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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99화 (99/168)

99화

카이델은 비오는 거리로 나섰다.

목적지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잠시라도 멈추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를 휩쓸었다. 카이델은 그것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라 그저 꾹꾹 눌러 참았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존재에서 위로를 느낀 것.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던 것.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진 것.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한 것.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부딪쳐 본 것.

카이델은 눈부시게 반짝이는 모든 처음을 엘레노어에게서 선물 받았다.

그리고 이 순간 카이델의 손 위에는, 실연이라는 아픈 처음이 놓여 있었다.

‘받아들여야 한다.’

엘레노어의 결정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엘레노어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뿐이었다.

죽을 만큼 힘들더라도. 두 사람을 볼 때마다 가슴이 까맣게 타 재가 되더라도.

‘그럼, 엘레노어를 사랑하는 일도 이제 멈추는 것이 맞는 것인가?’

카이델은 자문했다. 갈 곳 잃은 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그것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멈추어야 한다면, 어떻게 멈출 것인가?’

그때 카이델의 눈에 익숙한 건물이 들어왔다. 그가 묵는 여관이었다. 한참을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카이델이 허름한 건물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마음이 늘 엘레노어 앞에서 멈춰 서듯이.

그때였다. 누군가 카이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돌아선 카이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드와이트 에버렛?”

우산을 쓴 드와이트가 그곳에 서 있었다.

***

“아르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전개되는 속도가 제법 빠릅니다.”

드와이트는 카이델에게 이즈멜의 서신을 전달했다.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 내린 카이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카이델은 아득하게 밀려오는 피로감에 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아르센이라……. 확실한 정보인가?”

마른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아낸 카이델이 새 셔츠를 걸치며 물었다. 드와이트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센 제국을 중심으로 주변 왕국과 공국들이 뭉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뫼젠의 배와 아르센의 배가 바다에서 교전을 벌인 일도 있었답니다.”

“아르센의 황제만큼 셈이 밝은 이도 없지. 뫼젠의 교역항이 몹시도 부러웠을 거다.”

카이델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제 정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카이델은 묵직할 만큼 흠뻑 젖은 옷가지들을 갈아입었다.

드와이트는 그런 카이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왜 이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는 거지?’

카이델은 내내 드와이트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간간이 몸을 돌릴 때도 벽이나 바닥을 응시했다.

카이델은 숙소 앞에서 드와이트를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는 빗줄기가 거센 탓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었다.

“……전하께서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나누자 하셨습니다.”

카이델이 바닥에 떨어진 젖은 옷가지들을 주워 들며 물었다.

“내일 바로 황궁으로 복귀하라는 명이신가?”

“아닙니다, 각하.”

드와이트가 카이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즉시 귀국을 명하셨습니다.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멈칫.

카이델의 몸이 굳었다.

아직 아이들의 입학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 돌아간다면 시험을 끝낸 데미안을 안아 줄 수 없다. 델른까지 먼 길을 온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엘레노어도 마음에 걸렸다. 이런 마음으로 떠난다면, 그것은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꼴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하지만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에게는 발렌타인 공작으로서의 책임이 있었고, 황실에 대한 충심이 있었다.

카이델은 어지러운 마음을 바로 하고 곧장 옆방으로 향했다. 아드리안에게 데미안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아드리안의 방 앞에 선 카이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다른 사람의 몸에 갇힌 것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후.”

짧게 숨을 내뱉은 카이델이 문을 두드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금세 문이 열렸다.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의 아드리안이 방에서 나왔다. 다행히 방에는 아드리안 혼자뿐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곧바로 귀국해야 할 일이 생겼어. 내일 데미안을 좀 대신 챙겨 줄 수 있겠나?”

카이델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기에…….”

“자세한 것은 밝힐 수 없어. 벨리움에서 보지.”

카이델이 아드리안의 말을 끊으며 대화를 끝냈다. 카이델은 그 길로 곧장 가방을 챙겨 여관을 벗어났다.

“가시지요.”

기다리고 있던 드와이트가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카이델이 망설임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델른 시내를 벗어난 마차는 텅 빈 들을 가로질러 빠르게 달렸다. 카이델은 비 내리는 황무지를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드와이트는 그런 카이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엘렌에게 말 한마디 못 하고 내려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시는 건가?’

드와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렌에게는 제가 적당히 사정을 설명하겠습니다. 분명 이해할 겁니다.”

“그럴 필요 없어.”

