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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82화 (82/168)

82화

엘레노어는 케이크를 들고 카이델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갔다.

“소원 빌고 촛불 꺼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후 하고 촛불을 껐다. 기사들의 환호성 소리가 홀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생일 축하해요, 카이델.”

엘레노어가 둥글게 눈을 휘며 웃었다.

카이델은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기사들부터 아이들, 조나단, 드와이트, 그리고…….

“전하? 소후작?”

떨떠름한 얼굴의 이즈멜과 아드리안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었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에게 케이크를 건네주며 말했다.

“다들 당신 축하해 주려고 모인 거예요. 한마디 해요.”

잠시 케이크를 빤히 내려다보던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먼저 고마워, 엘레노어.”

자리를 찾아가던 엘레노어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전하께도 감사합니다.”

왜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고맙다.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짧게 인사를 건넨 카이델이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엘레노어의 옆자리에 앉으려는 카이델의 손목을 누군가 잡아챘다.

이즈멜이었다.

“어딜. 주인공은 상석에 앉아야지.”

아드리안이 제 옆자리 의자를 빼 주며 덧붙였다.

“앉으시지요, 각하.”

카이델은 그제야 두 사람이 온 이유를 깨달았다. 엘레노어와 그를 떼어놓기 위해서였다.

평소였다면 못 들은 척 엘레노어의 옆에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은 죄가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카이델이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올려두자 이즈멜과 아드리안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독특한 케이크네.”

이즈멜이 케이크에 대한 감상을 뱉어냈다. 반쪽은 그럴싸한데, 다른 반쪽은 이상하게 어설펐다.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데미랑 반씩 꾸몄어요.”

이즈멜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꼭 파는 것 같군. 손재주가 좋아.”

그리고 다른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추상적이야. 아홉 살치고는 아주 잘했어.”

옆에 있던 카이델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삐뚤삐뚤하지만, 그게 아이다운 귀여움을 더하는 것 같았다.

그때 옆에서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아드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즈멜과 카이델의 시선이 그런 아드리안에게 향했다.

“제 생각엔 이쪽이 데미안, 이쪽이 엘레노어 솜씨 같은데요.”

아드리안이 차례대로 깔끔한 쪽과 어설픈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엘렌?”

뾰로통해진 엘레노어가 홱 고개를 돌렸다. 이즈멜과 카이델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즈멜이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 그게…….”

“됐어요. 늦었어요.”

“난 칭찬만 했어. 추상적이고 아주 훌륭하다고.”

카이델도 얼른 끼어들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엘레노어.”

“내 말에 동조하지 않았나. 그대가 제일 나쁜 놈이야, 여기서.”

이즈멜이 그런 카이델에게 일갈했다. 아드리안도 지당한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을 쭉 빼고 케이크를 들여다보던 시에나가 툭 물었다.

“그런데 저건 대체 뭘 만든 거예요?”

다들 궁금해하면서도 속으로만 삼키던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엘레노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이델 얼굴.”

그제야 여기저기서 아아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저 블루베리가 눈, 딸기가 입인 것 같았다.

“듣고 보니 닮았군. 똑같아.”

이즈멜이 얼른 엘레노어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엘레노어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뻔뻔함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빈말은 됐어요. 어서 먹어치워 버리자고요.”

***

한바탕 소란한 생일파티가 지나가고, 카이델은 방으로 돌아와 선물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생일 선물이라.”

번쩍거리는 포장 상자들을 빤히 바라보던 카이델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직도 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녀석들이…….”

대부분 기사들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급하게 준비했는지,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튀어나왔다.

카이델이 가볍게 혀를 찼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다음은 얇은 봉투였다. 황실 인장으로 봉해진 것을 대충 잡아 뜯자, 성의 없이 휘갈겨 쓴 필체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날의 광기는 너그러이 눈감아주지. 그게 내 선물이다.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추신. 엘레노어가 내게 손수건을 선물해 줬어. 난 생일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날 지키기 위해 괴한의 정강이도 걷어차 주었지. 확신하건대 엘레노어는 나를 더 좋아해.」

본문보다 긴 추신을 읽던 카이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편지를 구석에 툭 던져둔 그가 잘 포장된 상자를 열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드와이트 에버렛.」

짧은 카드와 함께 근사한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카이델은 그것을 소중히 책상 제일 위 서랍에 넣어두었다. 엘레노어의 가족에게 약간은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모든 선물을 통틀어 카이델을 가장 혼란스럽게 한 것은 루카스의 선물이었다.

“……머리핀?”

진주가 알알이 박힌 핀을 이리저리 살피던 카이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편견이 없다고 해야 하나.”

카이델이 고개를 갸웃하며 마지막 선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봉투는 누구의 것인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봉투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춘 카이델이 페이퍼 나이프로 깔끔하게 그것을 열었다.

편지지를 꺼내자 그 사이에서 작은 종이 하나가 톡 떨어졌다.

