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어머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즈멜이 불쑥 나타났다.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것은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이즈멜? 네가 갑자기 무슨 일로?”
이즈멜이 유들거리며 황후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무슨 일은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퍽이나 믿겠구나. 네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황후가 이즈멜을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그러면서도 아들의 방문이 기쁜지 하녀를 시켜 자리 하나를 더 마련해 주었다.
“그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반가워, 영애.”
이즈멜은 자리에 앉으며 엘레노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시침을 뚝 떼었지만, 엘레노어는 그가 저 때문에 일부러 온 것임을 눈치챘다.
‘불안한데.’
엘레노어의 걱정과 달리, 이즈멜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그가 나서서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하자 엘레노어의 표정이 한층 편안해졌다.
문제가 있다면,
스윽-
이즈멜이 자꾸만 엘레노어 앞으로 디저트 접시를 슬쩍 밀어놓는다는 것이었다.
엘레노어가 매의 눈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 접시들의 대열을 살폈다. 확실히 다 그녀 쪽으로 조금씩 치우쳐 있었다.
엘레노어는 티 나지 않게 웃으며 접시를 황후 쪽으로 살짝 밀어놓았다.
“엘레노어도 더위를 많이 타나요?”
그때 황후가 엘레노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저는 더위보다는 추위를 많이 타는 것 같아요.”
“나도 그래요. 그런데 이즈멜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더위에 약했어요. 다섯 살 때까지는 아무 데서나 옷을 훌훌 벗어 던져서…….”
“어머니가 농담하시는 거야. 듣지 마, 엘레노어.”
이즈멜이 재빨리 황후의 말을 가로막았다. 엘레노어와 함께 어린 시절의 흑역사를 듣고 있자니 뺨이 화끈거렸다.
“겨우 다섯 살 때 일인걸요.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예쁜 아가씨 앞이라고 쑥스러운 모양이구나.”
“예. 아리따운 숙녀 앞에서 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너무하십니다.”
이즈멜이 제 앞에 놓인 딸기 케이크를 대놓고 엘레노어 앞에 옮겨 놓으며 툴툴거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엘레노어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 황후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뻗어 이즈멜의 발을 꾹 밟았다.
‘그만해요!’
‘뭘?’
이즈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엘레노어가 접시와 이즈멜을 번갈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제 앞에 접시 밀어놓는 거요.’
황후가 차를 마시는 사이, 두 사람은 열심히 눈짓 몸짓을 주고받았다.
‘그대가 좋아하는 거잖아.’
‘쓰읍. 진짜 더 이상은 안 돼요. 경고예요!’
엘레노어가 경고하듯 눈을 부릅뜨자 이즈멜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귀여워.’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짙어졌다. 엘레노어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랐다.
“어머.”
그때 황후가 깜짝 놀란 듯 감탄사를 뱉어냈다.
혹시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것을 본 걸까. 엘레노어와 이즈멜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정신 좀 봐. 찻물이 튀었네요. 이즈멜, 손수건 좀 줄래?”
별것 아닌 이유에 엘레노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즈멜?”
그런데 아무리 지나도 이즈멜이 손수건을 건네지 않았다. 행커치프가 빤히 보이는데도 말이다.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향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차를 들이켜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결국, 엘레노어가 제 손수건을 꺼내 황후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엘레노어.”
황후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들을 보며 슥슥 손을 닦아냈다.
이즈멜은 괜히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울리지도 않는 딴청을 피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손수건을 챙겨 오는 건데.’
이상해 보이는 것을 알지만 손수건을 내밀고 싶지는 않았다. 엘레노어에게 선물 받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들 키워 봐야 소용없네요. 나도 엘레노어처럼 예쁜 딸이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쩜 이렇게 착하고 예쁜지.
황후가 팔을 뻗어 엘레노어의 손을 꼭 잡았다. 이즈멜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엘레노어에 대한 호감도를 쭉 끌어올린 듯했다.
“빌린 손수건은 나중에 꼭 보상할게요.”
“그러지 않으셔도…….”
“내가 해 주고 싶어 그래요. 다른 고마운 일도 있고.”
***
며칠 뒤 황궁에서 커다란 선물 상자가 도착했다.
“황후 폐하가 직접 고르신 겁니다.”
커다란 상자 안에는 손수건 말고도 온갖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요정의 옷처럼 반짝반짝 사랑스러운 드레스에서 예쁜 리본까지.
정말 딸에게 주는 것처럼 하나하나 고른 정성이 느껴졌다.
“와……. 내가 한 건 겨우 손수건 하나 빌려드린 게 전분데.”
이상하게 굴던 이즈멜에게 조금 고마워질 정도였다.
“오늘 파티에서 입으실 거예요?”
에밀리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음, 아니. 오늘은 조금 더 가벼운 느낌이 좋을 것 같아.”
아카데미 동기들끼리 보는 자리인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괜히 튀고 싶지는 않았다. 에밀리는 못내 아쉬운지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리본 정도는 해도 괜찮겠지.”
