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역시 잘 어울리네요. 입고 와 줘서 기뻐요.”
알현실로 엘레노어가 들어서자마자 황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길게 이어지는 축하 행렬에 지쳐 있던 중 반가운 얼굴이었다.
황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후의 선물로 반짝반짝 치장한 엘레노어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딸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엘레노어가 손에 꼭 쥐고 온 선물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탄신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고마워요, 엘레노어.”
상자를 열어 본 황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투명한 유리로 된 다기에는 독특한 푸른색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황후의 친정이 있는 영지 특유의 문양이었다.
“세상에…….”
나이가 드니 어릴 적 고향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눈치라도 챈 것 같은 선물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딱 알맞은 물건이기도 했다.
“오늘 받은 선물 중 가장 마음에 들어요. 어떻게 이런 선물을 준비할 생각을 다 했어요?”
아드님이 가르쳐 주셔서요…….
엘레노어는 솔직한 답을 꼴깍 삼키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황후가 제 옆자리를 두드려 앉기를 권했다. 엘레노어가 앉자마자 황후가 물었다.
“이즈멜이 파트너 신청을 했다지요?”
“네, 그게…….”
“입장까지는 한참 기다려야 할 거예요. 여기서 나와 있다가 나중에 나가요.”
황후가 엘레노어의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황후의 옆자리에 앉아 사람들과 황후가 인사를 나누는 걸 지켜보고 있으니 등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솟는 느낌이었다.
불편해! 불편하다고!
“아나이스 로베르 이젠트 공작 영애 드십니다.”
그때 문 앞에 서 있던 시녀가 공녀의 도착을 알렸다.
“폐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어서 와요, 아나이스.”
아나이스는 황후의 곁에 앉은 엘레노어를 보고 흠칫했지만, 이내 떨떠름한 표정을 지워 내고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늘 그렇듯 천사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엘레노어조차 잠시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말이다.
“엘레노어 양과 함께 계셨군요.”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가요?”
“그럼요. 제가 주최한 티파티에도 와 주셨답니다. 그렇지요?”
아나이스가 엘레노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선량하고 친근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엘레노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랬죠.”
아나이스가 황후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엘레노어는 그런 사교 자리를 좀 불편해하는 것 같더라고요. 낯을 조금 가리나 봐요.”
“어머, 그래요?”
황후가 엘레노어를 바라보며 의외라는 듯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아나이스가 얼른 덧붙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엘레노어. 제가 많이 도와드릴게요.”
“그래요. 사교계에서 아나이스보다 더 좋은 멘토는 없지요. 제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잘 지내는 걸 보니 마음이 기쁘네요.”
황후가 엘레노어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쳤다.
“그럼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폐하.”
“고마워요.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라요.”
아나이스가 등을 돌리는 순간, 엘레노어와 그녀 사이 짧은 시선이 오갔다.
엘레노어는 그 시선에서 싸늘함을 느꼈다. 이제는 그것이 혼자만의 오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
그때 커튼 뒤에서 이즈멜이 걸어 나왔다.
“오, 이즈멜.”
“생신 축하드립니다, 어머니.”
이즈멜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황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황후는 흐뭇한 얼굴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반짝거리는 아들의 모습을 훑었다.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에버렛 영애, 나갈까요?”
“네!”
내내 어색하게 앉아 있던 엘레노어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이즈멜의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적극적인 반응에 이즈멜이 움찔했다.
그의 눈이 순간 조금 커졌다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출구 쪽으로 부드럽게 에스코트했다.
그런 둘을 유심히 지켜보던 황후가 말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줄은 몰랐네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아요.”
“그렇습니까?”
이즈멜이 빙글빙글 웃으며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제법 잘 어울리나 봅니다, 영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뿐이었다면 실수인 척 발이라도 한 번 꾹 밟고 눈에 힘이라도 팍 주었을 텐데.
엘레노어는 이즈멜을 올려다보며 상큼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빼닮으셔서 워낙 미모가 출중하시잖아요. 어떤 영애의 곁에 서신대도 분명 그림 같으실 거랍니다.”
엘레노어의 습관성 철벽에 튕겨 나간 이즈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하여튼 말랑말랑하다가도 은근히 칼 같은 데가 있었다.
이즈멜과 엘레노어는 천천히 발맞춰 계단을 내려갔다.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딱 지켜보고 있다.’
이즈멜의 팔짱을 낀 손을 뚫어져라 보던 아드리안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얼굴에 불만이 그득그득했다.
엘레노어가 눈썹을 으쓱해 보이며 플로어로 내려와 섰다. 엘레노어가 속닥속닥 농담을 건넸다.
“오랜만에 발등 밟힐 준비 되셨어요?”
이즈멜이 소리 내 웃었다. 그가 엘레노어의 등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그야 늘 준비되어 있지.”
당당한 선전포고와 달리, 엘레노어는 별다른 실수 없이 처음 두 곡을 끝마쳤다. 아무래도 정말 춤 실력이 는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크게 실수하지 않고 춤을 마무리한 엘레노어가 환하게 웃었다.
