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어려웠다.
맛있는 케이크란 먹기는 쉬워도 굽기는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엘레노어는 뼈저리게 느꼈다.
데미안이 완성된 케이크 시트를 빤히 보며 말했다.
“까매요…….”
“그러게. 조금 탔네.”
“많이 탔어요, 선생님.”
데미안이 차분한 목소리로 정정했다.
“그것도 엄청 많이.”
나도 알아…….
데미안에게 정곡을 찔린 엘레노어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분명 하라는 대로 다 한 것 같은데, 결과물은 겉면이 숯처럼 검게 타 있었다.
“탄 부분만 잘라내면 되지 않을까? 그래도 안은 멀쩡하니까.”
엘레노어의 제안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칼로 윗부분을 살살 도려냈다.
“봐! 감쪽같지!”
다행히 안쪽까지는 타지 않았다. 겉면이 약간 울퉁불퉁하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크림으로 덮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맛과 정성이지.”
데미안이 테이블 위에 떨어진 케이크 부스러기를 콕 집어 맛보았다. 몇 번 씹던 데미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건 뭐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선생님, 그런데 맛이 없어요.”
데미안이 다시 한번 직구를 던졌다.
엘레노어가 케이크 윗부분을 약간 잘라 맛보았다.
정말 아무런 맛이 없었다.
재료를 그렇게 넣었는데 어떻게 아무런 맛도 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엘레노어는 제가 베이킹에 전혀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막 크림도 덮고 딸기도 올리고 하면 없던 맛도 생기지 않을까?”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지 않지만, 엘레노어의 말에 그냥 장단을 맞춰 주는 느낌이었다. 반쯤 포기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케이크 시트는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고, 우리는 꾸미는 것만 할까?”
데미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엘레노어는 제 실패작을 슥 밀어놓으며 말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이니까.”
결국, 부엌 하녀가 케이크 시트를 새로 구워 냈다. 노릇노릇 잘 익은 케이크 시트를 보자 ‘이거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크를 식히며 두 사람은 생일파티 계획을 점검했다.
“조나단이 홀을 꾸며 두겠다고 했고……. 카이델이 몇 시에 돌아온다고 했지?”
“네 시요.”
“우리가 세 시까지 갈 테니까……. 시간이 좀 빡빡하긴 하네.”
엘레노어가 데미안에게 생크림 그릇을 내밀며 제안했다.
“반씩 꾸밀까?”
“좋아요.”
“이쪽은 선생님이, 저쪽은 데미가.”
슥슥 생크림을 입히고, 구역을 반씩 나눈 두 사람이 온갖 과일들로 케이크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뭔가 특별한 걸 만들어 주고 싶은데.’
엘레노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이곳입니다.”
“와! 정말 근사하게 꾸몄네요.”
엘레노어가 공작저의 연회 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사방이 온갖 여름꽃으로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곧 악단이 도착하면 저쪽에 설 겁니다. 테이블은 앞쪽에 배치하고…….”
의욕적인 태도로 엘레노어에게 계획을 설명해 주던 조나단이 물었다.
“그나저나 손님이 몇 분이나 오십니까? 5인용 테이블 하나면 되겠습니까?”
“그게…….”
분명 처음엔 그랬다.
카이델, 데미안, 엘레노어, 루카스, 시에나. 딱 다섯 명이 축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나도 갈래, 엘렌.”
“나도 참석하지.”
아드리안과 이즈멜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즈멜과 카이델이야 원래 꽤 친했다지만, 아드리안과 카이델은 전혀 가깝지 않은데 말이다.
함께 축하해 주고 싶다는 얼굴치고는 조금 살벌했지만, 엘레노어는 선뜻 허락했다. 축하해 주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가장 의외였던 것은 드와이트였다. 그는 엘레노어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참석 의사를 밝혔다.
‘두 사람은 서로 잘 알지도 못할 텐데.’
엘레노어는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까지는 여덟 명이요. 황태자 전하도 오신다고 했고, 블레이크 소후작이랑 제 오빠도 올 거예요.”
“황태자 전하가 오신단 말입니까?”
조나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그리고 그냥 생각해 본 건데, 기사님들도 같이 축하하면 어떨까요? 초대하면 오실까요?”
“예, 각하를 존경하고 따르는 분들이니…….”
“그럼 제가 빨리 물어보고 올게요. 데미안 좀 챙겨 주세요.”
엘레노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근사한 파티가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저 멀리 한 무리의 기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기사님들!”
엘레노어의 목소리에 기사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엘레노어를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본 듯 소스라쳤다.
‘왜 저렇게 놀라지?’
엘레노어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죄송합니다!”
갑자기 기사들이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얼떨결에 치맛자락을 쥐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이유 모를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엘레노어가 큰 소리로 물었다.
“왜 도망가세요?”
“도망가는 것 아닙니다! 뛰어가는 겁니다!”
“그럼 왜 뛰어가시는데요?”
“죽어도 말 못 합니다!”
엘레노어는 힘껏 달렸지만, 당연하게도 기사들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때 엘레노어의 발끝이 툭,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으앗!”
