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공작 성에서의 휴가는 생각보다 더 만족스러웠다. 엘레노어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그랬다.
“안녕하세요, 오를리 부인.”
“그냥 클라리스라 부르세요, 영애 님.”
“그럼 저도 그냥 엘레노어라 불러 주세요.”
성에는 어린 시절 카이델을 기른 유모가 여전히 살고 있었다. 푸근한 외모의 그녀는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세 아이를 돌보았다. 감탄이 나오는 육아 실력이었다.
덕분에 엘레노어는 마음 편하게 아이들을 맡기고 휴식에 집중할 수 있었다.
“승마하러 가시나 봐요.”
승마복 차림의 엘레노어를 보고 유모가 말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델이 승마를 가르쳐 주기로 해서요.”
카이델. 유모는 자연스럽게 공작의 이름을 부르는 엘레노어를 잠시 놀란 듯 바라보았다. 이름을 허락했다는 건, 공작이 마음에 품은 상대라는 뜻일 거다.
“최고의 스승에게 배우게 되시겠네요. 말타기는 어릴 적부터 공작님을 따라올 자가 없었지요.”
엘레노어가 눈을 반짝였다.
“카이델은 어린 시절에도 지금이랑 비슷했나요?”
“그런 면도 있고, 또 전혀 다른 면도 있었지요.”
“나중에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단단히 약속을 받아낸 엘레노어가 뛰는 듯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카이델과 약속한 시각보다 이미 조금 늦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가자 카이델이 주랑의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가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몸을 바로 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나도 방금 왔어.”
그렇다기엔 그의 뺨이 늦여름 볕에 살짝 익어 있었지만, 엘레노어는 그냥 모르는 척했다.
“이제 말 타러 가는 거예요?”
“아니.”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카이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분명 말 타는 거 가르쳐 주신댔잖아요?”
“처음엔 말과 친해져야지. 그게 먼저야.”
슬쩍 자리를 바꿔 엘레노어를 그늘 쪽으로 걷게 한 카이델이 대답했다.
두 사람이 커다란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에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구유를 청소하던 마구간 지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이구, 도련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군.”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를 알아보았는지 고개를 비벼오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 준 카이델이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 말이 좋겠어.”
아직 말이 조금 겁나는 엘레노어는 살짝 떨어진 자리에 서서 물었다.
“이름이 있나요?”
“레이. 순하고 똑똑한 녀석이야.”
그가 가까이 오라는 듯 엘레노어에게 손짓했다.
엘레노어가 다가서자 그가 엘레노어의 손을 가볍게 겹쳐 잡았다. 엘레노어의 어깻죽지에 순간 조금 힘이 들어갔다.
“여기를 쓰다듬어 주면 좋아해.”
엘레노어는 카이델에게 손을 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레이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낯설지만 기분 좋았다.
레이도 기분 좋은지 작게 푸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대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잠깐만.”
카이델이 마구간 지기에게서 당근을 얻어 돌아왔다.
“당근?”
“말들이 좋아하는 거야.”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당근을 건네자 레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받아먹었다. 와작와작. 만족스러운 얼굴로 당근을 씹는 모습이 신기했다.
엘레노어가 까르르 웃자 카이델도 슬며시 따라 웃었다. 그녀가 즐거워 보이니 그도 좋았다.
엘레노어는 말의 털을 빗질해 주고, 말이 놀라지 않게 곁에 다가서는 방법을 배웠다. 그 모든 게 약간은 어설펐지만, 순한 레이는 그런 엘레노어를 차분히 인내해 주었다.
“이거 꽤 힘드네요.”
엘레노어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하지. 꽤 친해져서 내일은 말에 오를 수 있겠어.”
“와, 좋아요.”
엘레노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레이. 내일 봐.”
말에게 인사를 건넨 두 사람이 마구간에서 나왔다. 흙과 지푸라기로 엉망이 되었지만 표정만은 둘 다 밝았다.
두 사람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실내로 들어섰다. 나란히 계단을 오르던 엘레노어의 시선이 벽 하나를 가득 메운 수많은 초상화에 향했다.
“이 중에 당신도 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카이델이 한 곳을 가리켰다.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푸하. 정말 당신이에요?”
엘레노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카이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그만 봐.”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눈앞에 커다란 손을 내밀어 시야를 차단했다. 엘레노어가 그의 손을 붙잡아 끌어내리며 말했다.
“귀여워서 그래요. 당신은 뭔가…… 태어날 때부터 어른 같았을 줄 알았는데.”
엘레노어가 그림 속 귀여운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웃었다. 뜯어보면 이목구비는 지금 그대로인데, 뺨이 통통해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것도 당신이네요!”
“……아니야.”
다음 초상화는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좀 더 순하긴 하지만, 이때부터는 지금의 얼굴이 선명했다.
“이건 몇 년 안 된 거죠?”
엘레노어가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세 번째 초상화를 가리켰다. 순간 숨을 멈추게 될 만큼 아름답고 정교한 그림이었다.