“잘했어.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군.”
“열심히 배운 보람이 있네요.”
가볍게 인사한 엘레노어가 이즈멜에게서 물러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카이델과 아드리안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엘레노어.”
“엘렌.”
이즈멜이 곧바로 엘레노어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다들 단념해. 오늘 하루는 오로지 내 파트너일 테니까.”
카이델의 미간에 설핏 구김이 갔다. 그가 까칠하게 항의했다.
“지난번에 제 파트너로 왔을 때는 전하께서도 춤을 신청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드리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도 엘레노어는 내 파트너여야 했어.”
힐데가르트, 그 망아지 같은 여자만 아니었어도.
이즈멜의 반박에 카이델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긍은 갔다.
“엘렌, 목마르지 않아? 잠시 쉬지 그래.”
그때 아드리안이 재빨리 노선을 바꾸어 엘레노어를 공략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쉬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엘레노어의 말에 이즈멜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거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안 되지!’
아드리안이 테이블을 가리키며 경쾌하게 말했다.
“가서 앉아 있어. 마실 것 가져다줄게.”
카이델과 이즈멜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엘레노어가 사뿐사뿐 자리를 벗어났다. 엘레노어가 쉬고 싶다는데 거기다 말을 얹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즈멜이 못마땅한 눈으로 아드리안을 위아래로 훑었다.
“오늘 일은 기억해 두지, 소후작.”
“기억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아드리안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약이 오른 이즈멜이 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며 자랑했다.
“엘레노어가 선물해 준 거야.”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어 섬세한 나비 자수를 구경하던 카이델이 감탄했다.
“엘레노어가 자수를…….”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케이크도 보셨으면서 아직도 엘렌에 대해 그렇게 모르십니까? 산 겁니다.”
“직접 고른 거라고, 직접.”
이즈멜이 ‘직접’을 강조하며 카이델의 손에서 손수건을 홱 빼앗아 갔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아드리안이 재킷 소매를 슬쩍 걷어 커프스단추를 보여 주었다.
“저도 엘레노어에게서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즈멜과 카이델의 시선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향했다. 엘레노어의 눈처럼 선명한 녹색이었다.
“너무 소중해서 그냥 모셔만 두려고 했는데…….”
아드리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도록 평생, 선물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평생.
카이델과 이즈멜의 가슴에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하나씩 쾅, 떨어졌다.
단 두 글자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카이델과 이즈멜은 황망한 눈빛으로 아드리안의 손목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이 슥 소매를 바로 하고 팔을 내렸다.
“공작 각하께서는 선물, 받지 못하셨습니까? 얼마 전에 생일이셨는데요.”
아드리안의 얼굴에 얄미운 미소가 떠올랐다.
“소원권.”
카이델이 작게 답했다.
(너무 어려운 건 안 되는) 소원권만큼 좋은 선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즈멜과 아드리안이 가슴을 내밀며 뻐기니 조금 시무룩해졌다.
“좋은 것 받았네.”
이즈멜이 픽 웃으며 말했다.
“나도 두 번이나 받아 봐서 알지. 그거 정말 좋아.”
“신중하게 쓰십시오.”
아드리안이 놀리듯 덧붙였다.
“저는 평생 받겠지만, 각하께는 딱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그때 누군가 카이델의 축 처진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혹시 엘레노어일까?
기대에 부풀어 돌아선 카이델이 급속도로 무표정해졌다.
이젠트 공녀, 그러니까 아나이스였다.
“안녕하세요, 카이델.”
“발렌타인 공작이라 정확히 불러 주길 바라. 이젠트 공녀.”
카이델이 딱딱한 표정으로 선을 그었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어머, 서운하게. 우리 꽤 오래 알고 지내지 않았나요? 예전에는 제 이름을 부르셨던 것 같은데.”
“어릴 때의 일이지. 지금은 가문을 이어받은 수장이 되었으니 이야기가 다르다.”
카이델이 아나이스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이만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신호였다.
‘이 남자가 오늘따라 왜 이래?’
아나이스의 이마에 빠직 핏줄이 섰다. 평소에도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탐탁잖은 티를 낸 적은 없었다. 눈빛도 어딘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것이,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아나이스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코끝이 붉어지며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두 눈이 촉촉해졌다.
“죄송합니다, 각하. 반가운 마음에…….”
아나이스는 늘 시선을 몰고 다니는 여자였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그래요. 다음 곡은 저와 함께 추지 않으시겠어요?”
아나이스가 카이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기저기서 숨을 급하게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특종이었다. 제국 최고의 미녀와 제국 최고 미남의 만남이라니.
지금껏 숱한 남자들이 교제를 청했지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던 그녀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나이스의 미모는 옆 나라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먼저 춤을 청한 것이다.
“한 곡이면 돼요. 잠깐이잖아요.”
아나이스의 매끄러운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토독, 굴러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