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전하랑 협업……이요?”
“그래. 정확하게 말하면 황실과의 협업이 되겠지.”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제작과 배포, 홍보에 필요한 비용은 황실에서 전부 지원할 거야. 전 제국에 무료로 배포하는 대신 그대에게는 따로 적절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으로 하면 될 것 같은데.”
서운하지 않게 챙겨 줄게.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교재 제작은 그대가 맡고, 프로그램 운영은 황실에서 맡아 하고. 아무래도 전문적인 교사가 여럿 필요한 일이잖아.”
“맞아요. 저도 그 부분이 제일 고민이었어요.”
“이로써 간단하게 해결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어…….”
엘레노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술을 조금 벌렸다.
황실과의 협업이라니.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던 선택지였다. 갑자기 확 커져 버린 규모에 겁이 나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만한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 줄 수 있다는 것도, 그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전부 마음에 들었다.
“좋은 것 같은데…….”
“같은데?”
“그렇게 큰일을 제가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더군다나 나랏돈까지 받고 하는 일이라니까 갑자기 부담돼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이 웃음을 터뜨렸다.
“엘레노어, 그대가 생각해 낸 일이야. 그대가 아니면 누가 그런 일을 하겠어?”
“그건 그렇지만…….”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거야. 부담스러울 이유가 없는 일이라고.”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즈멜의 말이 맞았다. 이즈멜의 제안은 좋은 기회였고, 정당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마음에 딱 한 가지가 걸렸다.
“그런데요, 전하.”
“응.”
엘레노어는 어떻게 하면 최대한 완곡하게 제 뜻을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렇게 마음먹으신 게, 어떤 이유 때문인가요?”
“이유?”
“음, 그게 말이에요. 그냥 혹시나 해서요. 제안을 주신 이유가 정말 그 취지에 공감하셔서인지, 아니면…….”
“그대에게 점수를 따고 싶어서인지?”
이즈멜은 엘레노어가 빙빙 돌려 하는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가 핵심을 찌르고 들어가자 엘레노어가 얼굴을 붉혔다.
“꼭 그런 말은 아닌데요.”
“그럼?”
“그 비슷한 말이기는 해요.”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 몸이 배배 꼬였다.
한참이나 소리 내 웃던 이즈멜이 대답했다.
“제대로 생각하고 제안한 게 맞아. 그대의 말에 느낀 바가 컸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는데, 고마워.”
이즈멜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개인보다는 국가 차원으로 진행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아서 제안하게 됐어. 그렇다고 그대의 공을 뺏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야. 오해 없길 바라.”
“그런 오해는 안 해요.”
“이 일로 그대를 자주 만나게 되리라는 건 내게 기분 좋은 보너스야. 점수도 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엘레노어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즈멜과 있으면 늘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마음에 걸리는 건 없는 거지?”
“네, 좋아요.”
“더 요청할 것은?”
없다고 하려던 엘레노어가 멈칫했다. 약간 더 욕심을 내고 싶어졌다.
“내용을 편집하고 배치하는 건 리안의 도움을 받게 될 것 같아요. 리안이 그런 쪽의 감각은 저보다 훨씬 뛰어나거든요.”
“소후작?”
이즈멜이 못마땅한지 한쪽 눈썹을 슥 추켜올렸다. 엘레노어가 얼른 덧붙였다.
“네. 학습지 만들 때도 브로든 상단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엘레노어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지.”
엘레노어가 눈을 반짝이며 테이블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전하. 나중에 찍어낼 때, 브로든 상단의 로고도 함께 찍혔으면 좋겠어요. 아, 제 이름은 빼셔도 괜찮아요!”
“그대 이름을 빼기는 왜 빼.”
이즈멜이 픽 웃으며 몸 앞으로 팔짱을 꼈다.
“그런데 로고는 왜?”
“일종의 광고죠.”
“흠, 일을 약간 돕는 대신 광고를 넣게 해달라…….”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말을 듣고 고민에 잠겼다.
양손으로 뺨을 감싼 엘레노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크고 동그란 눈이 사르르 접히며 반달처럼 휘어졌다.
“해 주실 거죠?”
엘레노어를 빤히 보던 이즈멜이 결국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웃지 마.”
“왜요?”
“……뭐든 다 알겠다고 하게 될 것 같으니까.”
이즈멜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엘레노어가 소리 내 웃었다. 기분 좋게 통통 튀는 웃음소리가 맑게 울렸다.
이즈멜이 엘레노어의 앞으로 디저트 접시를 하나하나 밀어놓으며 말했다.
“웃지 말고 먹기나 해.”
“저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데요?”
“많이 먹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만큼 열심히 일해야 할 테니.”
이즈멜이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꽤 까다로운 상관이라서.”
***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한동안은 황태자 전하랑 같이 일할 것 같아. 신기하지?”
오랜만에 아드리안을 만난 엘레노어가 이즈멜과 나누었던 대화를 전해 주었다.
아드리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델른에서 돌아온 것이 겨우 열흘 전이다. 그 열흘 사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것도 놀라운데, 그 규모도 보통이 아니다. 황실과 전국적으로 진행하는 문맹 퇴치 사업이라니.
