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90화 (90/168)

90화

“아드님이요?”

엘레노어가 시선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일곱 살에 열병으로 죽었어요. 마님께서 공작가의 의원까지 불러주셨지만 이겨내지 못했지요.”

무거운 이야기에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라리스.”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유모가 말을 이었다.

“도련님, 그러니까 공작님께서 얼마나 위로가 되어 주셨는지 몰라요. 글 모르는 저 대신 비문도 써 주셨고요.”

“…….”

“초콜릿 쿠키라면 자다가도 번쩍 눈을 뜨시던 분인데, 자기 몫을 늘 제게 양보해 주셨어요. 일곱 살 아이에게 그게 얼마나 커다란 일인지, 아시지요?”

일곱 살의 카이델도 지금처럼 다정하고 속 깊은 아이였구나.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위를 이어받으신 이후로 공작님께서 홀로 떠맡으신 짐이 많았지요. 그 모습이 가끔은 위태롭게 보였는데, 오늘 걱정을 조금 덜었습니다.”

“카이델을 진심으로 아끼시는군요.”

엘레노어가 속삭였다. 당연한 이야기라는 듯 유모가 눈썹을 으쓱했다.

“이곳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누구나 공작님이 행복하시기만을 바랄 겁니다.”

끼익 끼익.

한동안 흔들의자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엘레노어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한 가지로 이름 붙일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잠시 머뭇대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는, 괜찮으신가요?”

주어가 빠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유모는 엘레노어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먼저 떠난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지요.”

나이보다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괜찮아지기는 하지만, 결코 완전히 아물지는 않는답니다.”

유모 클라리스의 말은 엘레노어가 전생의 부모님을 떠올리게 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웠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서늘하게 식어 있는 침대 시트에 뺨을 대고 새우처럼 웅크려 누웠다.

“기분이 이상해.”

무릎을 꽉 끌어안은 엘레노어가 중얼거렸다.

“마지막에 그 질문은 하지 말 걸 그랬어.”

후회되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한참을 뒤척이던 엘레노어는 찝찝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

“여진아!”

엘레노어는 전생의 꿈을 꾸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 전생에서의 일을 꿈으로 꾸는 일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꿈은 조금 달랐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여보, 진정해.”

“말도 안 되잖아, 이건! 여진이가 왜……. 여진이가 왜 죽어.”

엘레노어는 제가 죽고 난 이후의 일들을 보고 있었다. 이 순간 그녀는 엘레노어 에버렛이 아닌 한국의 고여진이었다.

“차라리 날 데려가지. 차라리 날…….”

병원 복도에서 가슴을 치며 무너지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망연한 표정으로 병원 벽에 머리를 기댄 아빠도.

숨이 막혔다. 이런 것, 보고 싶지 않았다.

여진이 꿈에서 깨어나려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나 뜨나, 여진은 전생에서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상상일까? 아니면. 정말 있던 일을 보고 있는 걸까?’

눈앞의 풍경이 서서히 변했다. 병원 복도에 있던 엄마와 아빠는 상복을 입고 빈소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여진은 제 장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학교 다니던 시절의 친구들, 대학교 동기, 직장 동료……. 까맣게 잊고 살았던 사람들이 줄줄이 빈소를 찾았다. 미묘한 감정이 출렁거렸다.

처음에는 몸을 뒤틀며 거부하던 여진은 어느 순간 체념하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한 줌의 재가 되고, 책 한 권 크기의 도자기에 담겨 봉안당에 안치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말이다.

‘엄마, 아빠.’

여진은 봉안당 앞에 선 부모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그들은 작고 초라했다.

남보다 못한 사이라고, 참 많이 원망했었다. 미워하기도 많이 미워하고, 탓하기도 많이 탓했다.

[엄마

딸 설에 오니 엄마가 갈비찜 해둘게

오전 8:29]

[나

이번에도 특강 잡혀서 본가 못 가요. 명절 보너스 들어와서 계좌로 용돈 좀 보냈어요. 옷도 좀 사 입고 친구도 만나고 다니세요. 아버지께도 대신 안부 전해주세요.

오후 9:03]

[엄마

그래 고맙고 미안하다 아프지마라 요즘날이춥다

오후 9:05]

성인이 되어 독립한 이후로는 명절에 잠시 얼굴을 비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피하고 싶어 특근을 자처했던 적도 많았다.

“미안하다, 여진아. 너를 볼 면목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가슴을 치는 두 사람을 보니 심장이 지끈거렸다.

“학원 한 번 안 가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대단한 대학에 입학했는데, 변변찮은 꽃다발 하나 안겨 주지 못해 미안했다.”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아빠가 말했다. 머리가 완전히 다 세 버린 그는 원래의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가장 예쁜 것, 가장 귀한 것만 누려야 할 너인데…… 네게 준 건 짐뿐인 것 같다. 너를 찾지 않는 게 너를 위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후회가 돼.”

‘고여진’이라 쓰인 명패를 끊임없이 어루만지던 엄마가 흐느낌을 토해냈다. 시체처럼 야윈 어깨가 둥글게 굽어들었다.

