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아드리안은 아카데미 재학 시절 단골 가게에 엘레노어를 데려갔다.
테이블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채소를 넣고 자작하게 끓인 스튜 같은 것이 나왔는데, 약간 매콤하고 칼칼한 맛이 났다. 흐리고 약간 서늘한 델른의 날씨와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한 스푼 떠서 맛본 엘레노어가 콧등을 찡긋했다.
“크으.”
소주 한 잔이 생각나는 맛이랄까.
“괜찮지?”
“응, 맛있어. 분위기도 아늑하고.”
엘레노어는 순식간에 이곳과 사랑에 빠졌다. 아드리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엘레노어의 앞에 건더기를 듬뿍듬뿍 덜어 주었다.
“많이 먹어. 좀 걸어야 할 테니까.”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볼을 부풀렸다.
“걷는 거 싫은데.”
“너 그거 고쳐야 해. 운동 안 하는 거.”
“나만 안 하는 것도 아닌데, 뭐. 다른 영애들도 이렇게 살거든?”
아드리안이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남들이 어떻게 살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네 얘기를 하는 거야.”
이 남자들은 왜 자꾸 운동에 집착하는 거야.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의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덕 위에 길게 이어진 성벽이 보였다.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물었다.
“설마 나랑 가려는 데가 저긴 아니지?”
“저기라니?”
“저 성벽. 설마 저기 올라갈 거란 말은 아니지?”
아드리안의 입가에 서서히 웃음이 번지자, 엘레노어의 얼굴에 좌절감이 떠올랐다.
“너 나랑 약속했어. 오늘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엘레노어의 표정이 와락 구겨져 들어갔다.
‘누가 등산 같은 걸 가자고 할 줄 알았나…….’
하지만 약속은 약속.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의 손에 반쯤 억지로 이끌려 언덕을 올랐다.
겨우겨우 성벽을 따라 난 돌길에 올라서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드리안이 그런 엘레노어를 달래듯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이제 오르막 끝났어.”
“거짓말이면 언덕 밑으로 굴려 버릴 거야.”
엘레노어가 살벌하게 대답했다.
아드리안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 앞에 펼쳐진 것은 완만한 평지였다. 터질 듯 쿵쾅쿵쾅 뛰어대던 심장이 안정을 찾자, 엘레노어의 눈에 성벽 아래의 풍경이 들어왔다.
델른 수도가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북쪽의 아카데미에서부터 남쪽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따라 회갈색 마차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와…….”
“근사하지 않아?”
아드리안이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바람에 흐트러졌다.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말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날이 흐려서 아쉽네. 여기가 일몰 명소인데.”
아드리안이 하늘 위로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여기에 서 있으면 하늘이 내 위로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어. 노을빛이 너무 강해서, 내 손까지도 전부 붉게 물든 것처럼 보였거든.”
“자주 왔어?”
“외로울 때 종종.”
“네가 외로웠다고?”
저번에 보니 친구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았는데.
엘레노어의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놀라움이 묻어났다.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니까.”
맞는 말이었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벽에 팔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그녀도 예정대로 아카데미에 입학했었더라면 이곳을 자주 찾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델도 여기 와 봤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런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드리안이 입술을 뗐다.
“엘렌.”
“응.”
“나를 좋아했어?”
엘레노어의 시선이 아드리안에게 향했다. 아드리안의 금빛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잠시 침묵하던 엘레노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응, 좋아했어.”
엘레노어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정말 하나도 몰랐던 거야? 난 나름대로 티 많이 냈는데. 첫사랑인걸.”
첫사랑.
아드리안의 심장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막상 들으니 그리 기쁘기만 하지는 않았다. 달콤함 끝에 쌉싸름한 여운이 길게 남았다.
“……몰랐어.”
“거봐. 나만 눈치 없는 게 아니라니까.”
엘레노어가 팔꿈치로 아드리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괜히 심각해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도 그럼 좀 더 솔직해져 볼까.”
아드리안이 픽 웃으며 말했다.
“넌 내가 그날, 피아노 앞에서 처음 고백한 줄 알지.”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맞잖아. 아니야?”
“너 엄청나게 취했던 날 기억나? 황태자 전하 생일 연회였던 것 같은데, 전날 크게 다퉈서 우리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았었잖아.”
엘레노어가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기억은 없지만, 그다음 날의 끔찍했던 숙취는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아드리안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
“안녕하십니까, 에버렛 영애.”
감자같이 생긴 남자가 엘레노어에게 다가섰다. 지금까지 아드리안이 본 것만 세 명째다.
평소였다면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엘레노어는 잘 모르는 사람이 다가오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잔뜩 취한 엘레노어는 좀 달랐다.
“안녕! 머리에 힘을 엄청 줬네요. 눌러 보고 싶다.”
엘레노어가 머릿기름을 듬뿍 바른 남자의 잿빛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 남자가 얼굴을 붉혔다.
