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클로에가 백작저를 나갔다. 값비싼 도자기를 깨뜨렸다는 이유였다.
엘레노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상을 살았다. 평소처럼 생글생글 잘 웃고 농담도 곧잘 했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가슴에는 아무도 모르는 상처가 남았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상처는 지독히도 쓰라렸다.
“손목이 더 가늘어졌어.”
정산서를 꼼꼼히 살피는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보던 아드리안이 말했다.
사실이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요즘은 뭘 먹어도 살이 쭉쭉 빠지고만 있었다.
엘레노어가 반갑다는 듯 방긋 웃으며 물었다.
“진짜? 진짜 살 빠진 것 같아?”
“응. 너 또 살 뺀다고 굶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럼 혼난다, 진짜.”
아드리안이 눈썹 끝을 슥 치켜세웠다. 엘레노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엘레노어는 주변에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라면 훤히 꿰고 있는 아드리안도 모르고 지나칠 정도였으니, 꽤나 감쪽같은 연기였다.
클로에가 저지른 일을 밝히는 것이 곤란하기도 했고,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은 터져나갈 듯 복잡했지만 시간은 잘 갔다. 평소보다 더위가 주춤했던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
“영지에 내려가신다고요?”
엘레노어는 현관에서 카이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이델은 엘레노어에게 한동안 영지에 내려가 봐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응, 한 달 정도.”
“한 달…….”
한 달이라.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워낙 자주 보던 사람이라 그런지 조금 서운하게 느껴졌다.
“데미안은요?”
“그러잖아도 그 때문에 의논하고 싶었어.”
카이델이 턱을 슬쩍 문지르며 말했다.
“데미안도 데려갈까 해. 전의 일도 있고, 아직 데미안을 혼자 두기에는 신경이 쓰여.”
“아무래도 한 달은 좀 그렇죠.”
엘레노어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제 시험이 제법 가까웠잖아. 한 달 정도 수업을 하지 못해도 괜찮을까?”
엘레노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데미안의 합격이야 따 놓은 당상이었다. 수석이냐 차석이냐, 그것이 문제일 뿐.
“괜찮을 거예요. 데미안은 워낙 준비가 잘 되어 있어서. 교재는 공작령으로 보내드리면 되니까, 혼자서 공부하는 것도 문제없고요.”
엘레노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도 건넸는데, 카이델은 어쩐지 엘레노어의 앞에서 비켜설 기미가 없어 보였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엘레노어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카이델이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같이 갈래?”
예상하지 못한 말에 엘레노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공작령에요?”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승마를 가르쳐 주기로 했었지. 승마에 그만한 곳은 없어.”
“승마…….”
카이델의 첫 체술 수업, 그가 약속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던져 본 말인 줄 알았는데, 그가 지금껏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카이델이 얼른 덧붙였다.
“이맘때 영지가 가장 아름답기도 하고. 그대에게 보여 주고 싶은 숲이 있어. 같이 걸으면 기쁠 것 같아.”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물었다.
“이거, 데이트 신청인가요?”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뺨에 희미한 홍조가 감돌았다.
“그래, 데이트 신청 맞아.”
엘레노어가 픽 웃었다. 생각해보면 그가 정식으로 데이트를 신청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첫 데이트 신청이 장거리 여행이라니……. 너무 과감한 거 아니에요?”
엘레노어의 지적에 카이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미세한 변화에서 엘레노어는 당황을 읽어냈다.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엉큼하다고 해야 하나…….”
카이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곧바로 부인했다.
“맹세코 그런…… 뜻으로 제안한 건 아니었다. 그저 좀 쉬게 해 주고 싶었어.”
엘레노어가 결국 소리 내 웃고 말았다.
그는 생긴 것과 달리 은근히 순진한 데가 있었다. 아드리안과 이즈멜이 여우에 가깝다면 카이델은 곰에 가까웠다. 놀릴 맛이 났다.
엘레노어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카이델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그가 입술을 꾹 깨물며 엘레노어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엘레노어.”
“당신도 당신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요즘 본 것 중에 제일 재미있었어요.
엘레노어가 눈매에 맺힌 눈물을 슥 훔쳐내며 말했다.
“소원권, 지금 쓰지.”
“소원권이요?”
“너무 어려운 일이라 안 된다 할 생각인가?”
카이델이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좋아요. 공작령에서 늦은 휴가를 보내게 되겠네요.”
엘레노어가 흔쾌히 수락했다. 카이델의 얼굴이 태양처럼 환해졌다.
엘레노어는 그가 소원권을 쓰지 않았어도 초대에 응했으리라는 사실은 혼자만의 비밀로 남겨 두었다.
그러잖아도 신선한 바람이 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복잡한 생각도 정리하고, 한숨 돌릴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카이델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힘주어 말했다.
“그대도 분명 그곳이 마음에 들 거야. 장담하지.”
***
분명 처음의 계획은 휴가였다. 일주일 정도 방학을 하고, 공기 좋은 곳에 요양하러 내려가 조용히 심신을 정돈하려 했다.
그런데…….
“와! 무지개다!”
“어디 어디? 나도 볼래!”
“얘들아, 마차가 달릴 땐 자리에 잘 앉아 있어야지. 넘어지면 크게 다쳐.”
