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시에나. 루카스.”
카이델의 양팔에 번쩍 들린 아이들이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더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루카스가 천연덕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선생님.”
걱정은 있는 대로 시켜 놓고 ‘안녕, 선생님’이라니.
울컥한 엘레노어가 루카스와 시에나의 볼을 한쪽씩 꼬집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헤헤. 몰라요.”
“이제 너희끼리 보내는 자유시간은 끝이야. 믿고 풀어줬더니 이렇게 사고를 치고.”
엘레노어의 말에 아이들이 마구 고개를 저었다. 불만스러운 칭얼거림이 이어졌지만 엘레노어는 단호했다.
그녀의 눈치를 슬쩍 살핀 카이델도 한 마디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오를리 부인이 너희를 쭉 따라다닐 거다.”
“에엑?”
감시자가 내내 따라다닐 거라는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하지만 툴툴거리던 것과 달리, 아이들은 유모와 잘 지냈다. 오히려 아이들이 병아리처럼 유모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곤 했다.
공작 성에 온 지 겨우 닷새.
아이들의 볼은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피부에 윤기가 돌았다. 워낙 잘 먹고 잘 잔 덕이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클라리스.”
“암요. 걱정하지 말고 즐겁게 다녀오세요.”
엘레노어가 유모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문을 나섰다. 오늘은 드디어 말 등에 오르는 날이었다.
“안녕, 레이.”
엘레노어가 갈기를 슥슥 쓰다듬어 주자 레이도 엘레노어에게 아는 척을 했다.
“나도 여기 있는데.”
카이델이 은근슬쩍 질투심을 드러냈다.
어떻게 사람도 아니고 말을 질투할 수 있지? 엘레노어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말 타고 달릴 수 있어요?”
“그야 그대의 운동 신경에 달렸지. 평소에 운동은 좀 하나?”
엘레노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2층에 있는 방까지 계단을 오르내리고, 노을이 예쁜 날엔 정원도 산책하고, 숨도 쉬고……. 그 정도면 운동을 한다고 할 수 있겠지.
“조……금?”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운동을 한다니 다행이었다.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번쩍 들어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갑자기 높아진 시야에 엘레노어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엘레노어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으아. 너무 무서운데요.”
“허리 펴고. 긴장하면 말도 같이 긴장해.”
움츠러든 엘레노어가 허리를 숙이려 하자 카이델이 곧바로 저지했다. 그는 안전에 있어서는 무척 엄격한 스승이었다.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자세를 다시 잡아 주었다. 그의 손이 언뜻언뜻 닿을 때마다 엘레노어의 배 근육이 바짝 긴장했다.
“좀 더 힘을 주어야지.”
반듯한 자세로 앉는 데도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엘레노어의 다리 근육은 벌써부터 비명을 질러대는 느낌이었다.
“이게 최대한 힘 준 건데요.”
카이델은 엘레노어에게 운동 신경이란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와이트가 왜 엘레노어에게 승마를 가르쳐 주는 것을 포기했는지, 그 이유도 잘 알 것 같았다.
“천천히 움직일게.”
괜찮겠냐는 듯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올려다보았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써 봐. 리듬이 생길 거야.”
레이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생경한 감각에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카이델은 말고삐를 쥐고 엘레노어의 자세를 확인하며 천천히 따라 걸었다.
한 바퀴를 빙 돌자 엘레노어는 그제야 조금 감은 느낌이었다. 어설픈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처음처럼 긴장하지는 않았다.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요즘 좀 우울해 보이던데.”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제가요? 평소랑 똑같았던 것 같은데.”
“응, 그렇긴 한데 모르겠어. 어딘지 힘이 좀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내 느낌이지만.”
엘레노어가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카이델이 그것을 눈치챌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누군가 알아챈다면 이즈멜이나 아드리안이 아닐까 했는데, 카이델이라니.
엘레노어의 침묵에서 긍정을 읽은 카이델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럴 때 말을 타고 한참을 달려. 정신없이 달리고, 멈춰서 잠시 쉬다 또 달리고. 그러다 보면 속이 트이더군.”
그대에게도 그걸 느끼게 해 주고 싶었는데.
엘레노어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무리 같죠?”
“석 달은 여기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카이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요. 시야가 높아지니까 되게 멀리까지 보이거든요.”
“뭐가 보이는데?”
“집들이랑 숲이랑……. 저쪽에는 시장이 있는 것 같은데요?”
엘레노어가 저 멀리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읊었다. 공작 성부터가 언덕 위에 위치하다 보니, 공작령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엘레노어와 카이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중간에 레이가 갑자기 속도를 높여 엘레노어를 당황하게 한 것을 빼면 나름대로 성공적인 첫 승마였다.
“어떻게 내려와요?”
“여기를 밟고, 나한테 몸을 기대.”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그가 엘레노어를 사뿐히 땅에 내려놓았다.
엘레노어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안 쓰던 근육들을 사용했더니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뭘 했다고.’
그저 레이를 타고 천천히 걸은 것뿐인데. 엘레노어가 허탈하게 웃었다.
“괜찮은가?”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하인에게 말고삐를 넘긴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업혀.”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얌전히 그에게 업혔다. 민망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내외할 기력도 없었다.
엘레노어를 들어 올린 카이델이 흠칫했다. 너무 가벼웠다.
‘몸에 근육이 없는 것 같아. 먹는 건 다 어디로 가는 거지?’
말랑말랑하고 연하고 가벼운 몸. 그와는 전혀 다른 생명체인 것 같았다.
“운동 안 하지.”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뜨끔했다.
