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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104화 (104/168)

104화

엘레노어는 아드리안과 함께 시에나와 헤스티아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넷이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헤스티아가 밝은 얼굴로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이제 날이 제법 쌀쌀하다, 그렇죠?”

“그러게요. 금세 겨울이 올 것 같아요.”

엘레노어가 활짝 마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시에나, 선생님이랑 삼촌 오셨어. 나와서 인사해야지.”

헤스티아가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시에나가 계단을 내려와 엘레노어 쪽으로 걸어왔다.

엘레노어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에나.”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냈어?”

시에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였다면 문을 두드리자마자 달려 나와 폴짝폴짝 뛰었을 시에나였다. 엘레노어는 시에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입맛에 맞으셔야 할 텐데요.”

“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걸요.”

네 사람은 잘 차려진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아드리안과 헤스티아가 두런두런 근황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레노어는 시에나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통통했던 뺨이 약간 홀쭉해진 것 같았다. 항상 종알종알 말이 끊이지 않던 입이 꼭 다물려 있으니 어쩐지 좀 어색했다.

엘레노어가 시에나의 앞에 샐러드를 조금 덜어놓으며 말을 걸었다.

“그동안 좀 잘 쉬었어? 선생님은 한 사흘 앓아누웠었어. 장거리 여행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

“네, 잘 쉬었어요.”

“뭐 하고 지냈어?”

“음…… 그냥 낮잠도 자고, 산책 조금 하고, 할아버지 집 가고 그랬어요.”

시에나가 토마토를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시에나는 엘레노어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고 가끔은 활짝 웃기도 했지만, 전처럼 기운차지는 않았다.

“루크랑 데미는 뭐 하고 지내요?”

시에나가 처음으로 먼저 무언가를 물었다. 엘레노어는 반가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루크는 황궁에서 잘 지내. 몇 번 봤는데, 그냥 뒹굴뒹굴하면서 그렇게 지내는 것 같았어. 볼이 엄청 통통해졌더라.”

“궁금해. 보고 싶다.”

“루크도 너 많이 보고 싶은 눈치던데. 언제 만나서 신나게 노는 게 어때?”

엘레노어의 말에 시에나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친구들 얘기에 조금씩 기분이 들뜨는 것 같았다.

“데미는요?”

“데미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으려던 엘레노어가 멈칫했다. 애써 머릿속 한구석으로 몰아넣은 얼굴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엘레노어가 밝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데미는 공작령에 내려갔어. 오를리 부인과 함께 지낸대.”

“와, 부럽다.”

시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저도 공작성에서 또 놀고 싶어요. 그때 진짜 재미있었는데. 음식도 다 엄청 맛있고. 그렇죠?”

“……응, 그랬지.”

엘레노어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공작성에서의 기억은 엘레노어에게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도 조금 지나칠 정도로 강렬하게.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공작성에서 내려다본 영지의 전경이 펼쳐졌다. 말을 타고 달리며 보았던 숲, 마법처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호수, 그리고 그 모든 순간 곁에 있던 한 사람.

카이델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했다. 일에 파묻혀 있을 때는 잠시 잊을 수 있었지만, 이렇게 아주 작은 틈만 생기면 그와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일 일인가……?’

엘레노어가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도 잔걱정이 많은 편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감정에 휘둘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엘레노어?”

아드리안이 갑자기 말이 없어진 엘레노어를 불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니야. 그냥 갑자기 넋을 놓아 버렸네.”

아드리안이 픽 웃으며 핀잔했다.

“또 일 생각 했지?”

엘레노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켰네.”

“쉬엄쉬엄하라니까. 그렇게 할 일이 많아?”

“응. 확실히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 그런지 절차가 까다롭더라고. 그래도 이제 황태자궁으로 출근하는 건 곧 끝나.”

“다행이네.”

그 이후의 식사는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시에나가 기운을 찾으니 모두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식사가 끝나고, 마차가 준비되는 동안 엘레노어는 시에나와 손을 잡고 작은 정원을 거닐었다.

“오랜만에 우리 에나 보니까 너무 좋았어.”

“저도 선생님 봐서 좋았어요.”

시에나가 엘레노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장밋빛으로 물든 뺨이 사랑스러웠다.

“힘들지?”

엘레노어가 솜사탕 같은 분홍빛 머리카락을 살살 빗겨 주며 툭, 말했다. 시에나가 말없이 구두코로 흙을 톡톡 두드렸다.

“다 지나갈 거야.”

엘레노어가 그런 시에나를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좌절하기엔 아직 너무 일러. 앞으로 짜릿하게 역전할 기회가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으니까.”

엘레노어의 말에 시에나가 고개를 들었다.

“……역전이요?”

“그래, 역전.”

엘레노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에나는 엘레노어의 말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엘레노어는 그런 시에나의 머리를 가볍게 흩트려 놓았다.

“기운 내, 에나. 이제 시작이잖아.”

***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해 교육 보조교재에 대한 안이 월례 회의를 통과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대신들의 표를 움직인 것은 이즈멜의 공이 컸다.