왜 체험학습이 되어 버렸을까.
일주일간 공작령에서 휴가를 즐길 생각이라는 말에, 아드리안과 이즈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워서 말이다.
“그래. 대신 루크도 같이 가.”
“좋아. 대신 에나도 데려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애초에 말로 두 사람을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아이들이 데미안을 너무너무 보고 싶어 한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엘레노어는 반쯤 해탈의 경지에 올라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이제는 루카스와 시에나가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수도를 벗어나자 창밖의 풍경은 곧바로 달라졌다. 푸른 밀밭이 드넓게 펼쳐진 풍경은 보기만 해도 속이 탁 트였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이제 두 시간 정도 남았어. 좀 자고 있어. 다 와 가면 깨워 줄게.”
자기 싫다며 뻐기던 루카스도 어느 순간 쌔근쌔근 잠이 들고, 시에나도 엘레노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을 청했다.
엘레노어는 보드라운 분홍빛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정표가 따로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 ‘아, 여기가 공작령이구나’하는 느낌이 왔다.
울퉁불퉁하던 길이 평탄해졌다. 고즈넉하면서도 잘 정돈된 길에서 어쩐지 카이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으응, 아직도 멀었어요?”
그때 슬며시 눈을 뜬 시에나가 무릎에 뺨을 비비적대며 물었다. 엘레노어가 웃으며 그런 시에나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아. 일어나도 돼.”
엘레노어는 시에나와 루카스를 깨워 눈곱을 떼고 입가를 닦아 주었다. 아이들이라 그런지 자고 일어나 부은 얼굴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성이다!”
그때 루카스가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성?”
엘레노어가 루카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루카스의 말이 맞았다. 언덕 위에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성이 우뚝 서 있었다.
“저기가 공작 성인가 보다…….”
엘레노어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시에나도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차는 언덕을 올라 공작 성의 첫 관문을 통과했다.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리는 광경은 그 자체로 웅장한 볼거리가 되었다.
“벨리움이라는 국가가 세워지기 전,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 기억하니? 그중 한 나라의 왕궁으로 쓰이던 곳이래.”
엘레노어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루카스와 시에나에게 역사 수업을 시전했다. 자연스럽게 파고든 수업에 아이들은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움 수도를 방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군사 요새이기도 하지.”
생각해 보면 루카스와 시에나를 데려오길 잘한 것 같았다. 역사적 유적지에 직접 방문해 보면 책으로만 접하는 것보다 훨씬 생생하게 와닿는 법이니 말이다.
엘레노어는 마차가 멈추어 설 때까지 역사 수업을 쭉 이어 갔다. 루카스와 시에나의 눈이 반짝반짝 총기 있게 빛났다.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마차 문이 열리고, 공작 성의 사용인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에버렛 영애, 안녕하십니까. 공작 성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노집사가 엘레노어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엘레노어가 그의 팔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루카스 황자님, 시에나님도 반갑습니다. 저는 성을 관리하는 로베르토 메카인입니다.”
“안녕하세요.”
“안에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데미안 도련님은 기다리고 계시고, 각하께서는 최대한 빨리 오시겠다 하셨습니다.”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말에 루카스와 시에나가 짤깍짤깍 손뼉을 쳤다. 먼 길을 오느라 시장하던 차였다.
엘레노어와 아이들은 로베르토의 뒤를 따라 성으로 들어갔다.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인 만큼 군데군데에서 세월이 느껴졌지만, 전체적으로 무척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성이 정말 근사하네요.”
엘레노어의 칭찬에 로베르토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노집사는 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그 자체로 역사적인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곳이지요. 며칠 지내시다 보면 분명 이곳과 사랑에 빠지실 겁니다.”
“이미 빠진 것 같은걸요.”
엘레노어의 말에 로베르토가 껄껄 웃었다.
“데미!”
“우리 왔다!”
맛있는 냄새를 따라 정찬실로 들어서자 환한 표정의 데미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크, 에나.”
루카스와 시에나가 달려가 데미안을 덥석 끌어안았다. 겨우 2주 보지 못한 것뿐인데, 2년은 보지 못했던 것처럼 감격스러운 상봉이었다.
데미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준 엘레노어가 자리에 앉았다. 습관처럼 아이들의 식사부터 챙겨 주려는데, 하녀들이 다가와 아이들의 곁에 섰다.
“저희가 거들 테니 영애께서는 편안히 식사를 즐기시면 됩니다.”
……최곤데?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본격적인 식사 시중을 받아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휴가 내내 아이들의 뒤꽁무니만 쫓아야 하는 게 아닐까 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힐링과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에 있는 공작저에서 먹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색다른 풍미가 있는 요리들이 끝없이 나왔다. 엘레노어가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던 때, 카이델이 나타났다.
“엘레노어.”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그가 엘레노어의 옆에 다가와 섰다.
“식사는 괜찮았나?”
“네, 정말 맛있었어요.”
“지낼 곳은 불편하지 않고?”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방을 보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분명 멋지겠죠. 평생 여기서 살고 싶을 정도로 근사한 성인데요.”
“평생 살아.”
카이델의 눈이 슬쩍 휘었다. 그가 아이들에게 그랬듯 엘레노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바라는 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