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시에나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배 속의 사정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외국어 영역 시험지를 펼쳤을 때부터 시에나의 시야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등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솟았다.
‘집중해야 해, 시에나.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시에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펜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늘을 위해 정말 열심히 준비해왔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혼자만 고생한 것도 아니다. 선생님도 삼촌도 엄마도 이 순간을 위해 열심히 힘을 보탰다.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지문을 읽어도, 그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분명히 선생님이 콕 짚어 줬던 기억이 나는데,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얬다.
‘아, 진짜 어떡하지. 못 참겠는데.’
마지막, 역사 시험지를 붙잡은 시에나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는 한계였다.
시험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럽고 억울했다.
시에나가 가늘게 몸을 떨며 울음을 터뜨리자, 감독관이 다가왔다.
“괜찮아요, 학생?”
시에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감독관이 시에나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냉랭하던 목소리에 측은함이 섞였다.
“몸이 좋지 않은 거면 나가서 양호실에 가 보세요. 시험은 내년에 다시 치를 수 있으니…….”
내년이라니. 1년이나 뒤처지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하지만 서서히 인내의 한계가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잠시 갈등하던 시에나는 남은 문제들을 전부 한 번호로 밀어버렸다.
시에나가 손을 들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나가 볼게요.”
“지금 제출하면 수정은 불가능합니다. 동의하나요?”
“……네.”
“양호실 가서 약 먹고, 면접까지 누워서 편안하게 쉬어요.”
시에나의 턱에 맺힌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때 교실 반대편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루카스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그 순간 시에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루카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시에나가 벌떡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화장실로 들어선 시에나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한심해! 한심하다고!”
시에나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비난을 퍼부었다.
속을 전부 비워냈는데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게 다 아침에 먹은 그 약 때문이야. 한심한 약!”
시에나는 멍청했던 제 행동을 끊임없이 자책했다.
선생님이 말한 대로 스스로를 좀 더 믿었어야 했다. 긴장까지도 시험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엘레노어는 몇 번이나 당부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에나는 시험을 완전히 망쳐 버렸다. 한 과목을 완전히 망쳤으니 불합격일 것이 뻔했다.
시에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에서 빠져나갔다. 계단에 주저앉은 시에나는 몸을 웅크려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다 끝났어. 모두 실망할 거야.’
세상이 전부 끝나 버린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얼굴을 떠올리자 겨우 그친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시에나는 한 번도 아빠를 본 적이 없었다. 시에나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아빠는 마차 사고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우리 예쁜 에나. 아빠도 같이 왔으면 좋을 텐데.”
“괜찮아요. 엄마도 있고 삼촌이랑 선생님도 있는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시에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빠가 아주 그립지는 않았다.
아빠는 일찍 떠났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과 엄마가 있었으니까. 시에나는 누구보다 많이 사랑받으며 컸고, 그것에 늘 감사했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아빠의 빈자리를 보며 울적해했다. 시에나는 늦은 밤, 엄마가 혼자 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내가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줘야 해. 누구보다 더 자랑스러운 딸이 될 거야.’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엄마의 자랑이 될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더 이 악물고 공부했던 것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화려하게 망쳐 버리다니.
그때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조금씩 주변이 소란해졌다.
시에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곧 학생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에나!”
그때 뒤에서 시에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였다.
시에나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루카스와 데미안을 보고 싶은지, 보고 싶지 않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시에나가 고민하는 사이 루카스가 시에나의 팔을 붙잡았다.
“너 괜찮아?”
아무래도 그냥 도망치는 쪽이 나았던 것 같다.
루카스의 자줏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시에나의 안에 뜨거운 기운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때 데미안이 시에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시에나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집에 가고 싶어…….”
시에나가 울기 시작하자, 루카스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데미안도 코를 훌쩍거렸다.
시에나가 괜히 버럭했다.
“바보들아, 너희는 왜 울어! 시험도 안 망쳤으면서.”
루카스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아내며 말했다.
“너야말로 바보냐? 네가 우니까 울지.”
루카스가 손을 뻗어 시에나의 얼굴을 조심조심 닦아냈다. 서툰 손길이었지만, 시에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 다 끝난 것처럼 굴지 마.”
루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데미안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아직 면접도 남았고, 실기 시험도 남았어. 열심히 준비했잖아.”
데미안이 흐트러진 시에나의 머리 리본을 바로 해 주며 말했다.
“너만큼 열심히 준비한 사람 아무도 없어. 여기서 네가 최고야. 너도 알잖아.”
