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엘레노어는 먼저 제 방에 한 번이라도 방문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종이에 쭉 적어 내려갔다. 정황상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하녀들, 집사, 아드리안, 저번에 잠시 왔던 카이델과 힐데가르트…….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리고 누구 하나 의심스럽지 않았다.
“아, 정말 말도 안 돼.”
쭉 적힌 목록들을 본 엘레노어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책상에 엎드렸다. 멘탈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모두 엘레노어를 아끼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이미 엘레노어의 마음속에 의심의 씨가 뿌려졌다는 것이었다.
“이럴수록 누구의 일인지 더 명백히 밝혀 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모두를 의심해야 할 테니까.”
엘레노어는 우선 부모님과 드와이트의 이름 위에 줄을 죽 그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다음으로는 아드리안의 이름을 지웠다. 그와는 사업에서 한배를 탄 사이였다. 그가 아이디어를 다른 곳에 흘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이델과 힐데가르트의 이름을 지웠다. 두 사람이 방문한 것은 엘레노어가 사업 계획서를 쓰기 이전의 일이었으니까.
그러고 나니 목록에는 사용인들 열 명 정도의 이름이 남았다. 전부 오래 보아 가족 같고 친구 같은 사람들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덫을 놓자.’
만일 누군가 바깥으로 엘레노어의 정보를 빼돌리고 있다면, 이번에도 슬그머니 손을 뻗칠 가능성이 컸다. 보통 그런 행동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으니 말이다.
엘레노어는 상단에서 검토했지만, 사업성이 부족하다고 판가름 난 아이디어를 이용해 그럴싸한 기획안을 만들어 냈다. 듣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는 계획이었다.
“요즘 좀 바빠 보이는구나, 엘렌.”
“네, 이제 곧 아이들도 아카데미로 갈 테고……. 쓸 만한 아이템이 없는지 찾아보고 있어요.”
“요 며칠 얼굴이 눈에 띄게 해쓱해졌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하거라. 응?”
그다음 단계는 은근히 말을 흘리는 것이었다. 사용인들이 많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엘레노어는 일부러 사업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엘레노어는 주변을 비밀스럽게 살폈지만,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엘레노어는 일부러 책상 위를 너저분하게 만들었다. 무엇 하나가 사라져도 티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덫을 놓은 지 이틀. 아무런 소득이 없자 엘레노어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나……?’
달리아는 주변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어쩌면 외부인의 소행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애초에 달리아가 경고한 것이 이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엘레노어의 확신이 조금씩 무너지던 그때, 누군가 덫을 밟았다.
“……클로에.”
어둑한 저녁의 복도. 벽에 기대 서 있던 엘레노어는 제 방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온 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범인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엘레노어는 내내 생각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까? 배신감에 치가 떨릴까?
하지만 막상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맞닥뜨리니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엘레노어가 허무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가씨.”
덜덜 떨리는 클로에의 손안에서 종이가 바스락댔다.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주어 쥔 주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엘레노어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해야겠구나.”
***
방으로 들어선 엘레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기가 힘이 들었다.
송장처럼 창백해진 클로에가 그런 엘레노어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떠는지,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일어나라고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은 그런 말을 꺼낼 기력도 없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엘레노어가 입을 열었다.
제일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왜 그랬니.”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따뜻하지 않지만, 차갑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클로에의 두 눈에서 후드득,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돈이, 돈이 필요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클로에는 엉엉 울며 바닥에 엎드러져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엘레노어는 그런 클로에의 변명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아버지의 빚, 사채, 가장의 무게.
클로에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엘레노어는 그런 것들을 잘 알았다.
엘레노어는 귀족 가문의 사랑받는 아가씨로 곱게만 자랐다지만, 전생에서 여진은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며 컸다. 고생담을 글로 쓰면 장편 소설 한 권 분량은 족히 나올 만큼.
“발을 빼려고 했는데 그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어요. 너무 무서워서 그만둘 수 없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가씨.”
“죄송하다고…….”
그래서 엘레노어는 클로에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녀가 저지른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함께한 시간이 5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매일매일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그렇게 쌓아온 믿음이 한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팔짱을 낀 채 한동안 마음을 정리하던 엘레노어가 불쑥 물었다.
“필요한 돈은, 다 마련했고?”
엘레노어의 말에 클로에는 당황한 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라,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해.”
“아, 아직 조금…….”