-소원권(너무 어려운 건 안 됨!)

카이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급하게 괄호를 덧붙인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그가 기다란 다리를 꼰 채 생각에 잠겼다. 날카로운 턱을 쓸며 무언가에 골몰한 모습은 그야말로 조각상 같았다.

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은 실로 하찮은 것이었다.

‘엘레노어에게 너무 어려운 건 뭘까. 뽀뽀?’

눈썹을 슥 추켜올린 그가 편지를 펼쳐 들었다.

「카이델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성공했는지 모르겠어요. 즐거웠나요? 즐거웠어야 하는데…….」

“그래, 즐거웠어.”

카이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데미와 같이 케이크를 장식하다가 생각했는데요. 우리 사이에도 생각보다 떠올릴 만한 추억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제는 정말 당신을 내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겠죠?

하나하나 당신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가는 일이 즐거워요. 그거 알아요? 카이델 당신은 알수록 더 근사한 사람이랍니다. (물론 처음에도 무척 근사하셨습니다!)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을 아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잊지 말라는 거예요. 저도 그중 하나랍니다. 당신은 절대 혼자가 아니에요.

생일 축하해요, 카이델.

당신의 행복을 빌며,

엘레노어 에버렛 드림.

추신. 태어나길 잘했지요? :)」

카이델은 엘레노어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혼자가 아니다.”

카이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카이델은 오늘 그 말이 사실임을 배웠다. 동시에 카이델은 그동안 제가 지독히도 외로웠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엘레노어는 그가 알지도 못했던 상처 위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상상도 하지 못한 곳으로 이끌며, 그가 내일을 기대하게 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카이델의 시선이 편지 끝에 작은 글씨로 덧붙여진 추신에 가 닿았다.

‘태어나길 잘했지요? :)’

카이델이 피식 웃었다.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그러게. 태어나길 잘했군.”

***

엘레노어는 아드리안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문득 제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엘렌, 네가 말했던 뫼젠어 사업 말이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더라.”

“그래?”

엘레노어는 대수롭잖은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 늘 있는 법이었다.

“내가 좀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친구에게 감수 의뢰가 들어왔다더라고. 가만히 들어 보니까 네가 했던 얘기랑 좀 비슷하길래 신기하다고 생각했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뭐 괜찮아. 우리는 어차피 사업성 없다고 보고 손 떼려고 했던 거잖아.”

“응. 그냥 괜히 신경 쓰여서 말해 봤어.”

엘레노어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난 그때 네가 한 판단이 맞았다고 생각해. 뫼젠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건 상인들이 대부분일 거야. 귀족들이라 해 봐야 극히 일부일 거고.”

“맞아. 입시랑은 다르지.”

“상단에서는 통역관을 고용하면 그만이고, 귀족들이라면 그냥 개인 가정 교사를 구할 거야. 관광객도 많지 않고…….”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드리안이 덧붙여 말했다.

“뫼젠어는 배우기 쉽지 않은 언어야. 본격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이 많진 않을 것 같아.”

“맞아. 괜히 그런 말에 휩쓸리지 말자.”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엘레노어가 다시 한번 차분히 생각해 봐도 그 사업 계획서에는 허점이 많았다. 엎는 것이 맞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분명 매력적인 구석도 있었다. 벨리움에 괜찮은 뫼젠어 교재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뫼젠어가 조금씩 주목받는 추세도 분명했으니까.

엘레노어는 어쩐지 뫼젠어를 머릿속에서 떨치기가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은 적겠지만…… 약간의 회화 정도라면?’

그때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작은 아이디어가 하나 번뜩였다. 엘레노어가 곧바로 아드리안의 팔을 붙잡았다.

“아, 리안. 그런 건 어때?”

“어떤 것?”

“그냥 비즈니스 상황에서 필요한 문장들만 쏙쏙 뽑아서 책으로 엮는 거야. 불필요한 설명 없이.”

엘레노어의 말에 아드리안이 손가락을 경쾌하게 튕겼다.

“아, 관광안내 책자에 있는 것처럼?”

“응, 정확해. 그냥 인사말이나 많이 쓰이는 표현들을 따라 읽을 수 있게 발음이랑 같이 담는 거야. 가벼운 소책자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본 아드리안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얇은 소책자 정도라면 만드는 데도 품이 많이 들지 않는 데다가, 뫼젠어에 가볍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었다. 소소하게 이익을 얻기에는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였다.

“괜찮은 것 같아. 엘렌, 네가 직접 만들 거야?”

아드리안의 질문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 정도 실력은 못 돼.”

“흠, 그럼 사람을 찾아야 하나…….”

아드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때 엘레노어가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찾을 필요가 뭐가 있어? 이미 우리 주변에 둘이나 있는데.”

그것도 뫼젠에서 온 왕녀를 보필할 만큼의 실력자들이 말이야.

엘레노어가 당당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아드리안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래, 그녀에게는 카이델과 드와이트라는 비장의 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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