‘후세에 길이길이 남겨야 할 얼굴이다, 정말…….’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그린 것이었다.
그림과 카이델을 번갈아 보던 엘레노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역시 그림보다는 실물이 나아요. 세 배 정도.”
칭찬에 카이델의 얼굴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그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이분들은……?”
“내 부모님.”
카이델의 대답에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림 속에는 엄청난 미남 미녀가 있었다.
“당신은 아버지를 빼닮았네요. 데미안은 어머니 쪽을 더 닮은 것 같고.”
“맞아.”
“정말 아름다운 분이세요.”
엘레노어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나이스도 미모라면 엄청났지만, 카이델의 어머니를 따라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데미안은 없네요?”
엘레노어가 문득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보통 가주만 그리니까. 하지만 데미안의 초상화도 그리면 좋을 것 같군.”
화가를 불러야겠어.
카이델이 좋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공작 성에 머무는 동안 완성되기는 어렵겠죠?”
“아마.”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아쉬운 표정을 짓자, 카이델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안했다.
“그러니 꼭 다시 와. 그땐 데미안의 초상화도 여기 걸려 있을 테니까.”
***
크고 오래된 성은 아이들이 놀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발이 아플 때까지 성안을 발발거리고 다녔다.
“계단 엄청 많다.”
“방도 많고.”
낮은 건물이 넓게 펼쳐진 황궁과 달리, 성은 높고 뾰족하게 솟아 있어 루카스에게도 신기하기만 했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시에나가 제안했다.
“숨바꼭질할래?”
데미안과 루카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가위바위보 한 결과 데미안이 술래가 되었다.
“100만큼 세고 찾아야 해. 숫자 빠뜨리기 없기야.”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실내에서만 숨는 거다?”
“알았어.”
데미안이 눈을 꼭 감고 숫자 100을 세기 시작했다.
“100, 99, 98…….”
시에나와 루카스가 이 방 저 방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성에는 숨을 곳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딜 숨어야 잘 숨었다고 소문이 날까.’
숨을 만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 오히려 고르기가 어려웠다. 거의 100초가 다 지난 듯한 느낌에, 시에나가 급히 테이블보를 들추고 그 아래 몸을 숨겼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런데 루카스가 그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너는 왜 하필 여기로 오는데?”
시에나를 발견한 루카스가 눈썹을 팍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먼저 왔어. 딴 데 가서 숨어!”
“쉿! 그럴 시간 없어. 조용히 해.”
시에나가 루카스의 입을 확 틀어막으며 말했다. 시에나의 얼굴이 훅 가까워지자 루카스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어디 있지?”
그때 문밖에서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보로 가려진 좁은 공간, 두 아이는 바싹 붙어 앉아 숨을 죽였다. 그때 문이 삐걱, 열렸다.
“이 방에도 없는 것 같고…….”
데미안의 발걸음이 저벅저벅, 가까워졌다.
두근두근.
시에나와 루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두 아이가 숨은 곳 가까이 다가온 데미안이 흠, 하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셔츠가 작게 바스락대는 소리까지 들리는 거리였다.
“어디 숨었을까?”
이내 데미안이 빙글 돌아서 방을 나갔다. 시에나와 루카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흐아아…….”
“들킬 뻔했다.”
“완전 가까웠지.”
“응. 난 바로 들키는 줄 알았어.”
바닥에 쪼그려 누운 두 아이가 작게 키득거렸다. 좁고 아늑하니 아지트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긴장이 훅 풀리니 몸이 노곤해졌다.
하암.
루카스가 크게 하품을 했다. 하품은 전염되는 법, 시에나도 따라서 입을 톡톡 두드렸다.
‘자면 안 되는데…….’
어둑하고 따뜻한 공간, 두 아이는 사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술래가 된 지 15분이 지났다.
데미안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아무리 뒤져도 두 사람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못 찾겠어. 시에나, 루카스 이제 나와!”
데미안의 말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데미안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이 방 저 방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숨바꼭질 이제 재미없어. 나와서 다른 거 해.”
방이 많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 데미안의 이마에 삐질삐질 땀이 솟았다.
“데미, 뭐해?”
그때 계단을 오르던 엘레노어와 카이델과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을 보자 데미안은 갑자기 서러움이 훅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른 애들은 다 어디 있어?”
“으아앙!”
데미안이 울음을 터뜨리며 엘레노어를 끌어안았다. 당황한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슨 일이야, 데미. 왜 울어? 응?”
“숨바꼭질을 했는데, 애들을 못 찾겠어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에게 눈짓했다.
“내가 찾아보지.”
그가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엘레노어는 데미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말했다.
“같이 찾아보자. 셋이서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성안에 루카스와 시에나의 이름이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이들이 다칠 만한 물건이 있는 방은 전부 잠겨 있었다지만, 찾아도 나타나지 않으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엘레노어는 수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구슬땀을 흘렸다.
“이 녀석들, 어디서 곯아떨어진 거 아냐?”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맞아. 그러고 있더군.”
그때 등 뒤에서 카이델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