“영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빙긋 웃었다. 취기로 발그레 달아오른 광대가 귀엽게 솟았다.
“응? 나한테요? 왜요?”
목소리에서 애교가 뚝뚝 흘렀다. 남자는 반쯤 홀린 얼굴로 어버버하며 입술을 뗐다.
“하, 항상 미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인제 그만.
아드리안의 인내가 끝났다. 더 지켜볼 가치가 없었으므로 그가 성큼성큼 다가섰다.
“실례.”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테라스로 들어섰다.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볍게 훑는 시선도 잊지 않았다. 주제를 알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끈질긴 놈은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확 쳤다.
“우와, 진짜 잘생겼다.”
난간에 기대선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얼굴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도대체 뭘 얼마나 마신 거야, 너.”
“본인도 알죠? 잘생긴 거? 응?”
엘레노어가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모습에 아드리안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잘생겼다는 칭찬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약간의 자괴감이 밀려왔지만, 그것보다 우쭐한 마음이 더 컸다.
“오빠, 여자친구 있어요?”
허, 이제는 오빠란다.
아드리안이 기가 찬 눈으로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엘레노어의 헛소리에 장단을 맞춰 주기로 마음먹었다.
“없어.”
“왜 없어요?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네가 내 문제야. 주정뱅이야.”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아프지 않게 콩, 쥐어박았다. 엘레노어는 그마저도 좋은지 헤실헤실 웃었다.
“번호 줄래요?”
“번호……?”
번호라니, 무슨 번호?
“어? 내 핸드폰이 어디 갔지? 내 핸드폰! 잃어버렸나? 아씨, 안 되는데…….”
내 할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엘레노어는 제 주변을 몇 번 둘러보다가 아드리안의 품으로 픽 쓰러졌다. 순식간에 곯아떨어진 것이었다.
아드리안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가 으득, 이를 갈았다.
“네가 술 마시는 걸 이제 내가 그냥 두나 봐라.”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를 반쯤 둘러메다시피 해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힘겹게 마차에 두 사람이 올라탔다.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에 잠이 깼는지, 엘레노어가 부스스 눈을 떴다. 아드리안의 어깨는 엘레노어가 흘린 침으로 동그랗게 젖어 있었다.
“리안……?”
얼씨구. 이제는 알아보기는 한다.
아드리안이 물었다.
“정신 좀 차렸어?”
“아니.”
엘레노어가 다시 아드리안의 어깨에 고개를 툭 기댔다.
“밖에서 또 그렇게 취하기만 해. 혼난다, 진짜.”
“왜, 내가 뭘 어쨌는데?”
“감자같이 생긴 남자들이 들이대는데도 가만히 웃고만 있던데.”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피식 웃었다.
“난 또 뭐라고. 그냥 둬. 나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할 거 아냐. 나도 벌써 서른…… 아니다, 여기선 내가 몇 살이더라?”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름대로 좋았던 기분이 확 상했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거라고? 그 감자 같은 놈들이랑?
“싫어. 그 꼴은 못 봐.”
아드리안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에게 기댄 채 부스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왜?”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아드리안을 엘레노어의 눈이 더없이 맑은 데 비해, 그녀를 보는 그의 시선은 탁했다. 어느 순간, 전처럼 티 없이 맑은 눈으로 그녀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주 오래전부터,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를 욕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친구로만 보는 엘레노어 앞에서 대놓고 표현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비겁하지만 그녀의 친구라서 누리는 특권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서슴없이 제 옆자리를, 제 손을, 제 온기를 나눠 주곤 했으므로.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말하고 싶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마차 안에 나직하게 울렸다. 그가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힘껏 그러쥐었다.
“오래전부터 엘렌 너를, 좋아해 왔으니까.”
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숙여 엘레노어의 얼굴을 확인했다.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
아드리안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허탈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채 밀려왔다.
“이런 순간 너는 자네.”
아무래도 오늘은 기회가 아닌 듯했다. 아드리안이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게 네 대답은 아니길 바라, 엘렌.”
***
엘레노어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아드리안의 말을 들었는데도 그날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드리안이 팔꿈치로 엘레노어의 팔을 툭 건드렸다. 괜히 미안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음 날은 기억하지?”
“응. 얼마나 기억하느냐고 물었었잖아.”
“넌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고.”
아드리안의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정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때는 헷갈렸어. 모르는 건지, 모르고 싶은 건지. 그래서 떠났던 거야. 네 말대로 쪽지 하나 덜렁 남겨 두고.”
엘레노어는 그제야 아드리안이 갑자기 말도 없이 몇 달 동안 사라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가능하면 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어. 네가 지금 신중한 것처럼, 나도 우리 우정에 금이 가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거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미가 있었어?”
“그럴 리가.”
아드리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돌아와서 너를 보는 순간 깨달았지. 몇 달 동안 내가 한 건 죄다 쓸데없는 헛짓거리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