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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91화 (91/168)

91화

엘레노어의 커다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툭툭 떨어지자 카이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무서웠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무서웠어요.”

둑이 무너진 것처럼, 터진 눈물은 그치지 않고 한없이 쏟아졌다. 엘레노어는 카이델을 앞에 세워 둔 채 한참을 울었다.

카이델이 제 주머니와 가슴께를 더듬었다. 손수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운동을 위해 가볍게 차려입은 차림이었다.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젠장. 하필 오늘따라…….’

잠시 고민하던 그가 단추를 툭툭 풀기 시작했다. 엉엉 울던 엘레노어의 울음이 순간 잦아들었다.

‘옷을 왜……?’

카이델이 불쑥 제 셔츠를 내밀었다. 엘레노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카이델을 올려다보았다.

“손수건이 없어서.”

그가 깨끗한 소매 부분으로 엘레노어의 눈물을 톡톡 닦아 주었다. 엘레노어가 코를 훌쩍이며 뺨을 붉혔다.

“그렇다고 옷을 벗어 주는 게 어디 있어요.”

“코 풀어.”

“이상해…….”

엘레노어가 훌쩍거리면서도 그의 말대로 셔츠에 팽하고 코를 풀었다. 그러자 잘했다는 듯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누굴 어린애로 아나?’

어이가 없어서일까. 눈물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엘레노어가 몸을 틀어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찰랑거리는 수면에 숲의 풍광이 거울처럼 비쳤다.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자니 꿈에서 느낀 충격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젖은 뺨을 스치는 찬 공기가 정신을 들게 했다.

‘그곳에서 나는 정말 죽었구나.’

새삼스럽게 밀려오는 자각에 엘레노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꿈속에서 본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눈앞이 희뿌옇게 번졌다.

‘말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엄마 아빠를 용서한다고, 그러니 엄마 아빠도 나를 용서해 달라고.

엄마 아빠의 소원은 전부 이루어졌다고. 나는 편안하고, 누구보다 더 많이 사랑받으며 살고 있다고.

그러니 이제는 그냥 편해지시라고.

사랑했고, 사랑한다고.

한참이나 호수를 보고 있던 엘레노어가 돌아섰다. 카이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갈까?”

많이 울어 녹초가 된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는 다시 엘레노어의 삶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래, 가자.”

그는 익숙하게 엘레노어를 말 등에 태우고 저도 올라탔다.

“이번엔 천천히 갈게.”

카이델은 아주 부드럽게 말을 몰았다. 지친 엘레노어가 카이델에게 몸을 기댔다. 따뜻한 체온부터 쿵쿵 강하게 뛰어대는 심장 소리까지 등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엘레노어가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그의 셔츠를 조금 더 힘주어 쥐었다. 부드럽고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카이델.”

“응.”

“……고마워요, 전부.”

머리 위에서 카이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알아.”

***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말을 타고 달린 탓인지 졸음이 밀려왔다. 엘레노어는 그새 새것으로 깐 보송보송한 시트 위에 누워 깊은 잠을 청했다.

일어나자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 되어 있었다. 하녀들이 엘레노어의 방에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수프를 휘적거리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작님은 어디 계세요?”

“도련님들과 아가씨께 중심가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나가셨어요. 시에나 아가씨가 시장에 가고 싶다고 졸라대셔서요.”

혼자서 세 아이를 다루기는 힘들 텐데.

엘레노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녀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오시면 찾으셨다고 전해드릴까요?”

“아니에요. 굳이 성가시게 해드릴 필요는…….”

습관처럼 거절하려던 엘레노어가 마음을 바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래 주면 고맙겠어요.”

어쩐지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아침에 그런 추태를 보이고 카이델을 마주한다는 게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그를 보고 싶었다.

엘레노어는 돌아올 카이델과 아이들을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꼿꼿하던 자세는 시간이 갈수록 허물어져, 어느 순간 엘레노어는 제집처럼 소파에 길게 누운 자세가 되었다.

‘언제 오지?’

슬슬 책 읽기도 지루해지려는 차였다. 엘레노어의 눈꺼풀이 서서히 무거워졌다.

똑똑.

그때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던 엘레노어가 벌떡 일어났다.

“들어와요.”

당연히 하녀가 들어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카이델이었다. 그의 손에는 간식거리가 가득 담긴 접시가 들려 있었다.

“카이델?”

엘레노어가 놀란 얼굴을 했다. 카이델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러기는 했는데…… 제가 가려고 했죠.”

“그대가 내게 오든, 내가 그대에게 가든 결과는 같으니까.”

엘레노어가 몸을 일으키려 배에 힘을 주자, 카이델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편하게 있어.”

“그래도…….”

“그래야 나도 편하게 있지.”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다시 쿠션에 등을 기댔다. 편하게 있겠다는 말과 달리, 그는 옆에 놓인 테이블 모서리에 살짝 걸터앉을 뿐이었다.

‘그래, 뭐. 카이델에게 못 보일 꼴을 한두 번 보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치마 밑으로 삐죽 나온 맨발은 조금 민망했다. 엘레노어가 꼬물꼬물 몸을 말자 카이델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뭐예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이 들고 있는 접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장에서 사 왔어. 기분 나쁠 땐 단것이 특효라길래.”

