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드와이트와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작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드리안이 비즈니스 상황에서 유용한 문장들을 만들면 카이델과 드와이트가 그것을 반씩 나누어 번역하고 서로 바꾸어 검수했다.
인쇄소와는 이미 손발을 잘 맞춰 두었기에 그 과정 역시 매끄러웠다.
<비즈니스 뫼젠어 100>.
휘리릭, 아주 얇은 소책자 한 권이 만들어졌다.
상인들의 니즈를 정확히 반영한 책은 꽤 큰 호응을 얻었다. 뫼젠이라는 기회의 땅을 노리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권씩 가지고 있는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제법 쏠쏠한 흑자에 만족하던 중, 엘레노어를 펄쩍 뛰게 하는 소식이 들려왔다.
“10000부?”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그걸 그만큼이나 필요로 해?”
“더 신기한 게 뭔지 알아?”
“뭔데?”
“뫼젠에서 들어온 주문이라는 거야.”
아드리안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엘레노어가 멍한 눈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이 무슨 남극에서 선풍기 장사하는 소리람…….
세상에서 이 교재가 제일 필요 없는 곳을 꼽는다면 뫼젠일 터였다. 그런데 10000부라니.
벨리움에서 팔려나간 것을 전부 더해도 그만큼이 되지 않는데 말이다.
“어쨌든 잘된 일이지. 알 수 없는 행운이 따랐으니.”
“응, 잘된 건 좋은데……. 대체 어떤 사람이 그걸 필요로 하는 건지 궁금하다.”
엘레노어의 호기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되었다.
***
「엘레노어에게
안녕. 요즘도 여전히 바쁘게 지내니?
카이델에게서 소식 전해 들었어. 네가 기획한 소책자 작업을 돕고 있다고 하더라. 드와이트랑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추천사라도 써 줄 수 있었는데.
아무튼, 나오면 꼭 사서 볼게. 맛있는 거 사 먹어.
힐데가.」
***
「힐데에게.
안녕하세요, 힐데. 잘 지내셨어요?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동했어요.
아니, 그래도 10000부를 사시다니요. 대체 그걸 다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세요.
드와이트도 무척 놀란 기색이었어요. 제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을 만큼 멍하니 넋이 나가 있었답니다.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아드리안이 맛있는 거 사 주겠대요.
엘레노어 드림.」
***
「엘레노어에게.
돈 많은 친구 뒀다 어디 쓸래? 이럴 때 쓰는 거지.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게는 의미가 큰 소비였단다.
문득문득 그리워질 때마다 펼쳐 보고 있거든.
10000권을 모두 펼쳐 보기 전에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돈이 차고 넘친단다. 부담 느끼지 마.
아, 카이델한테도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해. 그 애도 네 덕분에 용돈을 번 셈이니까.
힐데가.」
***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안아 든 에밀리가 엘레노어를 향해 걸어왔다.
“아가씨, 꽃다발이 또 왔어요.”
엘레노어는 약간 질린 표정으로 탐스러운 장미를 살폈다.
“또? 이번엔 어디서 온 건데?”
“블레이크 후작가요.”
“후, 일단 화병에 꽂아 줄래? 침실에 두면 되겠다.”
“네, 그럴게요.”
에밀리가 사라지자마자 마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건 황실에서 온 거예요.”
“그건 또 뭔데?”
“과일바구니요. 저는 살면서 이런 과일은 처음 봤어요.”
이제는 과일까지?
엘레노어가 바구니 안을 가득 채운 온갖 과일들을 슬쩍 들여다보고는 부탁했다.
“부엌에 가져다 둘래? 다들 먹을 수 있게.”
요 며칠 백작저의 사용인들은 끊임없이 들어오는 선물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궁과 발렌타인 공작가, 블레이크 후작가에서 보내온 것들이었다.
세 남자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은 곧 있을 황후의 생일 연회 때문이었다.
누가 엘레노어의 파트너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세 사람은 엘레노어의 선택을 받기 위해 온갖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누군가 꽃다발을 보내면 다음 사람은 더 큰 꽃다발을, 또 그다음 사람은 그보다도 큰 꽃다발을 보내오는 식이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엘레노어에게 돌아오는 선물은 점점 크고 화려해졌다. 처음에는 어부지리를 얻는 심정으로 지켜보던 엘레노어가 나서서 뜯어말려야 할 정도였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앞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턱 내려놓았다.
“이런 건 못 받아요.”
“거기서는 이게 제일 귀한 거라고 했는데…….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로 바꿔오지.”
“그게 아니라, 너무 귀한 거라 못 받는 거예요.”
카이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엘레노어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기준에서 이 정도는 전혀 무리하지 않은 선물인 것이다.
“이렇게 비싼 선물을 아무 이유 없이 받을 수는 없어요.”
“선물은 원래 이유 없이 주는 것 아닌가? 바라는 대가가 있으면 뇌물이지.”
카이델이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그건…… 그렇지만요.”
궁지에 몰린 엘레노어가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카이델이 목걸이 케이스를 다시 엘레노어 쪽으로 슥 밀어놓았다.
카이델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할 말을 찾는 엘레노어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때 무언가 생각났는지 엘레노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 제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실 수 있어요? 연회 파트너 자리 때문에 세 분이 한심한 경쟁을 하고 계신 거잖아요.”
