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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80화 (80/168)

80화

아스터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엘레노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깜짝 놀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엘레노어를 보며 아스터가 말을 이었다.

“배를 타고 세상을 둘러보며 견문도 넓히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란다. 딱 세 사람을 뽑는 자리인데, 마침 내게도 추천할 기회가 있어서 말이다.”

“왜 제게 그렇게 큰 기회를……. 저는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않았는데요.”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아스터가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카데미에서 배울 것이 없었어, 엘레노어. 그때 널 따로 찾아가 전부 테스트하지 않았느냐?”

아카데미 시험이 끝난 뒤,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와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났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문으로 네 이야기를 보고, 네가 만든 교재도 구해서 읽어 보았다. 나는 네가 적임자라 확신해. 조금 더 견문을 넓히고 학문에 매진하면 넌 분명 크고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다.”

아스터는 설득하듯 엘레노어와 시선을 맞췄다.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정말이지 솔깃한 제안이었다. 엘레노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전생에서는 여행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며 살았고, 이번 생에서도 늘 편안한 울타리 안에 안주하며 지냈다. 아스터의 제안은 무척 매력적인 모험처럼 들렸다.

동시에 익숙한 공간을 벗어난다는 게 조금 두렵기도 했다. 늘 사랑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가족들을 두고 떠나가야 한다는 것도 섭섭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엘레노어의 마음을 더없이 복잡하게 하는 세 남자였다.

연애보다는 일이 중요하다며 마음 구석으로 살짝 밀어놓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레노어가 물었다.

“제가 수락한다면 몇 년이나 공부하게 되나요?”

“짧아도 3년. 하지만 보통 5년 이상 연구에만 몰두한단다. 큰 결정이니 신중하게 판단하거라.”

3년에서 5년. 긴 시간이었다.

아스터의 제안을 수락하는 쪽으로 기울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런 엘레노어의 고민을 눈치챈 것일까. 아스터가 재빨리 덧붙였다.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결정해. 내년 여름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물론 원한다면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것도 가능하단다.”

내년 여름이라면 약 1년 정도 남은 셈이었다. 생각보다 여유 있는 기간에 안도한 엘레노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충분히 고민할 시간은 있겠어.’

엘레노어가 아스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좋은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궁금한 것이 있거든 언제든 내게 편지하도록 해라.”

아스터가 엘레노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엘렌.”

엘레노어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섰다. 약간 굳은 표정의 아드리안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 리안.”

아드리안이 아스터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야, 블레이크 군. 즐거운 시간 보내게.”

아드리안의 어깨도 툭툭 두드린 아스터가 자리를 떴다. 그가 선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아드리안이 말했다.

“안 와서 걱정했어.”

“미안. 달리아를 만나서…….”

달리아라는 말에 아드리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가 공녀를 도와 교재 개발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랑은 별일 없었어?”

“응. 사실 그 일에 대해 사과받았어. 미안하다고 하더라. 덕분에 마음은 좀 가벼워졌어.”

“미안하다는 말로 될 일인가.”

아드리안이 나직이 뇌까렸다.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짜증이 솟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엘레노어의 판단이었다. 그의 성에 차지는 않더라도, 엘레노어의 마음이 편해졌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이랑 하는 얘기 들었어.”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정말 갈 생각이 있어?”

엘레노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한 건 아니지만, 생각은 해 볼 거야. 좋은 기회니까.”

“너희 부모님은 허락하실까?”

부모님 얘기에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처음에는 걱정하시겠지만 내가 결정한 일은 늘 지지해 주시는 분들이잖아.”

그래, 그럴 것이다.

아드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바람에 아드리안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사실 망설여져. 1년 정도라면 망설이지 않고 떠났겠지만, 3년은 긴 시간이잖아.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 인생에 두 번 오지 않을 기회라는 생각도 들어. 물론 여행을 다니려고 하면 다닐 수 있겠지만, 그런 거랑은 다르잖아.”

아드리안이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엘레노어가 요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저 제안이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엘레노어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리안.”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아드리안에게 다가섰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네 마음에는 안 들어?”

잠시 고민하던 아드리안이 솔직하게 말했다.

“응. 난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그렇게 널 혼자 보내는 게 걱정이 돼.”

무엇보다 널 3년씩이나 보지 않을 자신이 없어.

가장 큰 이유는 말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엘레노어의 마음에 닿을지, 닿지 못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엘레노어가 그의 팔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그냥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긴 거야. 아직 생각할 시간이 1년이나 남은걸.”

아드리안의 표정이 밝아지지 않자, 엘레노어가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누구냐. 나 엘레노어, 어딜 가도 잡초처럼 끈질기고 강인하게 살아남는다고.”

작은 손으로 가슴께를 팡팡 두드리며 자신 있게 호언장담하는 말에 아드리안이 작게 웃었다.

