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지금 나를 사기꾼이라 의심하는 거요?”
남자가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문을 휙 열어젖혔다.
“들어오시오. 난 거리낄 게 없소.”
엘레노어가 아드리안과 눈을 맞췄다. 두 사람은 낡은 통나무집으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남자가 퉁명스럽게 식탁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앉아계시오. 재고가 있는지 보고 올 테니.”
그가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쿵쿵대며 들어갔다. 그는 정말로 억울한 표정이었다.
잠시 기다리자 남자가 하얀 약 봉투 몇 개를 가지고 나왔다. 그가 식탁 위에 그것들을 뿌리듯 내려놓았다.
“이게 내가 가진 재고 전부요. 어제까지 판 것과 똑같은 것이지.”
엘레노어가 봉투를 열었다. 동그랗고 작은 약 한 알이 들어 있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 본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익숙한 냄새였다.
엘레노어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먹어 봐도 되나요?”
“마음대로.”
남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드리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만류했다.
“엘렌.”
엘레노어가 용감하게 그것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어쩐지 익숙한 맛에 엘레노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이 맛을 아는데. 뭔가 익숙하단 말이야.’
남자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동방에서 들여온 재료로 만든 귀한 약이오. 싸구려도 아니고, 사기도 아니지.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켜 준다오.”
엘레노어는 그제야 이 익숙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수상하기 짝이 없는 약은 전생의 청심환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엘레노어가 봉투 뒷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성분표를 꼼꼼히 읽어 나갔다. 모르는 이름들도 많았지만, 그다지 문제 될 것 없는 재료들이 대부분이었다.
-부작용: 본 약이 체질에 맞지 않을 경우 구토와 복통, 설사를 동반할 수 있음.
봉투 끝부분에 작게 적혀 있는 부작용을 읽어 본 엘레노어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클리어하트는 이상한 약도 아니었고, 부작용도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남자가 빈 의자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온 거요?”
“이 약을 먹고 제 학생 하나가 복통 때문에 시험을 망쳤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엘레노어가 말끝을 흐렸다. 남자가 가슴께를 팡팡 두드리며 힘주어 말했다.
“내가 이 장사를 10년을 넘게 해 왔소. 델른 아카데미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이라면 대개 내로라하는 귀족 가문 자제들일 텐데, 내가 미쳤다고 높은 분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겠소?”
엘레노어가 꾸벅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해요…….”
“그 학생에겐 맞지 않았던 모양이야. 안타깝지만 나로서는 억울한 일이오.”
남자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 그리 화난 눈치는 아니었다.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일이 종종 있나요?”
“있지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오. 10년 동안 겨우 서너 번 본 경우지.”
남자가 엘레노어를 향해 동정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 학생은 그냥 운이 지지리도 없었던 거요. 유감이군.”
***
“에나.”
시에나와 헤스티아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시에나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초콜릿 음료가 놓였다.
“시에나, 엄마 좀 봐.”
헤스티아의 말에도 시에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멍청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동안 노력했던 것들을 그렇게 허무하게 날릴 수 있냐는 말이다.
시에나는 고개를 푹 떨군 채 퉁퉁 부은 눈을 비비적거렸다.
헤스티아는 그런 어린 딸을 보며 깊은 한숨을 삼켰다. 시에나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알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헤스티아가 손을 뻗어 시에나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에나, 괜찮아.”
“안 괜찮아요.”
시에나가 울먹거리며 대답했다.
“이런 건 하나도 안 괜찮은 거예요…….”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탁자 위에 툭툭 떨어졌다.
헤스티아는 성큼성큼 다가가 시에나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러자 시에나가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고 목덜미에 젖은 얼굴을 파묻었다.
헤스티아가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시에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우리 딸, 많이 속상한 거 알아. 열심히 준비했는데, 준비한 만큼 다 보여 주지 못했으니까.”
한참이나 눈물 콧물을 훌쩍이던 시에나가 물었다.
“엄마는, 흐끅, 안 속상해요?”
“엄마도 속상하지. 우리 딸이 속상해하는데.”
“혼 안 내요?”
“응, 혼 안 내.”
헤스티아를 끌어안은 시에나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아빠가 없어도 밝고 똑똑하게 잘 컸다고, 엄마가 어깨를 쭉 펼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시에나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백했다.
“1등 해서 엄마가 자랑하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해.”
시에나의 등을 토닥이던 헤스티아의 손이 멈칫했다. 헤스티아는 몸을 약간 물리고 남편을 빼닮은 금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 짠한 아이였다. 조금 더 응석을 부려도 괜찮을 나이인데, 시에나는 언제나 의젓했다. 헤스티아는 그것이 늘 고맙고 또 미안했다.
