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엘레노어와 아이들은 시험 준비에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시에나는 아드리안과 함께 백작저에서 며칠을 머물며 공부에 집중하기도 했다.
이제 더 가르쳐야 할 부분은 없었다. 아이들은 준비되었고, 엘레노어는 그것을 확신했다.
지금부터는 아이들이 시험이 주는 긴장과 불안에 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니까, 멘탈 관리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시에나가 가장 취약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것이 문제인 듯했다.
엘레노어가 만들어 준 요점 정리 노트를 들여다보던 시에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혹시 문제를 받았는데 너무 어려우면 어떡해요?”
“에나는 지금까지 충분히 열심히 공부해 왔잖아. 어려운 문제가 나와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엘레노어가 시에나를 꼭 안아 주며 말했다.
“선생님은 에나를 믿어. 에나도 스스로를 조금 더 믿어 줬으면 좋겠어.”
시에나가 엘레노어를 꽉 마주 안았다.
“선생님도 같이 아카데미 갔으면 좋겠다.”
“그러게. 너희 다 가 버리고 나면 선생님은 서운해서 어쩌지?”
“아카데미 가고 싶었는데, 집을 떠나는 건 싫어요.”
엘레노어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도 시에나에게서는 보송보송한 아기 냄새가 났다.
‘이제는 이렇게 꼭 안아 주는 것도 더는 못하겠구나.’
아이들이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이, 엘레노어는 조금씩 아이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아이들과의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카메라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들은 정말이지 빠르게 컸다. 처음 봤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봐도 훌쩍 자랐다는 게 느껴졌다. 키도 쑥 크고, 포동포동하던 젖살도 조금 빠진 듯했다.
‘천천히 자라 줬으면 좋겠다. 물론 누구보다 멋진 어른으로 자라겠지만.’
엘레노어가 아쉬움이 듬뿍 묻어나는 손길로 시에나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막상 가 보면 정말 즐거운 날들이 될걸? 너한테는 루크도 있고, 데미도 있잖아. 혼자가 아니니까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거야.”
“정말 그럴까요?”
“응. 정말 그럴 거야.”
***
아카데미가 위치한 중립국, 델른까지는 사흘을 꼬박 가야 하는 거리였다.
“오늘 안에 도착하는 거 맞아요?”
“응, 이제 거의 다 왔어.”
다행히 루카스의 보호자로 엘레노어가 지정된 탓에, 크고 편안한 황실의 마차를 빌릴 수 있었다. 아이들의 컨디션을 위해 중간중간 멈춰 휴식을 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드리안과 시에나의 어머니, 헤스티아가 동행해 엘레노어와 번갈아 아이들을 돌보았다. 카이델은 일이 있어 뒤늦게 합류하기로 했다.
의자 끝에 간신히 걸터앉은 루카스가 몸을 비틀며 말했다. 장시간의 마차 여행에 완전히 지친 얼굴이었다.
“울렁거려…….”
엘레노어가 물병을 건네며 어르듯 말했다.
“조금만 참아, 루크. 곧 숙소니까.”
“아까도 그 말 했으면서!”
“진짜야. 바깥 풍경 좀 봐. 도심이잖아.”
엘레노어가 창밖을 가리켰다.
“와, 정말이네!”
아이들이 창 쪽으로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창밖에는 상점들이 즐비한 델른의 중심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차의 속도도 눈에 띄게 더디어졌다.
아카데미 입시 철이 되면 델른의 중심가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숙소와 식당을 예약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엘레노어와 헤스티아는 괜찮은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지만, 아드리안과 카이델은 어쩔 수 없이 허름한 여관에 묵어야 할 정도였다.
“다들 배 많이 고프지?”
엘레노어가 아이들을 쭉 둘러보며 물었다. 곧바로 적극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네!”
“완전 배고파요!”
“막 꼬르륵거려요.”
엘레노어가 빙긋 웃었다.
“리안이 이 근처에서 제일 근사한 식당을 예약해 뒀대. 내리면 바로 식사부터 하러 가자.”
아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언제 축 처져 있었냐는 듯 생생하게 살아난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소개해 준 음식점은 정말 맛있었다. 한 달 전부터 예약해 둔 곳이라고 했다.
“내일 보자, 에나.”
“푹 쉬어!”
식사를 마친 뒤 시에나는 엄마와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컨디션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하겠다는 이유였다.
“우리도 올라가 볼까?”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에게 데미안과 루카스가 씻는 것을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남자아이들이다 보니 엘레노어보다는 그가 돕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와, 이거 진짜 보통 일이 아니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웃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욕조에서 튄 물이 반이고, 지쳐서 흘린 땀이 나머지 반인 것 같았다.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에게 수건을 내밀며 웃었다.
“고생했어.”
“말로만?”
아드리안이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어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뭘 원하는데?”
엘레노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일 애들 시험 치러 들어가면 시간 남잖아. 나랑 놀자.”
“난 또 뭐라고. 그래.”
엘레노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응. 그 시간에 너랑 노는 것 말고 달리 뭘 하겠어?”
