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엘레노어와 아드리안 사이,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레노어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적당한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툭, 툭.
무겁고 굵은 빗방울이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내내 흐리더니, 기어이 비가 쏟아질 모양이었다.
아드리안이 재빨리 외투를 벗어 엘레노어에게 건넸다.
“빨리 내려가자.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은데…….”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외투를 망토처럼 뒤집어썼다. 아드리안이 팔 부분을 묶어 그것을 단단히 고정해 주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굵고 찬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서두르자. 내 손 잡아.”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엘레노어가 그의 손을 맞잡자, 아드리안이 달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졌다. 두 사람이 성벽 돌길을 벗어났을 때는 눈앞이 희뿌옇게 보일 정도였다.
두 사람은 잔디가 발목까지 무성하게 자라난 언덕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잔디가 미끄러웠던 탓에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언덕을 다 내려온 두 사람은 진흙과 잔디로 범벅이 된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빗소리 때문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화해야 했다.
“괜찮아, 엘렌?”
“응. 그냥 엉덩이만 좀 얼얼해. 너는?”
“나도 멀쩡해. 결국 머리에 쓴 외투까지 흠뻑 다 젖어 버렸네. 미안.”
“갑자기 비가 이렇게 쏟아질 거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어. 괜찮아.”
두 사람은 거리로 나왔다. 짐마차라도 잡아타려 했건만, 아카데미 입시로 인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전부 만차였다.
비를 쫄딱 맞은 엘레노어의 피부가 창백하게 질렸다. 다급해진 아드리안이 머리를 손으로 털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기랄.”
엘레노어가 머무는 숙소까지 이대로 걸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허름하더라도 근처에 있는 아드리안의 숙소에서 몸을 녹이는 게 나을 듯했다.
“엘렌, 일단 내 방에서 몸을 좀 녹이자. 내가 네 숙소에 가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올 테니까.”
“알았어.”
엘레노어는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어디든 좋으니 좀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아드리안이 머무는 숙소는 코앞이었다.
“세상에. 완전히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셨습니다. 따뜻한 목욕물을 올려드릴까요?”
“최대한 빨리.”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은 요리를 위해 끓이던 물까지 동원해 빠르게 욕조를 채워 주었다.
아드리안이 가방에서 제 셔츠와 바지를 꺼내 엘레노어에게 건넸다.
“씻고 일단 이걸로 갈아입어. 네 숙소에서 옷 가져올 테니까, 따뜻하게 하고 있어.”
“응, 고마워.”
아드리안이 방문을 닫고 나가고, 엘레노어가 곧장 욕조 안으로 들어섰다. 몸이 식어서일까, 미지근한 물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으으. 나이 먹고 어린애처럼 이게 무슨 짓이람.’
그래도 즐거운 경험이기는 했다. 늘 단정하고 깔끔하던 아드리안이 흙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다니. 그것만으로도 이 정도 고생은 할 만했다.
10분쯤 몸을 데우고 나니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엘레노어는 욕조에서 일어나 몸을 닦고, 아드리안의 옷으로 손을 뻗었다.
‘너무 크다…….’
셔츠까지는 괜찮았다. 좀 많이 헐렁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입을 만했다.
문제는 바지였다. 단추를 채웠는데도 손을 떼면 스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몇 번 더 시도해 보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었다.
“바지는 안 되겠다. 허벅지 반을 덮는데 그럼 원피스지, 뭐.”
바지를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엘레노어가 잘 정돈된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갔다. 여관 특유의 퀴퀴한 냄새에 희미하게 아드리안의 체향이 덧씌워져 있었다.
“따뜻해…….”
덜덜 떨다 갑자기 폭신하고 따뜻한 이불에 둘러싸이니 순식간에 노곤해졌다. 몸에서 긴장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대로 잠들면 안 돼……. 내 방도 아닌데.’
엘레노어가 잠을 떨쳐내려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아드리안의 베개가 젖지 않도록 옆으로 빼놓은 엘레노어가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엘레노어가 움직일 때마다 낡은 침대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은 그 소리마저 자장가처럼 들렸다.
하암…….
엘레노어가 긴 하품을 했다. 곧 아드리안이 올 것이다. 잠깐만 버티면 되는 것이었다.
‘잠들면 안 돼. 돌아가서 자야 하는데…….’
스르륵.
늘 그렇듯 잠은 의지보다 강했다.
***
시에나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엄마에게도, 삼촌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말하지 못한 한 가지 비밀.
그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오늘 아침으로 약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긴장감 때문일까. 누구도 깨우지 않았는데도 눈이 번쩍 뜨였다.
혼자 깨끗하게 세수하고 나온 시에나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낑낑대며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을 신고 있으니 엄마가 부스스 깨어났다.
“에나, 벌써 일어났어?”
“좀 일찍 나가서 선생님이랑 공부하려고요.”
시에나가 쪼르르 달려가 엄마의 얼굴에 쪽쪽 뽀뽀를 남겼다.
“요 앞에요! 엄마는 그냥 쉬어도 괜찮아요.”
“그래도 엄마가 따라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시에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델른까지 따라온 것도 엄마에게는 무리였다.
“아까 창밖에 봤는데 사람 엄청 많아요. 선생님도 가고 삼촌도 가는걸. 공작님도 올 거고.”