엘레노어의 말에 에밀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에밀리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의욕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제가 리본이랑 어울리는 드레스를 골라올게요.”
“고마워. 클로에, 네가 머리를 만져 줄래?”
엘레노어의 말에 클로에가 빗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슥슥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아!”
그때 빗이 머리카락에 걸렸다. 따끔한 느낌에 엘레노어가 작게 신음을 뱉었다.
“죄, 죄송해요.”
“괜찮아.”
“살살 빗으려고 했는데…….”
허둥지둥하던 클로에가 바닥에 빗을 떨어뜨렸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빗이 바닥을 굴렀다.
“앗, 죄송해요.”
클로에가 거의 엎드리다시피 훅 몸을 낮췄다. 떨리는 손으로 빗을 주워 든 클로에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엘레노어의 미간에 옅은 골이 팼다. 요즘 클로에는 뭔가 이상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를 연발하고, 멍하니 창밖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살갑게 던지던 농담도 사라졌다.
“클로에.”
엘레노어가 클로에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클로에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홱 뺐다. 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죄, 죄송해요. 깜짝 놀라서.”
“미안.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과했다.
“걱정이 되어서 그래. 괜찮니? 요즘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엘레노어의 얼굴에 진심 어린 걱정이 듬뿍 묻어났다.
클로에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양심의 가책이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실을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지만,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분노할 엘레노어도 두려웠고, 이젠트 공녀의 보복도 겁이 났다.
클로에가 간신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가씨. 그냥 몸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바로 의원을 불렀을 텐데.”
“약은 먹고 있으니 금세 나을 거예요.”
클로에가 간신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냐?”
잠시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일주일간 휴가를 줄게. 쉬다 와. 봉급에서 빼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푹 쉬어.”
클로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아가씨. 정말 괜찮은데…….”
“클로에, 우리가 알고 지낸 게 벌써 5년이나 돼. 난 네가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엘레노어가 클로에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이기는 했지만, 엘레노어는 언제나 그들을 친구처럼 생각했다. 수년간 매일매일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친해지지 않기도 어려웠다.
“나중에 마리와 에밀리에게도 똑같이 해 줄 거야. 그러니 부담 느끼지 말고 푹 쉬다 와.”
클로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아드리안과 약속한 날이 되었다.
“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커다란 배를 본 엘레노어가 감탄을 터뜨렸다. 노을빛으로 엷게 물든 새하얀 배는 무척 크고 깨끗했다.
“드와이트는 같이 못 와서 아쉽다. 진짜 멋있는데.”
“그러게. 들어가자.”
미끈한 연미복을 빼입은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에게 팔을 내밀었다. 꼭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았다.
엘레노어는 어색하게 아드리안의 팔짱을 끼고 조심조심 배에 올랐다.
안내받은 쪽 입구로 들어서자 탁 트인 연회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많은 사람이 도착해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드리안 블레이크!”
누군가 아드리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제프리.”
“이게 얼마 만이야. 매번 불참하더니, 이번에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제프리라는 남자가 아드리안을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본 것인지 무척이나 반가워 보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엘레노어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쪽은?”
아드리안이 간단하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내 파트너, 엘레노어 에버렛. 엘렌, 이쪽은 내 동기 제프리 브리어니.”
아드리안은 엘레노어를 친구가 아닌 파트너로 소개했다. 엘레노어는 그런 아드리안의 곁에서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에버렛? 드와이트 에버렛……?”
어쩐지 익숙한 성에 제프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드와이트의 쌍둥이 동생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제프리가 시원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아, 그러고 보니 닮았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쪽으로 가시죠. 아드리안을 보면 반가워할 사람들이 많거든요.”
엘레노어와 아드리안은 제프리가 이끄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등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긴장한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자, 아드리안이 그녀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아드리안은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아카데미 재학 당시 제법 친하게 지냈던 이들이었다.
“다들 오랜만이다.”
아드리안이 슬쩍 손을 들며 담백하게 인사를 건넸다. 순식간에 테이블이 왁자해졌다.
“아드리안?”
“야, 오랜만이다. 얼굴 보기 진짜 힘드네.”
“앉아서 일단 한 잔 마셔. 빼지 말고. 어떻게 살았는지 말 좀 해 봐.”
앉아 있던 이들이 한 칸씩 자리를 옮겨 상석을 내어주었다. 엘레노어는 그것만으로도 아카데미 시절 아드리안의 모습이 상상이 갔다.
‘핵인싸.’
모두가 좋아하고 또 모두가 동경하는 대상. 자발적 아싸였던 엘레노어와는 전혀 다른 부류.
하지만 납득이 갔다. 어떻게 그러지 않겠는가.
훈훈하고 잘생긴 외모, 빠지지 않는 집안, 제게 주어진 일은 완벽하게 해내는 성실함.
“다들 그대로네. 오랜만에 보니 좋다.”
서글서글하고 밝은 성격과 타고난 언변까지.
“같이 오신 분은?”
“내 파트너, 엘레노어 에버렛.”
그때 앉아 있던 친구 중 하나가 무릎을 탁 쳤다.
“기억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