‘한심한’이라는 말에 강세를 넣은 엘레노어가 팔짱을 척하니 끼고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이건 넣어두세요. 저는 뇌물 안 받아요.”
엘레노어가 목걸이 케이스를 카이델 앞으로 쭉 밀었다. 카이델이 눈썹을 슬쩍 찡그렸다.
“언제부터?”
“언제부터라뇨. 저는 타고나길 청렴결백한…….”
“전에는 받았잖아.”
카이델이 씩 웃으며 건넨 말에 엘레노어의 가슴이 뜨끔했다. 생각해 보면 그와는 처음부터 뇌물로 이어진 관계였다.
“잘 통했고.”
보다시피.
카이델이 밖에서 친구들과 폴짝폴짝 뛰어 놀고 있는 데미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레노어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카이델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그녀를 놀리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가는 카이델이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 왕방울만 해지는 것도, 당황하면 콧구멍이 움찔거리는 것도 귀여웠다. 뺨이 순식간에 발그레해지는 것은 흰 도화지 위에 꽃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예뻤다.
그게 보고 싶어 자꾸만 짓궂어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겁하고 치사해지고 싶은데, 그대는 청렴결백해지고 싶다 하니…….”
내가 한발 물러서야겠지. 부담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카이델이 목걸이 케이스를 손에 들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살짝 내리깐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건 결국 그대 것이 될 거야. 지금이 아니라도.”
엘레노어가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그야 모르는 일이죠. 달리 선물할 일이 생길 수도…….”
“아니, 난 알아.”
단호한 대답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둘 사이를 부드럽게 휘저어 놓았다.
“그럴 일은 없어, 엘레노어.”
***
치열한 경쟁의 승자는, 이즈멜이었다.
승패는 생각보다 허무하게 갈렸다. 그가 데이트에서 얻어낸 소원권을 사용한 것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줘서 꾸민 이즈멜은, 당장 성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 될 것처럼 아름다웠다. 엘레노어는 마차 앞에 서서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는 남자를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와…….”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 감탄했다. 그것을 들은 이즈멜의 얼굴에 웃음기가 짙어졌다.
그는 일부러 가슴을 조금 더 펴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엘레노어가 제게 조금이라도 더 반했으면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반하는 것은 엘레노어가 아닌 그였다.
“예쁘다.”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황후가 골라준 연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엘레노어는 꽃의 요정처럼 사랑스러웠다. 평소에 즐겨 입는 것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꼭 그녀를 위해 맞춤으로 디자인된 것처럼 잘 어울렸다.
엘레노어는 쑥스러움에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
“그러실 거면 처음부터 쓰시지 그러셨어요. 소원권이요.”
“그럼 재미없잖아.”
엘레노어가 이즈멜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황태자의 마차는 정말 방이라 해도 될 만큼 널찍하고 화려했다.
엘레노어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이즈멜이 창밖으로 손을 뻗어 신호했다. 마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두 녀석을 한바탕 골려 주어서 좋고, 그대는 이것저것 쥐어지는 것이 많아 좋고. 일석이조지.”
이즈멜의 말에 엘레노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참 그다운 이유였다.
“아, 선물 고르는 것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좋아하시겠죠?”
“그럼. 나만큼 어머니 취향을 꿰고 있는 사람은 없을걸.”
이즈멜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그녀에게서 좋은 선물을 받은 만큼 이번에는 조금 더 신경 써서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에게 황후가 좋아하는 것들을 슬며시 귀띔해 주었다.
“그리고 어차피 어머니는 그대를 좋아하셔. 걱정할 것 없어.”
“감사해요.”
엘레노어가 생긋 웃었다. 귀여운 드레스 탓인지 오늘 그녀는 평소보다 앳되어 보였다.
이즈멜은 눈을 감았다가 뜨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엘레노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드디어 소원권을 제대로 쓰네.”
“그러게요.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셨네요.”
“그럼. 두 번은 안 놓치지.”
이즈멜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오늘 하루는 내가 그대를 독점하는 건가?”
독점이라. 강하고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엘레노어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전하와 이야기 나누기만을 고대했던 이들이 많을 텐데요.”
“그대는?”
이즈멜이 불쑥 물었다.
“그대도 고대했나? 내게 중요한 건 그것뿐인데.”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엘레노어가 눈을 깜빡거렸다. 이즈멜은 대답을 기다리듯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차의 가죽시트를 붙잡은 엘레노어의 손끝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이즈멜의 붉은색 눈동자가 그런 엘레노어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엘레노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농담으로 넘기기에 적당한 타이밍은 이미 지나 버렸다.
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평소처럼 핀잔을 날려야 할까?
이즈멜이 한 발짝 물러섰다. 그가 한층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만 목 빠지게 기다렸거든. 달력에 별표도 쳐 놓았다고.”
그제야 엘레노어의 표정이 조금 편안하게 풀어졌다.
엘레노어는 아직도 세 사람이 대놓고 직구를 던져올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도 그랬다.
“별표씩이나…….”
“그거 알아? 그대에게 답장이 온 날들에도 다 표시해 뒀어.”
“허어?”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답장 더 자주 쓰라고 일부러 부담 주시는 거죠?”
“싫으면 두 사람처럼 나도 좀 자주 만나 주든지.”
이즈멜이 유혹하듯 눈꼬리를 슬쩍 휘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그런 잔챙이들은 생각도 안 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