엘레노어가 철퍼덕하며 바닥에 넘어졌다. 손으로 바닥을 짚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몹시 민망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달려가던 기사들이 끼익하고 멈춰 섰다. 흙바닥을 짚고 넘어져 있는 엘레노어를 본 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애!”
그들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엘레노어를 향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카이델이 왜 기사들을 ‘들소 같은 놈들’이라고 불렀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짚고 있는 땅이 둥둥 울리는 느낌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기사의 손을 잡고 일어선 엘레노어가 툭툭 무릎과 손을 털어냈다. 엘레노어가 약간 까진 손바닥을 보여 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안 괜찮아요. 손바닥도 까졌는데 엄청 아파요.”
손바닥에 아주 작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약 가지고 와, 약!”
“미친놈. 그러니까 뛰기는 왜 뛰어서…….”
“그럼 너는 왜 같이 뛰었는데?”
“네가 뛰니까 뛰었지, 멍청아. 죄송합니다, 영애.”
기사들은 저들끼리 티격태격하며 수선을 피웠다. 기사 하나가 급히 떠온 물로 손바닥을 씻어낸 엘레노어가 상황을 수습했다.
“장난이에요. 제가 뛰다가 넘어진 건데 제 잘못이죠. 그렇게 아프지도 않아요. 그냥 둬도 알아서 나을 거예요.”
작은 생채기 위에 값비싼 연고를 두툼하게 펴 바르며 기사가 중얼거렸다.
“각하께서 아시면 저희는 그날로 죽은 목숨입니다. 연무장을 100바퀴도 더 뛰어야 할 겁니다.”
“카이델한테는 말 안 할게요. 우리끼리 아는 비밀로 해요.”
엘레노어의 말에 기사들이 홱 고개를 들었다.
“정말입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할게요. 그런데 부탁이 있어요.”
“뭡니까?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엘레노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사실 오늘이 카이델 생일이에요. 그래서 지금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한 시간 뒤인데, 다들 와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
“오늘이 각하 생신이시란 말입니까?”
엘레노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 바쁘시면 오지 않으셔도 괜찮…….”
“무조건 갑니다! 무르시기 없습니다.”
“우리가 가도 되는 건가?”
“영애가 초대했으니 괜찮지 않나?”
기사들이 분주해졌다. 다들 설레고 흥분한 얼굴이었다.
엘레노어는 그들이 카이델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느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저 일적인 관계였다면 이토록 즐거워하진 않았으리라.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없는데.”
“몇 명이 나가서 싹 털어오는 게 낫지 않나?”
“털 거면 어디를 터는데?”
기사들이 서서히 멘붕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느낀 엘레노어가 손뼉으로 주의를 환기했다.
“와서 축하해 주시면 그게 선물 아닐까요? 그럼 다들 오시는 거죠? 그런데…… 몇 분이나 되시나요?”
대답을 들은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일파티의 스케일이 확 커진 순간이었다.
***
긴 외출 후 돌아온 카이델은 대문을 지나친 순간 저택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엇이 다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카이델이 주변을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다 똑같은데…… 뭔가 공기가 수상하단 말이지.’
카이델이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할 정도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날이었다. 더 이상의 나쁜 일은 없었으면 했다.
카이델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뒤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조나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와 함께 일한 것이 5년이 더 되었는데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조나단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바로 확인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카이델이 피곤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뭐지?”
“연회 홀 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나단이 성큼성큼 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이델은 엉겁결에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웬만한 일은 제 선에서 처리하는 조나단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먼저 들어가시지요.”
카이델이 미간을 찡그리며 연회 홀로 향하는 큰 문을 휙 열어젖혔다.
“시설 문제라면 사람을 불러서 해결…….”
와아아!
“생일 축하합니다!”
새하얀 빛이 그를 휘감고, 이내 붉은 꽃잎이 카이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귀가 얼얼할 정도의 환호성에 샹들리에가 흔들거렸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깜짝 놀란 카이델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은 채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 위에 꽃잎이 한 번 더 끼얹어졌다.
카이델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장난스러운 얼굴의 시에나와 루카스가 꽃잎이 든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너희가 왜…….”
루카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생일?
카이델이 고개를 들었다. 엘레노어가 케이크를 들고 조심조심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
그는 그제야 오늘이 제 생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안도감이 차오르며, 그의 온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데미가 준비했어요.”
옆에 서 있던 시에나가 데미안의 등을 떠밀어 카이델 앞에 세웠다. 잠시 쭈뼛거리던 데미안이 카이델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카이델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런 데미안을 번쩍 안아 들었다. 상기된 얼굴의 데미안이 카이델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고맙다, 데미안.”
카이델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데미안이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있는 쪽을 힐끗 바라본 데미안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어쩐지 오늘은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쪽.
눈을 질끈 감은 데미안이 카이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카이델이 놀란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카이델의 깜짝 놀란 얼굴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정말로 그가 겁나지 않았다. 조금도. 개미 눈물만큼도.
“생일 축하해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