아카데미 시험은 1박 2일로 치러졌다. 첫날 필기시험과 구술시험을 보고, 저녁에는 학교 시설과 기숙사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진다. 그리고 둘째 날에 실기 시험을 치면서 마무리되는 일정이었다.
어차피 그 시간 동안 보호자가 할 일이라고는 기다리는 일뿐. 아드리안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말했다.
“내일은 공작 각하도 오시잖아.”
아, 카이델.
엘레노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드리안의 말대로 내일 저녁이면 카이델도 합류할 터였다.
아드리안이 얼른 약속에 쐐기를 박았다.
“무르는 것 없어. 알겠다고 한 거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델른까지 오는 내내 고생해 준 아드리안에게 그 정도 성의는 보이는 것이 맞았다.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은 풍경이 있었어.”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촉촉하게 젖은 수건을 다시 건넸다.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엘레노어가 아이들의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점검해 주었다.
그때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던 데미안이 차분하게 지적했다.
“선생님, 오늘따라 얼굴이 이상해요.”
엘레노어의 어깨가 움찔했다. 악의 없는 눈동자가 초롱초롱 반짝거렸다.
“진짜네?”
옆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루카스가 엘레노어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웃어라, 웃어…….’
엘레노어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막상 아이들을 시험장에 보내려고 하니 심장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쌔근쌔근. 드르렁드르렁.
각자 성격대로 곤히 잠든 데미안과 루카스를 바라보며 괜한 감상에 젖기도 했다.
그 결과, 아침이 된 엘레노어의 얼굴은 라면이라도 먹고 잔 것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우리 왕자님들은 오늘도 얼굴이 반짝반짝하네. 잘 자서 그런가.”
엘레노어가 데미안과 루카스의 뺨에 쪽쪽 가볍게 뽀뽀해 주었다.
이즈멜처럼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두 아이는 그야말로 깜찍했다. 면접을 위해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니 제법 저희 형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났다.
“에나는요?”
“에나는 한참 전에 일어나서 준비도 끝냈어. 가자.”
엘레노어와 아이들이 1층 로비로 내려갔다.
“에나, 엄마는?”
당연히 엄마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에나가 어쩐 일인지 혼자 서 있었다. 엘레노어가 묻자 시에나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냥 선생님이랑 삼촌이랑 같이 가면 된다고 했어요. 피곤한 것 같아서.”
긴장해서인지 평소보다 시에나의 피부가 조금 창백했다. 엘레노어가 시에나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은 없었다.
“몸 상태는 어때. 괜찮아?”
“네, 괜찮은 것 같아요.”
시에나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엘레노어는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렌.”
“늦어서 미안.”
그때 아드리안과 카이델이 도착했다. 카이델은 도착하자마자 온 것인지 손에 짐가방을 들고 있었다.
“바로 오신 거예요?”
“응.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군.”
“딱 맞게 오셨어요. 마차 두 대에 나눠 타면 되겠네요.”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얼른 끼어들었다.
“각하께서 짐이 많으시니 데미안과 둘이 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카데미 앞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지요.”
카이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도착한 아카데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엘레노어는 전생의 수능 날을 떠올렸다. 아이들이 한참 더 어리기는 했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비슷했다.
“얘들아, 긴장하지 말고 지금까지 한 만큼만 하는 거야. 알았지?”
엘레노어가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기도하듯 꽉 맞잡은 채 말했다.
“헤헤, 선생님이 제일 긴장한 것 같은데.”
루카스가 그런 엘레노어를 보며 놀리듯 웃었다.
정말 그랬다. 루카스와 데미안은 물론, 걱정했던 시에나까지도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래. 엘렌이 너희 대신 다 떨고 있으니까,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치면 돼.”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데미.”
카이델이 데미안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을 맞췄다.
“편하게 쳐. 너는 똑똑한 아이이니 분명 잘 치겠지만…….”
카이델이 데미안의 넥타이를 바로 해 주며 말을 이었다.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마라.”
“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치고 올게요.”
“그래.”
카이델이 데미안의 뺨을 톡 건드리며 웃었다.
그때 서둘러 입장하라는 뜻의 종소리가 울렸다. 엘레노어가 아이들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세 사람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든 아이들이 빠르게 대열 속에 섞여들었다. 세 사람은 그런 아이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괜찮겠죠?”
엘레노어가 물었다.
“그럼.”
“걱정하지 마.”
두 남자에게서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가자, 엘렌.”
그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이델이 슬쩍 눈썹을 찡그렸다.
“어딜 간다는 거지?”
아드리안이 슬쩍 눈을 휘며 웃었다.
“죄송하지만 엘렌과 선약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각하. 피곤하실 텐데 숙소에서 잠이라도 청하시지요.”
“선약?”
사실이냐는 듯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가 약간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밥 한 끼 하지 않고 그를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쓰였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내일 아이들 시험 끝나면 다 같이 식사하기로 해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이별이라니. 엘레노어 뒤에서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후작을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지.”
“푹 쉬어요, 카이델.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잠도 많이 자두고요.”
아드리안이 했던 것과 같은 말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들릴 수 있을까.
엘레노어의 말에 또 속없이 풀어져 버린 카이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