“머리라도 다시 묶어 줄게. 이리 와.”
엄마의 손을 거치자 조금 부스스하던 분홍빛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변했다.
“잘 치고 와, 우리 딸.”
시에나는 엄마를 한 번 꽉 끌어안은 뒤 씩씩하게 방을 나섰다. 엘레노어의 방문을 두드리려던 시에나는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유롭게 거리 풍경을 둘러볼 기회였기 때문이다. 로비는 이른 시간부터 학생들과 학부모들로 붐볐다.
시에나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손바닥이 다시금 축축해졌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시에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허름한 손수레 앞에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뭐가 있길래?’
호기심을 느낀 시에나가 그 무리 쪽으로 걸어갔다.
“클리어하트 팝니다! 이제 몇 알 남지도 않았으니 서두르세요!”
자세히 보니 사람들은 무언가를 사려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시에나가 발뒤꿈치를 들고 기웃거리는데, 지나가던 행인이 시에나의 뒤에 와서 섰다.
시에나는 어쩌다 보니 그 구매 행렬에 동참하게 되었다. 시에나가 다가서자 주인이 씩 웃으며 작은 봉투를 슥 내밀었다.
“꼬마 아가씨가 운이 좋구나. 딱 한 알 남았다.”
“이게 뭔데요?”
“긴장을 풀어주는 약이지. 씹어서 먹으면 된단다.”
남자의 말에 시에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긴장을 풀어주는 약?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않니. 클리어하트.”
시에나가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흰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저런 약 하나로 긴장이 풀린다고? 하지만 아까 줄까지 서서 사가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정말인 것 같기도 하고…….’
시에나의 고민이 길어지자 주인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얘, 그래서 살 거냐, 말 거냐? 살 게 아니면 비켜서라. 뒷사람에게 팔 테니까.”
“사요, 사!”
시에나는 얼떨결에 주머니를 탈탈 털어 클리어하트라는 약을 샀다. 그러자 시에나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툴툴거리며 흩어졌다.
‘조그마한 게 되게 비싸네.’
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시에나가 엄지손톱만 한 약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진흙 같은 빛깔의 약에서는 달짝지근하면서도 씁쓸한 향이 풍겼다.
“이걸 먹어, 말아.”
시에나가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어, 에나?”
멀찍이서 엘레노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시에나가 얼른 약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어쩐지 엘레노어와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나, 엄마는?”
엘레노어가 물어왔다. 시에나는 약을 꼴깍 삼킨 뒤 대답했다.
“……그냥 선생님이랑 삼촌이랑 같이 가면 된다고 했어요. 피곤한 것 같아서.”
“몸 상태는 어때. 괜찮아?”
“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때 아드리안과 카이델이 도착하며 엘레노어의 시선이 시에나에게서 옮겨갔다. 시에나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야, 이거 정말 효과가 있잖아?’
마차를 타고 가던 시에나는 제 마음이 평소처럼 차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만 해도 고장 난 것처럼 쿵쿵대던 심장이 고요했다.
반쯤은 의심하고 있었는데, 약은 정말 효과가 있었다. 시에나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다녀오겠습니다.”
자신감 있게 인사를 건넨 시에나는 데미안, 루카스와 함께 시험장으로 들어섰다.
“모두 자기 자리에 앉도록 하세요. 책은 이제 전부 넣고.”
깐깐한 외모의 여자 감독관이 지팡이로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순식간에 교실 분위기가 팽팽하게 긴장했다.
“부정행위가 적발되는 순간 3년간 아카데미 입학이 제한됩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가문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감독관이 교실 안을 쭉 둘러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에 아이들이 바짝 얼어붙었다.
“모든 과목 문제지를 한 번에 배부합니다. 주어진 시간 내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분배해 사용하세요.”
그때 시에나의 앞에 앉은 붉은 머리의 남자아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네, 질문하십시오.”
“똥 마려우면 어떡해요?”
소년의 질문에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에 가야지요.”
감독관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단, 교실을 나가는 순간 그 학생의 답안지는 그 상태 그대로 제출됩니다. 그 사실을 꼭 명심하세요.”
장난스러운 질문을 던졌던 소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시에나는 그런 그를 보며 작게 코웃음을 쳤다.
한심하기는.
“아카데미는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입니다. 시험 과정 역시 어느 학교보다 더 까다로우며 투명하게 진행됩니다.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임해 주길 바랍니다.”
딩-딩-.
그때 밖에서 타종 소리가 들려왔다. 비로소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시에나와 루카스, 데미안은 서로를 향해 짧은 시선을 던졌다.
‘잘해.’
시험지를 받아 든 시에나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약 때문일까.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대로면 문제없어.’
엘레노어와 수없이 준비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시에나는 문제를 풀어나갔다. 딱히 막히거나 헷갈리는 부분 없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꾸륵.
시에나가 수리 영역 문제를 반쯤 풀었을 때였다. 배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났다.
‘왜 이러지?’
시에나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다시 시험에 집중했다. 배 속이 조금 부글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참을 만한 정도였다.
꾸르륵.
그런데 다시 한번 신호가 왔다. 이번에는 찌릿 거리는 통증과 함께였다. 시에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가셨다.
‘아냐……. 침착해, 시에나. 별일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