카이델이 초콜릿이 큼직큼직하게 박힌 쿠키 하나를 집어 건넸다.

엘레노어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어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진한 단맛이 입안을 채웠다.

“맛있다.”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져 갔다. 온종일 엘레노어 걱정에 속을 까맣게 태운 카이델이었다.

엘레노어가 카이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애들은 말 잘 들었어요? 혼자서 다 감당이 되던가요?”

카이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중간부터는 그냥 시에나와 루카스를 안고 다녔어. 내려두면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있어야지.”

“고생하셨겠다. 절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그래도 훨씬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쉬게 해 주고 싶어서. 새벽부터 그 멀리까지 갔으니 그대의 부실한 체력에는 무리였을 거야.”

부실한 체력.

엘레노어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실제로 그녀는 거의 기절하듯 누워 몇 시간을 곯아떨어져 있었으니까.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데, 오늘은 잘 쉬어야지.”

“벌써 일주일이 갔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나도 그래.”

내일은 엘레노어와 시에나, 루카스가 다시 수도로 올라가는 날이었다.

일주일은 나름대로 긴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눈 깜빡하니 돌아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엘레노어는 약간의 아쉬움과 서운함을 감추며 애먼 곳을 바라보았다.

“먹어.”

방 안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자, 카이델이 얼른 쿠키 하나를 더 내밀었다. 엘레노어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데미안이랑 언제 올라오실 거예요?”

“2주 정도는 더 걸릴 것 같아. 데미안의 시험이 코앞이니 최대한 서두르기는 하겠지만.”

엘레노어가 쿠키를 오물오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데미안 초상화를 그릴까 해.”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의 눈에 반짝 빛이 감돌았다.

“완성되면 꼭 보고 싶어요. 초상화는 완성되는 데 보통 얼마나 걸리나요?”

카이델이 물었다.

“그대는 초상화를 그려 본 적이 없나?”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와이트도 저도 딱히 그런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요.”

“하나쯤은 남겨 두면 좋을 텐데.”

“아, 생각해 보니 있긴 하네요. 어렸을 때 블레이크 후작가에서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어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눈썹을 찡그렸다.

“후작가에서?”

“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어렸을 때 놀러 갔다가 끼여서 그렸던 것 같아요.”

카이델이 자그마한 과자를 내밀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소후작과는 정말 친한 사이인가 보군.”

“뭐 그렇죠.”

“부러운데.”

카이델의 목소리에서 질투와 함께 약간의 서운함이 느껴졌다. 엘레노어가 얼른 덧붙였다.

“난 카이델 당신이랑도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요.”

카이델이 피식 웃었다.

“그래?”

“우리 안 친해요?”

“아니, 친해.”

카이델은 제가 내민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먹는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오물거리는 입도, 읽지도 않으면서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 책도 귀여웠다.

“그래도 더 친해지고 싶어, 나는.”

그때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발견했다.

“잠시만 그대로 있어.”

“네?”

몸을 일으킨 카이델이 손을 뻗어 엘레노어의 입가를 부드럽게 털어 주었다. 아이를 보살피듯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엘레노어는 카이델의 시선을 피하며 횡설수설 해명을 늘어놓았다.

“저 원래 이렇게 막 흘리고 먹지 않아요.”

“응.”

“응석받이도 아니에요. 어렸을 때도 그런 적 없었어요.”

“그래?”

카이델은 그저 귀엽다는 듯 그런 그녀의 말에 호응해주었다.

“원래는 예의도 발라요. 이렇게 버릇없이 누워서 손님맞이 하지 않는다구요.”

“알아. 내가 그러라고 한 거야.”

선선한 인정에 엘레노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제가 이렇게 응석받이처럼 구는 데는 카이델 책임도 있어요.”

“내 책임?”

“너무 오냐오냐하셨잖아요. 아닌 건 아니라고 선을 딱 그어 주셨어야죠. 다 받아주시면 버릇 나빠진다구요.”

“그거 기대되는데.”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엘레노어가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쁘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 말에 카이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나쁘게 생각 안 해.”

카이델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오히려 좋았어. 내가 그대에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엘레노어가 카이델과 눈을 맞췄다. 더는 차갑지 않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가득 담고 있었다.

“힘들면 기대도 돼. 편지 몇 통이면 그대의 응석을 받아주고 싶은 사람들을 줄 세울 수도 있을걸.”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픽 웃었다.

“그게 뭐예요.”

“혼자 끙끙 앓지 말라는 이야기야.”

카이델이 엘레노어 옆에 반쯤 빈 접시를 내려놓으며 슬쩍 덧붙였다.

“이왕 기대는 거 내게 기대 주면 좋고.”

“……쿠키나 먹어요.”

약간 쑥스러워진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입에 쿠키를 턱 물려 주었다.

너무 무턱대고 손을 뻗은 것일까. 말랑하고 따뜻한 감촉이 예민한 손끝을 휘감았다. 카이델의 입술이 엘레노어의 손가락 끝을 가볍게 물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휘둥그레진 엘레노어의 두 눈을 본 카이델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솟았다.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엘레노어가 입술을 꾹 깨물며 얼른 손을 거두었다. 두 뺨은 물론 손끝 발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잘 먹을게.”

카이델의 목소리에는 짙은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그러시든가요…….”

엘레노어는 의연한 척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조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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