내내 닫혀 있던 카이델의 입술이 툭 열렸다. 목소리가 푹 잠겨 바닥까지 가라앉아 있었다.

“그냥, 아무 말도 전하지 말아 줬으면 해. 오늘 일에 대해서는.”

카이델의 시선이 처음으로 드와이트에게 닿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카이델의 얼굴이 눈에 띄게 허물어졌다. 그가 약간 일그러진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드와이트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늘 단정하고 빈틈없던 공작이었다. 그를 나름대로 오래 지켜보았지만, 저토록 무너져 내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고맙군.”

그것이 두 사람이 마차 안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

“아…… 그래?”

카이델이 벨리움으로 돌아갔다는 말에 엘레노어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누군가가 뒤통수를 세게 내리친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아드리안이 말했다.

“나한테 데미안을 부탁하고 가셨어.”

“다른 말은 없으셨어?”

아드리안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국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말밖에 들은 게 없어.”

“아…….”

“별일 아닐 거야, 엘렌. 너무 신경 쓸 것 없어.”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나온다!”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아카데미 정문 쪽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하나둘 시험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발꿈치를 들고 서서 아이들을 찾으려 고개를 기웃거렸다.

“저기 온다.”

그때 옆에서 아드리안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루카스와 데미안, 시에나가 나란히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 아이를 보자 안도감이 훅 밀려왔다. 아이들을 눈으로 좇던 엘레노어의 코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에나, 여기야!”

헤스티아가 큰 소리로 시에나를 부르며 팔을 휘저었다. 루카스가 그런 헤스티아를 발견하고 시에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엄마를 본 시에나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두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선생님!”

아이들이 세 사람을 향해 힘껏 달려왔다. 엘레노어가 힘차게 안겨 오는 루카스를 마주 끌어안았다.

“잘했어, 루크. 너무 고생 많았어.”

루카스가 엘레노어의 어깨에 말랑한 뺨을 비비며 칭얼거렸다.

“배고파요…….”

“응. 얼른 점심 먹으러 가자.”

루카스를 한 번 더 꽉 안아 준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데미안이 배시시 웃으며 엘레노어에게 안겨 왔다.

“데미도 고생했어.”

데미안을 힘껏 안아 준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은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내려갔어. 꼭 같이 오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대.”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해?”

엘레노어가 묻자 데미안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씩씩하다, 우리 데미. 선생님이 공작저까지 잘 데려다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점심 맛있게 먹고 출발하자.”

데미안과 루카스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시험이 끝났다는 것이 그저 후련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시에나였다.

펑펑 우는 시에나를 안고 토닥이던 헤스티아가 조심스럽게 엘레노어를 불렀다.

“엘레노어. 잠깐만 와 줄래요?”

엘레노어가 곧장 시에나에게 다가갔다. 엘레노어의 얼굴을 보자 시에나의 눈물이 거세어졌다.

엘레노어가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선생님, 시험을 망쳤어요……. 죄송해요.”

시에나의 말에 엘레노어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에나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준비했는지 알기에 더 속상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운’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함께 작용하는 법이었다. 시험에서 준비한 만큼의 역량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했다.

엘레노어가 애써 담담한 척 시에나의 뺨을 살살 닦아냈다.

“그럴 수 있어, 시에나. 괜찮아.”

“하지만…… 역사 시험지는 거의 보지도 못했어요.”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과목을 아예 보지도 못했다는 건 꽤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른 과목이 많이 어려웠니?”

엘레노어가 묻자 시에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배가, 흐끅, 배가 너무 아팠어요. 배가 너무 아파서…….”

“배가?”

엘레노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잠시 울먹이던 시에나가 엘레노어에게 숨겨 왔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날 아침에 사실…….”

***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은 수소문 끝에 시에나에게 ‘클리어하트’를 팔았던 상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에나한테 엉터리 약으로 사기 친 거라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엘레노어는 단단히 뿔이 나 있었다. 성큼성큼 앞장선 엘레노어가 문을 쿵쿵 두드렸다.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누구시오?”

엘레노어가 물었다.

“여기가 메디슨 씨 댁인가요?”

“맞소만.”

“잠시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요.”

삐걱.

투박한 인상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을 보는 시선에 의심이 가득했다.

“댁들은 뉘시오?”

“아카데미 입학시험이 있던 날, 수험생들에게 클리어하트를 판매하신 분이죠?”

“그렇소.”

남자가 팔짱을 단단히 끼고 엘레노어를 내려다보았다. 엘레노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당돌하게 요구했다.

“그 약을 저희가 좀 보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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