‘언제는 평생 백수로 놀고먹을 거라더니…….’
아드리안의 반응이 미묘해 보이자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네 일이기도 한데 미리 못 물어본 건 미안. 그런데 정말 네가 신경 쓸 일은 별로 없을 거야! 바쁘면 읽어 보고 의견만 줘도 돼.”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미안하기는. 그냥 좀 놀라서 그랬던 거야.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으니까.”
“전부터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어. 공작령에 다녀온 이후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고.”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잔뜩 남은 눈치라, 엘레노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그걸 바꿔 놓아야겠다고는 생각한 적 없었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
“응,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더라고. 거창한 사회 운동이라 생각하면 어렵지만, 누굴 가르치는 건 내가 평생 해 온 일이잖아.”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평생? 에나랑 루크, 데미가 유일하지 않았나?’
엘레노어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전하께서도 취지에 공감하셔서 최대한 지원해 주기로 하셨어. 상단에 폐를 끼쳤던 것도 있고…… 조금이나마 갚을 기회라고 생각했어.”
“폐라니, 엘렌. 네가 언제 폐를 끼쳤다고.”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트 공작가 사건 때 말이야.”
“그건 잘 해결되었잖아. 덕분에 전보다도 훨씬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고.”
“그거야 너랑 후작님이 애쓰셔서 그렇지.”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젠트 공작가 사건을 일단락한 것은 발렌타인 공작이었다.
공작은 상단에는 좀처럼 투자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변동성이 크고, 자칫 투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중하기로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가 평소의 기조를 꺾은 것은, 그답지 않게 퍽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엘레노어가 속상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젠트 공작가 일을 해결한 것도 따지고 보면 엘레노어가 맞는 셈이다.
‘공작이 비밀로 하라 했으니…….’
잠시 묘한 표정을 지은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얼마 전에 들은 가십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이젠트 공작가는 요즘 이상하게 조용하더라. 언뜻 듣기로 공작이 내내 울상을 짓고 다닌다던데. 사업에 손만 대면 망한다나…….”
“그래?”
이번에는 엘레노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클로에가 아나이스에게 잘 전달한 모양이네. 아나이스는 그 미끼를 제대로 물었고.’
그 내막에 엘레노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드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고소한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세히 듣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제법 크게 잃은 모양이야. 아끼던 별장들을 처분하고 있다더군.”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재산을 처분해야 할 정도로 어려워졌다고? 그래도 제국에 셋뿐인 공작가 중 하나인데.”
“공작가라고는 해도, 이젠트 공작가는 발렌타인 공작가와는 결이 좀 달라. 발렌타인 공작가야 제국이 망하지 않는 한 존속하겠지만, 이젠트 공작가는 전통이 길지 않아. 뿌리가 깊지 않으니 흔들리기도 쉽지.”
아드리안이 서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더군. 전부터 이젠트 공작의 한탕주의는 유명했거든.”
“그렇구나.”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적어도 한 방 먹은 만큼은 돌려준 것 같아 속이 좀 시원해졌다.
‘한 방 맞고, 또 한 방 돌려주었으니 제발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다.’
엘레노어는 속으로 두 손을 꼭 모았다.
아드리안의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를 보자 문득 시에나가 떠올랐다. 엘레노어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시에나는 어때? 좀 잘 지내고 있어?”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울적해하는데, 어머니랑 형수님이 신경을 많이 쓰고 계셔.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렇구나……. 언제 한번 보러 가겠다고 전해줘. 그때까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있어야 한다고.”
“그래. 그럴게.”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너도 그래야 하는 거 알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엘레노어가 피식 웃으며 아드리안의 말을 받아쳤다.
“당연하지. 내가 앤가?”
“네가 무리하는 걸 한두 번 봤어야지.”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머리에 꿀밤을 놓는 시늉을 했다.
“또 황태자 전하께서 괜한 말을 하시거든 적당히 예의 바르게 무시하고.”
“뭐?”
예상하지 못한 말에 엘레노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드리안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투정을 부렸다.
“신경 쓰여. 질투도 나고, 부럽기도 하고.”
“그냥 일이잖아.”
“나도 일 핑계로 네 주변을 많이 얼쩡거려 봐서 그쪽으로는 좀 잘 알거든.”
아드리안의 너스레에 엘레노어가 픽 웃었다.
“그러니까 작업하다가도 종종 생각해 줘. 내가 엄청 신경 쓰고 있다는 거.”
아드리안의 눈이 초승달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나 엄청 유치한 사람이거든.”
***
“엘레노어, 회의실로.”
“네…….”
회의, 회의, 또 회의.
잔소리, 잔소리, 또 잔소리.
엘레노어는 제가 다시 21세기 한국으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굳이 다른 것을 찾는다면, 화가 났다가도 풀릴 정도로 번쩍거리는 상사의 얼굴, 그리고 세게 문지르면 금가루가 떨어질 것 같은 근무 환경 정도랄까.
까다로운 상관이라던 이즈멜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일에 있어서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드와이트가 왜 맨날 야근했는지 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