“나도 잘 알지, 네가 얼마나 악바리인지.”

아드리안이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엘렌, 너를 보면 이상하게 걱정이 그치지를 않아. 네가 충분히 강하다는 걸 아는데도 이상하게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듯 조마조마한 마음이 돼.”

아드리안이 손을 뻗어 천천히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길고 매끈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드러운 금발이 휘감겼다.

엘레노어의 초록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렇게 되는 걸까?”

글쎄. 어쩌면.

엘레노어의 대답은 아드리안에게 닿지 못했다. 타이밍 좋게 펑펑,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불꽃이 만들어 내는 굉음에 묻혔기 때문이다.

별이 총총 떠 있는 밤하늘 위로 노란 불꽃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전생에서 본 불꽃놀이에 비할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예쁘다, 그렇지?”

엘레노어가 하늘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드리안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예쁘다.”

불꽃 말고, 네가.

***

선상 파티에서 달리아의 경고를 듣고도 몇 주가 지났지만, 엘레노어의 하루하루는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규칙적이고 평화로웠다.

일주일에 세 번, 수업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즈멜의 편지가 왔다.

아이들이 숨겨왔던 계략을 눈물과 함께 터뜨렸던 그 날 이후로, 이즈멜은 대놓고 루카스의 가방에 편지를 쏙 넣어두었다.

“형님이 답장 좀 길게 써 달래요.”

대놓고 잔소리를 전하기도 하고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 아드리안과 함께 상단이나 인쇄소에 방문해 일이 돌아가는 것을 살폈다. 그는 업무의 연장선인 것처럼 수도 곳곳의 맛집에 엘레노어를 데려갔다.

“잘 먹어야 일도 잘하지.”

“이러다가 드레스 안 맞겠어.”

“그럼 새 드레스 사 줄게. 걱정하지 말고 먹어.”

또 카이델이 체술 수업을 한 날에는 집에서 그와 저녁을 먹었다.

여름이 되자 체술 수업이 끝나고 나면 카이델은 땀범벅이 되었다. 그는 그럴 때 엘레노어가 다가가는 것을 싫어했다. 땀 냄새가 날 거라는 게 그 이유였다.

“카이델! 멈춰 봐요. 진짜 괜찮다니까요.”

“거기서 이야기해. 그래도 들려.”

카이델이 엘레노어를 피해 마차가 있는 쪽으로 도망치며 말했다.

“씻고 가세요. 가는 내내 찝찝하시잖아요.”

그 순간 마법처럼 카이델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가 목각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돌아섰다.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

“음…… 드와이트 옷 중에서 최대한 큰 걸 찾아볼게요. 그래도 조금 작겠지만.”

엘레노어가 말했다. 카이델은 미묘한 표정으로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감사히.”

엘레노어는 볕에서 진땀을 빼는 카이델을 위해 몸에 좋은 음식들을 준비해 두었다. 물론 요리는 엘레노어가 아니라 하녀들이 한 거지만…….

“고마워, 엘레노어.”

감사 인사는 어쩐지 그녀가 받고 말았다.

아무튼 요즘 엘레노어의 일상을 요약하면 그랬다. 전부 설레고 기분 좋은 일들뿐이었다.

‘도대체 주변 사람을 왜 의심하라고 한 거지?’

엘레노어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때였다. 데미안이 엘레노어의 팔꿈치를 콕콕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선생님.”

“응, 데미.”

“할 말 있어요. 근데 형한테는 비밀이에요.”

비밀?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미안이 작게 속삭였다.

“다음 주에 우리 형 생일 있어요.”

그 순간 엎드려서 과제로 내어준 단어를 외우던 시에나와 루카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엘레노어에게도 간신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였는데 어떻게 들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공작님 생일?”

“나도 갈래!”

데미안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생일파티 안 하는데…….”

그러자 순식간에 시에나와 루카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생일은 핑계고, 그냥 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스쳤다.

“생일파티, 우리가 열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엘레노어는 제 생일에 카이델과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왕 축하하는 거,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크게 축하해 주면 더 좋지 않을까?’

엘레노어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드는지, 아이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선생님이 계획을 짜 볼게. 시에나랑 루카스도 참석하는 거지?”

“네!”

“데미안은 선생님이랑 같이 케이크를 준비하자. 어때?”

“좋아요.”

데미안이 두 주먹을 꼭 말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만드는 거예요?”

“어…….”

엘레노어가 뜸을 들였다.

사실, 사려고 했다.

장인이 구워 내고 한 땀 한 땀 장식한 비싼 케이크만큼 맛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편리하고 맛있고, 꿩 먹고 알 먹고.

그런데 데미안의 반짝거리는 보랏빛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들어 보자.”

그냥 밀가루 좀 붓고 달걀 좀 젓고 하면 되겠지. 뭐가 그렇게 어렵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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