엘레노어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클로에가 움찔하며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엘레노어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짧게 명령했다.
“일어나, 클로에.”
클로에가 저린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무릎이 덜덜 떨려왔다.
‘뺨을 내리치시려는 거겠지.’
엘레노어의 앞에 마주 선 클로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기다려도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클로에가 슬며시 실눈을 떴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눈은 왜 감은 거니?”
클로에가 어버버 하는 사이, 엘레노어는 클로에에게 종이 몇 장을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클로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훔치려던 기획안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클로에가 빠뜨린 몇 장까지, 엘레노어는 그녀의 손에 야무지게 쥐여 주었다.
“가져다주고 돈을 받아.”
“아가씨……?”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고 전해. 몇 주를 이 일에만 골몰했다고.”
엘레노어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 올렸다. 실패가 보장된 사업이었다. 이왕이면 큰돈을 투자했으면 했다.
이젠트 공작가가 아무리 부유하다 한들, 사업에 실패하면 아예 타격이 없기는 힘들었다. 뫼젠어 교재도 변변찮은 판매고를 올리는 중이니, 아나이스는 아마 속이 끓고 있을 터였다.
‘한번 대차게 말아먹어 봐라.’
엘레노어의 속마음을 까맣게 모르는 클로에는 기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이번에 돈을 받으면, 빚은 대충 다 갚을 수 있는 거니?”
엘레노어는 클로에가 내미는 종이를 무시하며 물었다. 입술을 꾹 깨문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받아.”
“그럴 수는…….”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널 고용한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고 약속한 돈을 받도록 해. 아까 했던 말도 진심이야.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그대로 전하렴.”
엘레노어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전해야 할 말들을 상기해 주었다.
클로에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종이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이리저리 튀었다.
“다른 하녀들에게는 알리지 않을 거야.”
엘레노어의 말에 클로에가 한 줄기 희망을 본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요,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아니.”
엘레노어가 단단히 팔짱을 끼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클로에를 아꼈고, 그녀가 처한 상황은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클로에는 엘레노어를 단단하게 지탱해 오던 믿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소중한 사람들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널 내 곁에 계속 둘 수는 없어. 더는 클로에 너를 믿을 수 없으니까.”
엘레노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클로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주일 뒤에 적당한 빌미를 만들어 널 내보낼 거야.”
“아가씨, 제발…….”
클로에가 다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창백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이 일을 지시한 자가 말이 밖으로 새나갈까 봐 걱정되어서라도 너를 고용하겠지. 내내 입단속을 당하며 살겠지만, 그건 네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엘레노어가 책망하는 시선을 던졌다. 클로에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래, 전부 제가 자초한 일이었다.
엘레노어가 서랍 속의 금고를 열었다. 엘레노어는 작은 주머니에 반년치 임금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담아 클로에에게 내밀었다.
“퇴직금이야.”
클로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건을 훔쳐 쫓겨나는데 퇴직금이라니. 말도 안 되는 호의였다.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받을 수 없어요.”
“네가 예뻐서 주는 돈이 아니야. 네가 일해서 번 돈이니까 그냥 받아.”
엘레노어가 차갑게 대꾸하며 클로에의 손에 주머니를 꼭 쥐여 주었다.
괘씸하고 밉지만, 클로에가 그동안 열심히 일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엘레노어는 그 시간까지 전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빚 갚는 데 쓰지 마. 따로 잘 모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너를 위해서 썼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주 조금은, 전생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측은하기도 했다.
“너를 위해 쓸 수 있는 주머니 하나쯤은 따로 만들어 둬. 네 인생을 전부 희생하려 하지는 말라는 뜻이야.”
엘레노어는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클로에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엘레노어가 클로에를 지나쳐 방문 쪽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암울했던 전생을 떠올리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슴에 바윗덩어리가 얹혀 있는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문고리를 붙잡았던 엘레노어가 천천히 돌아섰다.
“클로에.”
클로에가 고개를 들어 엘레노어와 눈을 맞췄다. 잠시 말없이 클로에를 바라보던 엘레노어가 입술을 뗐다.
“내게 찾아와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난 망설임 없이 너를 도왔을 거야.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엘레노어 아가씨…….”
내내 무표정에 가깝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꾹 참고 있었던 것들이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엘레노어가 물었다.
“정말 그 생각은 못 한 거니?”
엘레노어가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클로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이나 눈물을 쏟았다.
후회란 늘 때늦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