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공작령에서 돌아온 엘레노어는 책상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엘레노어는 제 안에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의미 있게 살고 싶어졌다.
지금껏 크게 관심 두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근 그녀에게 닥친 일들이 영향을 준 것이 틀림없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클로에도 그렇고, 카이델의 유모도 그랬지.’
……전생의 아빠도 그랬고.
엘레노어가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국에서는 문맹이 드문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정말이지 흔한 일이었다.
“글이라…….”
의무 교육 시스템도 없을뿐더러, 책 한 권의 값이 노동자의 일주일 치 봉급과 비슷한 수준이라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는 쉽게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엘레노어는 전생에서 그랬던 것만큼 모두가 교육에 열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사칙연산을 할 줄 아는 것은 삶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렴하고, 부담스럽지 않게.”
엘레노어가 손톱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아직은 모든 것이 막연하게 느껴졌다.
“당분간은 아이들 공부에 더 집중해야겠지.”
엘레노어가 미리 뽑아 둔 질문 목록을 탁탁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시험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데미안과 시에나는 물론, 걱정했던 루카스도 이제는 합격권에 들어섰다.
남은 것은 구술 고사, 그러니까 면접을 잘 준비하는 것이었다.
필기시험에 비해 그 비율이 높지는 않지만, 아카데미의 교수진에 눈도장을 찍을 좋은 기회였다. 엘레노어가 아스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처럼 말이다.
1. 왜 아카데미에 지원하게 되었는가.
2.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가.
3. 졸업 후에 하고 싶은 일과 그 이유를 밝혀라.
4. 감명 깊게 읽은 책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
5.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뻔하고 뻔한 질문들이 쭉 이어졌다. 전생에서 받았던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목록이었다.
이런 질문들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성가시기는 하지만,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마지막 질문이야. 그건 나도 짐작할 수가 없으니까.”
아카데미 면접 마지막 질문은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았다. 매년 달라 완벽히 대비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때그때 면접관의 기분에 따라 추가 질문을 퍼붓기도 했다.
면접관에게 휘말려 멍하니 앉아 있다 나오는 게 보통이었고, 간혹 눈물을 터뜨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일종의 압박 면접이었다.
하지만 그냥 손을 놓고 있을 엘레노어가 아니었다.
“면접 질문을 맞출 수는 없어도, 멘탈 단련 정도는 미리 해 둘 수 있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듣고 답하기만 해도 절반은 하는 법이니까.
“악역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해.”
***
엘레노어의 요청에 악당 셋이 곧장 응답했다.
“전하, 혹시 시간 있으세요?”
“나 그거 있어. 완전 많아.”
악당 1은 이즈멜.
“카이델, 혹시 시간 좀…….”
“얼마든지.”
악당 2는 카이델.
“리안.”
“그래.”
악당 3은 아드리안이었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섭외였다. 말을 끝맺을 필요도 없었으니까.
‘내가 뭘 시킬 줄 알고 다 알았대. 저러다 크게 데이지…….’
엘레노어가 끌끌 혀를 찼다. 셋 다 신중함이라는 미덕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허우대만 단단하지, 속은 누구보다 말랑말랑한 사람들이었다.
네 사람은 약속한 시각, 황태자궁 응접실에 모였다. 어쩐 일인지 이즈멜이 아닌 엘레노어가 홀로 상석에 앉아 있었다.
누가 엘레노어의 옆에 앉을 것인가. 유치한 기 싸움을 벌이는 세 사람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엘레노어가 선언한 것이다.
“그럼 저는 그냥 바닥에 앉을게요!”
결국 엘레노어가 1인용 상석에 앉고, 세 사람이 다인용 소파에 앉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엘레노어는 사장님 같은 분위기로 세 사람에게 종이 한 장씩을 건네주었다. 예상 질문을 차례로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아드리안이 질문이 있다는 듯 손을 들었다. 엘레노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이들한테 이 질문을 차례대로 던지면 되는 거야?”
“전부 물을 필요는 없어. 그중에 한 두세 개만 골라서 물어보면 돼. 진짜 면접처럼 말이야.”
카이델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네, 카이델.”
“마지막에 있는 ‘특별 질문’이라는 게 뭐지?”
엘레노어가 손가락을 부딪쳐 경쾌한 ‘딱’ 소리를 냈다.
“좋은 질문이에요.”
엘레노어의 칭찬에 카이델의 입꼬리가 작게 씰룩였다. 이즈멜과 아드리안은 그런 그를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그게 오늘 여러분을 부른 이유예요. 다들 아카데미 구술시험 마지막 문제가 쉽지 않다는 건 들어 보았죠?”
엘레노어의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아드리안과 카이델은 시험장에서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워낙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문제 자체가 어려운 것도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마구 퍼부어 당황하게 한다는 게 핵심이에요. 준비되지 않은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는 거죠.”
“겨우 아홉 살, 열 살짜리에게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그런 면접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어쩌겠어요.”