이즈멜이 황태자로서 처음으로 추진하는 대민사업이기에 힘을 실어 주자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거기다 이즈멜의 집중 코치를 받으며 완성한 서류들의 퀄리티도 한몫했다.

반대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서류를 뒤적이던 대신들도 끝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잡을 만한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굴려지길 잘했어.’

엘레노어는 그동안 고생했던 것들이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수고했어, 엘레노어.”

“전하께서도 수고하셨어요.”

이즈멜도 기쁜지 표정이 무척 환했다. 회의에서 흘러나온 엘레노어에 대한 칭찬을 전해주는 그는, 당사자인 엘레노어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렇게 한 번에 통과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 보통 꼬장꼬장한 자들이 아니거든.”

“정말요?”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돼. 그대가 그만큼 잘했다는 거니까.”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한껏 치켜세웠다. 엘레노어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평소였으면 민망해 고개를 저었겠지만, 이번에는 좀 당당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말로 뼈와 살을 갈아 넣었으니까.

이즈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이 잘 풀린 건 좋은데, 이로써 집무실에서 그대를 보는 건 오늘로 마지막이 되겠군.”

“그러게요.”

“준비를 좀 덜 철저하게 시킬 걸 그랬나. 며칠 더 출근하게.”

“전하!”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가볍게 흘겨보았다. 이즈멜이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물론 진심이 조금 섞이기는 했지만.

“그럼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끝나고 와인이나 한잔 같이하지. 축하 겸, 송별회 겸. 어때?”

이즈멜의 제안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늘 같은 날엔 축하주가 딱이죠.”

“제일 좋은 것으로 준비해야겠군. 좋은 날이니까.”

“와!”

엘레노어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이즈멜은 보좌관들을 일찍 물리고 집무실에 간단한 주안상을 준비시켰다.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니, 집무실도 그런대로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처럼 느껴졌다.

이즈멜이 손수 코르크 마개를 열고 엘레노어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얼마나 따라 줄까?”

“가득이요. 완전 가득.”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이 작게 웃었다.

“그러다 진탕 취해.”

“요즘은 좀 취하고 싶어요.”

제 잔을 채운 이즈멜이 엘레노어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어. 마지막까지 잘 부탁할게, 엘레노어.”

“전하께서도 수고하셨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한 관문 넘어선 것을 축하하며.”

이즈멜이 잔을 내밀었다. 엘레노어가 잔을 부딪치자 기분 좋게 맑은소리가 울렸다.

좋은 술이라더니, 입에 머금는 순간부터 향이 남달랐다. 엘레노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이즈멜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래서 왜 요즘은 취하고 싶으실까? 무슨 일이 있어서.”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말없이 빙긋 웃었다. 이즈멜이 고개를 기울이며 재차 물었다.

“뺨이 좀 핼쑥해진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무리하게 일을 시켰나?”

“확실히 까다로운 상관이시기는 했죠. 이렇게 열심히 일해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즈멜이 미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천히 해도 정말 괜찮았는데.”

“알고 있어요. 그냥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예요. 오히려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더 좋았어요. 배우기도 많이 배웠고요.”

엘레노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던 이즈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는가 보지?”

“…….”

“왜냐하면 나도 그렇거든. 마음이 복잡할 때는 일로 도피해.”

그대도 나랑 비슷한 것 같아서.

이즈멜이 와인을 한 모금 넘기며 진득하게 눈을 맞췄다. 엘레노어는 그가 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고민이든 털어 놔도 돼. 우리는 친구잖아.”

“무슨 고민이든지요?”

“응, 뭐든지.”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이랑 카이델과 있었던 일을 전하께 말씀드려도 되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입 밖으로 고백하지 않았다지만, 그가 제게 약간의 관심이라도 있는 것을 아는 이상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왜. 다른 놈들이 속상하게 해?”

하지만 이즈멜은 눈치가 귀신같이 빨랐다. 엘레노어가 어물쩍 넘어가려 하자 정곡을 찔렀다.

“누가 그래. 소후작?”

“그런 거 아닌데요.”

“카이델이군.”

이즈멜이 와인 잔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이즈멜에게 단번에 속마음을 꿰뚫린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괜찮으니 말해. 그놈들이 제 살 깎아 먹었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퍽 유쾌하니까.”

“하지만…….”

“하나씩 주고받으면 되겠네. 그대의 고민 하나, 내 고민 하나.”

그가 씩 웃으며 재촉하듯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그 정도로 권하자 엘레노어도 더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요…….”

엘레노어가 델른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줄여 설명했다. 이즈멜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엘레노어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금방 풀 수 있는 오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작저에 가도 카이델은 없고, 돌아오면 주겠다는 연락도 없고요.”

엘레노어의 목소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저를 피하시는 것 같아요.”

자그마한 얼굴에 상처받은 기색이 언뜻 떠올랐다. 홀로 끙끙 앓으며 마음고생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보던 이즈멜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대는 그게 못 견디게 마음이 쓰인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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