“선생님도 그랬어. 뭐든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거라고.”
데미안과 루카스가 시에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에나, 들어가자.”
제게 내밀어진 손 두 개를 본 시에나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제 손만큼이나 작은 그 두 개의 손이, 이 순간만은 그 무엇보다 든든하게 느껴졌다.
캄캄하던 눈앞이 차츰 환해졌다. 전부 끝난 줄로만 알았지만, 시에나에게는 아직 남은 싸움이 있었다. 이대로 포기하는 것은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시에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시에나는 왼손으로 루카스의 손을, 오른손으로 데미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세 아이 사이, 전우 같은 끈끈함이 맴돌았다.
“아직 안 끝났어.”
***
면접 장소로 배정된 교실 문 앞에 선 시에나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부 비워내고 털어낸 탓인지, 마음이 후련했다.
‘잘할 수 있어. 그냥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돼.’
앞 순서였던 학생이 나오고, 시에나가 교실로 들어섰다.
의자 하나가 놓여 있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세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시에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한 뒤 자리에 앉았다.
면접관 중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 면접관과 누가 보아도 학자 느낌이 나는 젊은 남성 면접관이 시에나를 보고 싱긋 웃어 보였다.
나머지 한 사람은 필기시험 시간의 감독관이었다. 그녀가 시에나를 보고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자기소개부터 시작하지요.”
할아버지 면접관의 지시로 면접이 시작되었다. 엘레노어와 수십 번 연습했던 기본 질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시에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차근차근 질문들에 답했다. 면접관들의 표정에 언뜻언뜻 만족감이 비쳤다.
간단한 시사 질문을 던졌던 젊은 교수가 칭찬을 건넸다.
“학생은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나 봐요. 인상 깊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까지 최선을 다해 답해 주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시에나가 대망의 마지막 문제를 기다리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 마지막 문제만 잘 대답하면 특별한 감점 없이 면접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때 비교적 별다른 질문 없이 앉아 있던 면접관이 손을 들었다. 필기시험 감독관이었다.
“그레이엄 교수님. 이번 마지막 질문은 제가 해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면접관은 시에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 없이 관찰하듯 보는 시선에, 시에나가 바싹 긴장해 몸을 굳혔다.
“아까 시험을 망친 것 같던데.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
시험을 망쳤다.
면접관의 직접적인 표현에 시에나가 움찔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아까의 상황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시에나가 대답했다.
“……네, 괜찮아졌습니다.”
“아까 시험 중간에 교실을 나갔을 때, 학생은 분명 동요했어요. 무너져 내렸죠. 그런데 면접을 보는 동안에는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더군요.”
그녀의 말에 옆에 있던 두 면접관의 눈이 반짝였다. 시에나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떻게 마음을 다잡은 거지요?”
다행히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시에나가 대답했다.
“친구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격려해 준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마음을 빠르게 다잡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한 과목 시험을 끝맺지 못한 것 같았는데. 남은 시험들을 전부 완벽하게 본다고 해도, 합격을 장담할 수 없지 않나요?”
곧바로 면접관의 추가 질문이 돌아왔다. 시에나를 당황하게 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침착하자. 휘말리지 말자. 당황하지 말자.
시에나가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당황했지만 다행히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시에나는 생각했다.
‘선생님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시에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질문한 면접관과 눈을 맞췄다.
“만약 합격하지 못한다고 해도, 최선을 다한 경험은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시에나가 떨리는 두 손을 힘껏 그러쥐며 말을 이었다.
“주어진 모든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면접관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시에나는 세 사람의 표정에서 무엇도 읽어낼 수 없어 약간 초조해졌다.
“수고했습니다. 나가 보세요.”
꾸벅 묵례한 시에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문을 열고 나선 순간, 시에나는 엄청난 후련함을 느꼈다. 아주 잠깐이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든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고했어, 시에나.’
그렇게 시에나는 또 한 뼘 자라났다.
***
쿵쿵쿵.
엘레노어가 부스스 눈을 떴다. 자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결국은 잠들었었나 보다.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엘레노어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잠이 덜 깨 정신이 몽롱했다.
쿵쿵쿵.
그때 다시 한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이 아니었다.
“아, 리안이구나.”
잠이 확 깼다. 엘레노어가 서둘러 걸쇠를 풀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리안, 왔어?”
그런데 엘레노어의 예상과 달리,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아드리안이 아니었다. 당황한 엘레노어가 주춤하며 물러섰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상대방이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
카이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