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집으로 돌아간 엘레노어는 조나단의 연락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하지만 일주일이 되도록 발렌타인 공작가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엘레노어는 종일 침대에 누워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에게는 미뤄둔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해 놓았지만, 엘레노어의 뇌만큼은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오늘도 아무 연락이 없는 건가?’
엘레노어의 눈썹 끝이 시무룩하게 처졌다. 속이 바짝바짝 탔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슬며시 걱정되다가도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연락 한 통 없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일이 바쁘면 바쁘다는 말이라도 해 줄 수 있잖아.’
이젠 안 기다려.
엘레노어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변했다. 속상했다가, 걱정되었다가, 슬쩍 화가 났다가 또 미안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카이델의 얼굴이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따끔거렸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떨쳐 지지 않았다.
“엘레노어 아가씨, 편지 왔어요.”
그러던 차, 에밀리가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온종일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엘레노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편지? 발렌타인 공작가에서 온 거야?”
엘레노어의 물음에 에밀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황실에서요.”
“아…….”
“책상 위에 올려둘까요?”
“아냐. 지금 볼래. 이리 줘.”
엘레노어가 손을 뻗었다. 봉투 위의 작은 서명을 발견한 엘레노어의 입꼬리가 슬쩍 솟았다.
이즈멜이 보낸 것이었다.
「엘레노어에게.
아이들 시험도 끝났겠다, 이제는 내게 내어줄 짬이 생겼을 것 같아서 편지해 봐.
일주일이면 차 한잔하기에 충분한 휴식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데, 그대의 의견은 어떤지 궁금해.
설마 일주일도 쉬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일 좀 하라고 다그쳐 본 적은 많아도, 일하지 말라고 애원해 본 적은 없는데……. 그대는 참 신기해.
귀족들이 전부 그대의 절반만큼만 성실하다면 고민이 없겠어.
바람이 제법 차니 창문을 잘 닫도록 해.
답장 기다릴게.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추신. 다 쓰고 나니 기억이 났어. 그대의 오라버니에게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더군. 일 좀 쉬엄쉬엄하라고 말이야. 원래 쌍둥이는 그런 것까지 닮는 건가?」
***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황태자 전하께
짬을 내어 전하께 보낼 답장을 씁니다.
걱정하신 것과는 달리 일주일 동안 저는 정말 푹 쉬었답니다.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종일 빈둥거렸어요.
전하께서도 게으름과는 거리가 머신 분이지요? 너무 오래 누워 있으면 오히려 더 피곤하다는 거 아시나요?
정말 그렇답니다. 살면서 이렇게 오래 자 본 적이 없는데, 개운하기보다 오히려 몸이 더 찌뿌둥한 느낌이에요.
이제 슬슬 일어나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척추가 녹아 없어지기 전에요. 긴 휴식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는 모양입니다.
사실 아카데미 시험이 끝나면 꼭 해야지, 생각해 둔 사업이 있었어요. 당분간은 그 일을 준비하는 데 시간과 정성을 쏟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전하와 여유롭게 차 한잔 할 시간이 생길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요.
전하께서도 서늘한 날씨, 건강 유의하세요.
엘레노어 에버렛 드림.」
***
「엘레노어에게.
새삼스럽게 내 이름이 참 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이제는 그냥 이즈멜이라고 불러 줄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대에게 거절당하는 일이 이제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했어. 별로 좋지 않은 현상이야.
약간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정말 궁금해지는군.
대체 얼마나 대단한 핑계인지 꼭 알고 싶어.
오해하지 마. 화가 난 건 아니니까. 약간의 서운함을 담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읽어 주길 바라.
일에 대해 더 듣고 싶은 것도 진심이야. 그대의 아이디어는 늘 나를 놀라게 하지.
이번에도 나를 놀라게 해 봐, 엘레노어 에버렛.
긴 휴식에는 마찬가지로 재능이 없는,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이즈멜 (후략) 황태자 전하께
전하를 놀라게 할 자신은 없지만, 일 이야기는 해드릴게요. 이번 일은 전하께서도 분명 관심 있어 하실 것 같거든요.
사업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이번 일에 수익은 크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냥 꼭 해 보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에 가까워요.
그러니 전하, 저랑 차 한잔하시겠어요? 편지로 하기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요.
글로 쓰기 귀찮아서 하는 제안 같으신가요? 정답입니다.
제가 전하의 제안을 많이 거절했던 것, 인정해요. 이번엔 전하께서 거절하실 기회라는 점 짚어드리며 편지 마칩니다.
엘레노어 에버렛 드림.」
***
「엘렌(후략)에게.
거절하지.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엘레노어에게.
장난이야. 내가 그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그대가 편한 날짜를 보내줘. 장소는 카페 아미키디아가 좋겠지.