“살아가다 보면 잊혀질 거라던데, 그 사람들은 모르는가 보다. 어느 날 문득 너를 잊을까, 그게 난 제일 무서운데.”

끝내 아빠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투둑 떨어져 흘렀다. 늘 윤기 없이 거칠거칠하던 뺨이 눈물로 번들거렸다.

“다음 생에는 엄마 아빠 딸 말고, 부잣집에서 태어나 원 없이 사랑만 받으며 살아라. 엄마 아빠가 여기서 열심히 기도할게.”

그 순간 여진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주마등처럼 두 개의 인생이 눈앞을 스쳐 갔다. 가시밭길처럼 치열했던 여진의 인생에서부터, 그리고 펼쳐진 엘레노어의 꽃길까지.

늘 전혀 다른 길이라 여겼던 두 길이 서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힘들고 아픈 건 다 여기 남겨 두고 가. 엄마 아빠한테 다 주고 가.”

여진이 두 사람을 향해 힘껏 손을 뻗은 순간,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먼지처럼 산산이 흩어졌다.

안 돼. 조금만 더 있을래. 조금만……!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나 줘서 정말로 고맙다, 여진아.”

***

“허억.”

엘레노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하고, 베갯잇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엄마, 아빠.”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창밖을 보니 희끄무레한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심장이 자갈로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방안을 가득 채운 따뜻한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갈래. 여기서 나가야 해.’

반쯤 넋이 나간 엘레노어가 무작정 신발을 꿰어 신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른 시간이라 복도는 사용인들도 없이 고요했다.

엘레노어는 누군가에게 뒤쫓기는 사람처럼 재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엘레노어……?”

일찍 일어나 몸을 단련하던 카이델이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귓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엘레노어, 잠깐만.”

엘레노어는 제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빠르게 걸었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젖은 뺨을 따끔따끔하게 했다.

“엘레노어. 잠옷 차림으로 어디를 가려고.”

“비켜요. 갈 거야.”

“어디를?”

“어디로든.”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가로막았다. 엘레노어는 어떻게든 그를 피하려 했지만, 카이델이 한발 빨랐다.

엘레노어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된 것을 본 카이델이 흠칫했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의 그녀는 처음이었다.

“가지 마.”

카이델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젖은 뺨을 닦아냈다.

“무슨 일이든 나한테 풀어. 나한테 쏟아내. 뭐든 해 줄 테니, 나랑 있어 줘.”

카이델이 다정하게 엘레노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엘레노어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가지 마, 엘레노어.”

카이델이 부드럽게 엘레노어의 턱을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고요한 바다 같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 못 해요.”

“괜찮아.”

“말해도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믿을 수도 없을 거고.”

“엘레노어, 그대의 말이라면 나는 그냥 믿어. 이해할 수 없어도, 믿을 수는 있어.”

카이델의 따뜻한 손이 엘레노어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대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캐묻지는 않을 거야. 그대는 내게 무엇도 설명할 필요 없어.”

엘레노어는 서서히 가슴의 떨림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카이델 역시 엘레노어가 조금씩 진정되는 것을 느낀 듯 숨을 깊이 내쉬었다.

“춥지 않아? 안으로 들어가지.”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냥 바깥바람을 더 쐬고 싶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잠시 고민하던 카이델이 어딘가로 뛰어갔다. 몇 분 뒤, 그가 제 말을 끌고 왔다. 한쪽 손에는 얇은 코트 하나를 들고 있었다.

“팔.”

엘레노어가 얼떨떨하게 오른팔을 내밀자, 그가 외투를 걸쳐 주었다.

“옳지. 저쪽 팔도.”

단추까지 꼼꼼히 채워 올린 그가 엘레노어를 번쩍 들어 말 등에 앉혔다.

엘레노어가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말 못 타는데…….”

“알아. 이번엔 내가 몰 테니, 그대는 내게 기대 있으면 돼.”

카이델이 훌쩍 뛰어 엘레노어의 뒤에 올라탔다. 그가 한쪽 팔로 엘레노어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카이델이 부드럽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감에 엘레노어가 꽁꽁 얼어붙었다.

카이델이 귓가에 속삭였다.

“다치게 안 해. 긴장 풀어.”

엘레노어는 제 허리를 꽉 끌어안은 팔을 꽉 붙잡았다. 나무처럼 단단한 팔이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서서히 엘레노어는 힘을 빼고 카이델에게 몸을 기댔다. 그가 저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을 믿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숲으로 들어섰다.

“조금 더 빨리 가 볼까?”

카이델의 제안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무서우면 내 팔을 두 번 두드려.”

말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하자,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이 마구 날렸다. 아찔한 속도에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

엘레노어는 제 허리를 감싼 카이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엘레노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빠르게 스쳐 가는 숲의 풍경을 담았다.

숲속으로 제법 깊이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카이델이 서서히 말의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잠시 뒤, 두 사람의 앞에 초록빛 호수가 나타났다.

거짓말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꼭 동화 속의 한 장면에 발을 디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 왔군. 그대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곳이야.”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엘레노어가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노을 질 때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른 새벽도 나름의 운치가 있어.”

어째서일까.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엘레노어의 눈물샘이 툭 하고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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