁜 하루를 보내도,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지친 몸을 이끌고 달려도 엘레노어를 잊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리움만 날로 더해졌다.

보안 문제로 외부와 거의 완벽하게 차단된 이 공간에서, 간간이 신문으로 접하는 엘레노어의 근황만이 그를 웃게 했다.

‘엘레노어 에버렛.’

카이델에게 엘레노어는 고된 훈련 끝에 마시는 물 한 잔 같았다. 지친 하루 끝의 단잠이었고, 무더위 끝의 소나기였다.

그래, 사랑이었다.

돌려받지 못한다 해도 이미 다 내어준 탓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사랑.

카이델이 욕조 모서리에 고개를 기대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엘레노어, 그대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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