그대를 거절할 도리가 없는,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
“그래, 언제까지 기운 빠져 있을 수는 없지.”
이즈멜의 편지는 엘레노어가 다시 기운을 차리는 계기가 되었다. 싱숭생숭할 때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특효약이었다.
엘레노어는 익숙하게 카페 아미키디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즈멜은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다.
그는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엘레노어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전하.”
이즈멜이 놀란 얼굴로 엘레노어를 올려다보았다.
“아, 엘레노어.”
“일찍 오셨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이즈멜이 엘레노어의 의자를 빼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아쉬운 쪽이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이잖아.”
이즈멜을 빤히 보던 엘레노어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그의 미모는 언제나처럼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분위기가 조금 차분해 보였다.
“피곤해 보이세요. 좀 야위신 것도 같고…….”
“요즘 통 잠을 못 자기는 했지.”
이즈멜의 대답에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쉬셔야죠. 이런 약속은 얼마든지 미뤄도 괜찮은 거잖아요.”
“글쎄. 나한테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없는데.”
이즈멜이 능글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난 오늘 쉬러 온 거야. 일 생각 없이 그냥 편안해지려고.”
“저는 일 얘기 하러 온 건데요.”
“나는 그대 보러 온 거거든.”
이즈멜이 씩 웃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해 보고 싶으셨나?”
잠시 말을 고르던 엘레노어가 입을 뗐다.
“전하, 벨리움의 문맹률이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이즈멜이 곧바로 대답했다.
“절반이 못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
“맞아요. 그럼 귀족들과 상인들을 제외한 평민들의 문맹률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시나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평민 열 명 중에 대여섯 명은 긴 문장을 제대로 읽지 못해요. 그리고 열 명 중 여덟 명은 글을 쓰지 못하죠.”
“흐음.”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기 때문에 당연하게 느껴지실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꼭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아주 중요한 문제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은 말없이 등을 의자에 기댔다. 장난스러웠던 눈빛이 진지해져 있었다.
순식간에 달라진 이즈멜의 분위기에 엘레노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저도 모두가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글을 아는 건 실질적으로 삶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그건 나도 알아. 황실에서도 지역마다 학교를 세워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고…….”
“하지만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정말 극소수지요.”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사실이야. 모두에게 교재를 배급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니까.”
“책 한 권을 제대로 엮어내는 데는 제법 큰 비용이 드니까요. 그렇죠?”
“그렇지.”
“하지만 황실 신문은 전국 방방곡곡에 흩뿌려지고 있어요. 타블로이드지도 그렇고요.”
“그야 신문은 책과 달리…….”
이즈멜이 말을 멈췄다. 엘레노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한 것이었다.
“그래. 교재가 꼭 책의 형태를 갖출 필요는 없겠군.”
“제 생각도 그래요. 학습지도 책보다는 무척 간소하게 만들어졌지만, 그냥 신문처럼 찍어낸다면 비용을 훨씬 절약할 수 있을 거예요. 품도 덜 들고요.”
엘레노어는 이즈멜에게 제가 지금껏 생각해왔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이즈멜은 집중해서 그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가늠해 보는 듯, 이즈멜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두 사람의 찻잔은 어느덧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제 주변에도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요.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더라고요.”
하녀들과 클라리스의 얼굴이 차례차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엘레노어는 당차게 제 생각을 밝혔다.
“모두에게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삶이 바빠 짬을 낼 수 없고, 그깟 글 좀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겠죠. 하지만 그들에게도 선택지는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택지라…….”
이즈멜은 확신을 가지고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동자를 빤히 마주 보았다. 늘 느끼지만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면서도 관심받는 일은 부끄러워하고, 마냥 순한 것 같으면서도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다. 야무진데 허술하고, 다정한데 가끔은 서운할 만큼 무심하다.
짝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모양이다. 혼자 마음을 졸이고, 혼자 애를 태우고, 혼자 섭섭했다가 또 속절없이 빠져들고 만다. 꼭 지금처럼.
“전하?”
반응 없는 이즈멜을 보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이즈멜이 엘레노어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아…… 일은 좀 진행되고 있나?”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그냥 기획 단계에 있어요. 주변 하녀들이나 인쇄소 사람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교재를 만들 생각이에요.”
“교재를 다 만들고 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직은 뚜렷하게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어요. 학습지랑 소책자로 나름대로 벌어둔 게 있으니까…… 어쩌면 제 돈을 좀 투자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이즈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제안 하나 하지.”
“제안이요?”
“그래, 제안. 수락해 주었으면 좋겠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즈멜의 얼굴이 퍽 진지해서 괜히 긴장이 되었다.
“엘레노어. 이번에는 나와 협업해 보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