그때 이즈멜이 손을 들었다.
“네, 전하.”
“이거 은근히 재밌군.”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말하기 전에 손을 드는 게 마음에 든 눈치였다.
“마지막 문제는 미리 짐작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아? 어떻게 준비할 생각이지?”
“문제에 대한 답을 준비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말을 제대로 듣고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밝히는 태도를 연습시킬 수는 있어요.”
엘레노어가 이즈멜과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모두에게 어려운 시험이에요. 아홉 살 아이들에게 엄청난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을 거고요.”
가만히 앉아 있던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아이들을 당황하게 하라는 거지?”
“따지자면 그렇지.”
이즈멜이 다시 손을 들었다.
“네, 전하.”
“아무 질문이나 해도 돼?”
엘레노어는 약간의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에게 이상한 질문을 해 봐야 뭐 얼마나 이상한 질문을 하겠는가.
카이델이 손을 들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나는 데미안에게 질문하면 되는 건가?”
“또 좋은 질문이에요.”
엘레노어가 칭찬하며 미소 지었다. 질투가 난 이즈멜과 아드리안이 입술을 삐죽했다.
“좋은 질문은 무슨…….”
이즈멜이 낮게 구시렁거렸다. 엘레노어가 이즈멜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며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이야기해.”
깨갱. 이즈멜이 한발 물러섰다. 엘레노어에게는 이길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어색한 상대가 질문하는 게 좀 더 효과적으로 당황하게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아드리안이 고개를 느른하게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다 친한데.”
엘레노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는 워낙 애들이랑 잘 지내니까. 그래서 약간 고민했어.”
아드리안이 씩 웃었다. 뿌듯한 얼굴이었다. 카이델이 부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가 제가 생각한 파트너 조합을 발표했다.
“전하랑 시에나, 카이델이랑 루카스, 리안이랑 데미안. 일단은 이 조합이 좋을 것 같아요.”
확실히 조금 낯선 조합이었다. 세 사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손뼉을 크게 두 번 쳐 주의를 환기했다.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요?”
***
첫 번째 방의 주인은 카이델이었다.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루카스가 카이델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카이델이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
총총걸음으로 다가온 루카스가 카이델의 무릎에 끙차, 하고 올라가 앉았다. 맡겨 놓은 자리처럼 당당한 태도였다.
당황한 카이델이 다시 한번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 말고. 저 의자에.”
“난 여기가 좋은데.”
루카스는 카이델을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티끌 하나 없이 해맑은 얼굴이었다.
결국, 카이델은 루카스를 번쩍 안아 들어서 앞자리에 앉혀 주었다. 의자에 앉는 것부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카이델이 첫 질문을 던졌다.
“왜 아카데미에 지원하게 되었지?”
그러자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공작님은 아카데미 왜 갔는데요?”
“견문도 넓히고, 자유롭게 공부도 하고…….”
저도 모르게 술술 대답하던 카이델이 말을 멈췄다.
아니, 이게 아니지.
카이델이 근엄한 표정으로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내가 물었으니 네가 답해야지, 루크.”
“나도 그런 이유예요.”
루카스가 활짝 웃으며 능글능글하게 대답했다.
처음에야 루카스도 카이델의 굳은 표정을 무서워했지만, 이제는 쥐꼬리만큼도 먹히지 않았다. 루카스는 카이델이 저를 귀여워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런데 공작님, 밥 먹었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카이델이 얼른 답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했다.
“그래. 두 번째는…….”
하지만 루카스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뭐 먹었어요?”
“스테이크.”
“나도 스테이크 좋아하는데! 스테이크 먹으면 키 커요?”
“뭐든 골고루 많이 먹어야…….”
카이델은 루카스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언제부터 키 컸어요?”
“어렸을 때부터 큰 편이었다.”
“힘은 언제부터 셌어요?”
“운동을 시작하고부터.”
“요즘도 운동 많이 해요?”
“하루에 두세 시간은 꾸준히 하지.”
루카스가 눈을 반짝였다. 루카스는 쪼르르 카이델의 곁에 다가가 그의 근육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딱딱하고 탄탄한 느낌이 신기했다.
카이델이 슬쩍 몸에 힘을 주자 루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카스가 소파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소파도 들 수 있어요?”
“……들 수야 있지.”
“들어 봐요!”
아니, 소파까지 정말 들어야 하나.
카이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엄격해져야 할 타이밍인 것 같은데,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동그란 눈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
에라 하는 마음으로 그가 소파를 슬쩍 들었다가 놓았다. 루카스가 와아 하며 큰 소리로 감탄했다.
“선생님도 한 손으로 들 수 있어요?”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를 말에서 내려줄 때는 한쪽 팔이면 충분했다.
“그래.”
“들어 봤어요?”
“응.”
카이델의 말에 루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들어 봤어요? 얼마나 무겁나 궁금해서?”
벌컥.
문밖에서 가만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엘레노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듣자 듣자 하니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루크! 카이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