“너는 항상 엄마의 자랑이야.”
헤스티아가 시에나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눈을 맞췄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그렇지 않은 적 없었어.”
“…….”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란다. 네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선택을 하든, 그래서 어떤 삶을 살게 되든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시에나가 속상한 얼굴로 입을 열자, 헤스티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엄마한테 중요한 건 하나야. 우리 아가가 행복한 것. 다른 건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단다. 네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엄마는 늘 너를 사랑할 테니까.”
발갛게 달아오른 시에나의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불안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헤스티아가 그런 시에나의 이마에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고생했어, 아가.”
***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보며 물었다.
“이제 시험도 끝났는데, 데미는 뭐 하고 지낼 거야?”
“으음,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거 없었어?”
엘레노어의 질문에 데미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은요. 시험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왜?”
“선생님이랑 친구들이랑 공부하는 게 좋아서요.”
데미안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집에 가는 것도 좋고, 황궁에 놀러 가는 것도 좋고……. 루크랑 에나랑 같이 공작성에서 논 것도 재밌었어요.”
“그래?”
“그리고 형이 맨날 데려다주는 것도 좋았어요.”
불쑥 튀어나온 카이델 이야기에 엘레노어의 어깨가 움찔했다. 순간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를 떠올린 엘레노어가 두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오늘은 대화할 수 있겠지. 몇 시간을 기다려서라도 만날 거야.’
그를 만나면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엘레노어의 입안이 바짝 말라갔다.
잠시 후, 익숙한 공작저의 돌담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차가 천천히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긴장해서일까. 공작저는 평소보다 유독 조용하고 한산하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기사님들도 안 보이네. 보통 두세 명은 꼭 저택 주변을 지키고 있었는데.’
마차 문이 열리고, 집사 조나단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도련님. 아, 에버렛 영애도 함께 오셨군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조나단.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바쁘지만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돌아가시기 전에 안에서 차라도 한잔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엘레노어가 저택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보다…… 혹시 지금 카이델이 저택에 있나요?”
특별할 것 없는 그 질문에 조나단은 어째서인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님께서는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엘레노어가 재빨리 덧붙여 물었다.
“잠시 기다리면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조나단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그것도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지금 어디에 계신지라도…….”
“죄송합니다.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일 때문에 출타 중이시고, 언제 돌아오실지는 저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한다. 답을 드릴 수 없다.
엘레노어가 끈질기게 물었지만, 조나단에게서 그 이상의 대답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오늘은 그와 오해를 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안 될 모양이었다.
“데미를 오래 혼자 둘 분은 아니시잖아요. 일이 주 안에는 오시지 않을까요?”
조나단이 고개를 슬쩍 갸웃했다. 평소의 엘레노어라면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왜인지 필사적이었다.
“그보다는 더 걸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도련님은 한동안 공작령으로 내려가 클라리스 오를리 부인과 함께 지낼 겁니다.”
엘레노어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조나단이 안쓰러운 마음에 힘주어 덧붙였다.
“각하께서 단단히 당부하신 일이라 많은 이야기를 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무도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겠다고 단단히 못을 박으신 터라……. 하지만 돌아오시는 즉시 영애께 가장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카이델이 당부했다고요?”
하지만 조나단의 말은 엘레노어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만나지 않겠다. 찾지 말아라.
카이델이 당부했다는 말이 엘레노어의 가슴에 화살처럼 꽂혔다. 어쩐지 그 말이 그녀를 향한 전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한층 창백해졌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잠시 앉아서 쉬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저는 그냥 가 보는 게 좋겠어요. 조금 피곤해서, 실례가 안 된다면 집에 돌아가 쉬고 싶네요.”
“아, 물론입니다.”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보며 밝게 웃었다. 언제나처럼 데미안을 꼭 끌어 안아 준 엘레노어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데미, 고생 많았어. 푹 쉬고 공작성에서 재미있는 시간 보내. 클라리스에게 안부 전해주고.”
“편지할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선생님도 답장할게.”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데미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요, 조나단.”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영애.”
엘레노어는 조나단에게도 눈인사를 건넨 뒤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마차가 서서히 공작저를 빠져나가자 엘레노어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엘레노어는 내내 생각했다.
별일 아니다. 그는 원래부터가 찾아간다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잠시 만나기 위해 몇 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까지가 이상했던 거지, 사실 이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기분이 왜 이러지.’
엘레노어가 가슴께를 주먹으로 꾹 눌렀다.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