“조금 하는데…….”
“무슨 운동.”
“계단도 왔다 갔다 하고, 가끔 산책도 하고.”
숨도 쉬고.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카이델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려던 때였다. 엘레노어의 가느다란 팔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
그 순간 카이델의 몸이 바짝 긴장했다.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신기해하는 만큼, 엘레노어 역시 그가 신기했다. 사람 몸이 이렇게 단단할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
따뜻하고 넓고 단단했다.
너른 어깨에 뺨을 기댄 엘레노어가 코를 킁킁거렸다. 그에게서 깨끗한 비누 향기가 났다.
‘좋은 향기 난다. 방금 씻었나?’
그에게 가만히 업혀 있자니 이상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햇볕에 데워진 바위에 찰싹 붙은 불가사리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편해.’
하지만 엘레노어가 안정감에 만족하며 몸을 착 붙여올수록, 카이델은 조금씩 덜 편안해졌다.
“오늘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나 봐요. 노곤해요.”
엘레노어가 하품을 하며 그의 목덜미에 더운 숨을 내쉬었다. 카이델의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냥 밥도 안 먹고 푹 자고 싶다.”
“……먹고 자야지.”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이 셔츠 깃 사이로 파고들어 어깨를 간지럽혔다. 카이델이 주먹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착한 생각, 좋은 생각.’
뻐근함을 느낀 그가 슬쩍 몸을 뒤틀었다.
그쯤 되자 엘레노어도 카이델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거워서 그래요?”
카이델은 대답이 없었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어깨를 흔들흔들하며 재차 물었다.
“진짜 그래서 그래요?”
엘레노어의 말을 듣지 못한 카이델이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응.”
엘레노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팔을 살짝 꼬집어 주려는데, 단단한 팔은 꼬집히지도 않았다.
“씨이……. 그럼 내려놔요.”
카이델이 웃음을 터뜨리며 엘레노어를 고쳐 업었다.
“싫어.”
“무겁다면서요?”
“내가 언제?”
“방금!”
아, 아까 한 얘기가 그거였구나.
카이델이 피식 웃었다.
“안 무거워. 하나도.”
“거짓말.”
“진심이야.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무거워져야 할 것 같은데.”
카이델이 진지하게 던진 말에 엘레노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있는 동안이라도 많이 먹여야겠다.”
“저 완전 잘 먹는데.”
“운동도 시키고.”
“윽. 싫어.”
카이델이 웃음을 터뜨리자 온몸으로 가느다란 진동이 전해졌다. 엘레노어는 공작령으로 내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 엘레노어는 그저 즐거웠다. 고민도 없이, 걱정도 없이.
‘조금 더 오래 이렇게 있고 싶다.’
***
저녁에는 야외에서 바비큐를 했다.
“우와, 엄청 맛있어요!”
흥분한 루카스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아이들은 불이 화르륵 타오를 때마다 꺄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격한 반응에 힘을 얻은 주방장은 온갖 묘기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렇게 좋아?”
엘레노어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대답도 없었다. 엘레노어는 격렬한 놀이에 반쯤 풀어헤쳐진 시에나의 머리를 다시 꼼꼼히 땋아 주었다.
씻고 온 카이델이 자연스럽게 데미안의 옆자리에 앉았다. 데미안이 포크로 고기 한 조각을 찍어 카이델에게 건넸다.
‘이제는 제법 편해 보이네.’
엘레노어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느새 많이 가까워진 두 사람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식사가 끝나고, 카이델은 아이들과 정원을 한 바퀴 돌아주겠다며 먼저 일어섰다. 엘레노어가 제 앞의 그릇을 정리하려 하자, 하녀가 다가와 손사래를 쳤다.
“세상에. 저희가 할 테니 들어가서 쉬세요.”
“심심해서 그래요. 나르는 것까지만 거들게요.”
엘레노어가 익숙하게 그릇을 쌓아 들어 올렸다. 한두 번 해 본 손놀림이 아니라는 것을 다들 금세 알아차렸다.
자잘한 일을 거들던 엘레노어가 부엌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았다.
“카이델의 어린 시절 초상화를 봤어요.”
“참 귀여우셨지요. 그림보다 훨씬 예쁜 소년이셨답니다.”
유모가 빙긋이 웃으며 바느질감을 가져와 앉았다.
“언제부터 여기서 일하셨어요?”
“30년쯤 되었지요. 공작님이 태어나시기도 전부터 일했으니까요.”
엘레노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나이도 들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아요. 그래도 성에서 지내고 있는 건 공작님의 배려이지요.”
“따뜻하신 분이니까요.”
엘레노어의 말에 유모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공작님처럼 속정 깊은 분이 어디 또 있다고요.”
유모는 카이델의 어린 시절 일화들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엘레노어는 나무 의자를 흔들거리며 카이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유모와 엘레노어는 서로를 편안하게 느꼈다. 농담처럼 시작된 대화가 조금씩 조금씩 그 깊이를 더해갔다.
“데미안 도련님께서는 수도에서 태어나셔서 자주 뵙질 못했지요. 늘 조금 움츠러들어 계셔서 걱정했는데, 오늘 보니 많이 밝아지셨더군요.”
“카이델과도 많이 가까워졌어요. 요즘은 카이델이 직접 데미안의 잠자리를 살펴 준답니다.”
엘레노어의 말에 유모가 활짝 웃었다. 둘 사이 편안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유모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공작님과 나이가 같은 아들이 있었어요. 어릴 적엔 두 사람이 꽤 자주 어울려 놀기도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