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가씨가 졌군. 아쉽게 되었소.”
엘레노어가 억울함에 방방 뛰며 말했다.
“이건 무효죠. 부딪쳤잖아요.”
“던졌으니 끝이지. 자자, 상품이나 받아가.”
주인은 새 손님을 받기 위해 재빨리 엘레노어의 손에 곰 인형 하나를 쥐여 주었다. 엘레노어는 툴툴거리면서도 곰 인형을 품에 꼭 챙겨 안았다.
“인정 못 해요.”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야, 엘레노어.”
이즈멜이 웃음기가 잔뜩 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아이가 치고 가지만 않았어도 분명히 10점이었다고요.”
“그건 모르는 거지. 나는 소원권 뺏길 생각 없어.”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소원권이 문제가 아니었다. 억울하게 졌다는 게 문제지.
이즈멜이 그런 엘레노어를 부드럽게 달랬다.
“다음에 다시 하자. 언제든 도전해. 받아 줄 테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내 부루퉁해 있기에는 날이 너무 좋았다. 여기저기서 뒤섞여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래서 이번에 전하의 소원은 뭔데요?”
“음, 글쎄. 이번에는 좀 아낄까 해. 지난번처럼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 않거든.”
이즈멜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시무룩해지는 것을 눈치챈 엘레노어가 그의 손목을 잡아끌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 가?”
“저도 몰라요.”
엘레노어는 이즈멜과 함께 노점이 줄줄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가판대 위에 온갖 수공예품들이 즐비했다.
“매번 전하께 받기만 한 것 같아서, 오늘은 제가 사드리려고요.”
“주고 싶어서 준 거야. 더 주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고.”
물론 이즈멜에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그는 늘 가장 좋은 것만을 가질 테니까. 그래도 엘레노어는 그에게 뭔가 추억이 될 만한 것을 주고 싶었다.
한참을 꼼꼼히 살피던 엘레노어의 눈에 예쁘게 자수가 놓인 손수건이 들어왔다. 면은 조금 거칠었지만, 자수만큼은 꽤 섬세했다.
“이런 건 어때요?”
“손수건?”
이즈멜은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붉은색 나비가 수 놓인 손수건을 계산하고 그에게 건넸다.
선물이라기에는 너무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이즈멜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잘 쓸게.”
이즈멜은 손수건을 곱게 접어 그것을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두 사람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를 걸었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사람들 속에 완벽히 녹아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이즈멜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 순간 그는 황태자가 아니라, 이즈멜이라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좋아하는 여자와의 데이트에 들뜬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그때 엘레노어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까 그 애 아니에요?”
엘레노어가 가리킨 곳에는 낡은 겨자색 티셔츠를 입은 아이가 서 있었다. 아까 엘레노어를 툭 치고 간 아이와 비슷한 인상착의였다.
“그런 것 같은데.”
엘레노어가 아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즈멜이 당황해 그 뒤를 쫓았다.
“분명 실수였을 거야. 굳이 혼낼 필요는…….”
“쉿. 뭔가 저기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이즈멜의 옷깃을 끌어당긴 엘레노어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즈멜은 그제야 아이가 서 있는 방향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엘레노어의 말이 맞았다. 아이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자의 앞에 서 있었는데, 남자가 아이를 향해 무어라 윽박지르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뒷모습만 보아도 잔뜩 겁에 질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엘레노어!”
이즈멜이 정신을 차려보니 엘레노어는 이미 저 앞에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걸음에서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옷을 상하게 했으면 물어내야지. 어딜 쥐새끼처럼 도망가려고!”
남자가 아이를 향해 겁을 주려는 듯 손을 확 치켜들었다. 엘레노어가 재빨리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 녀석이랑 부딪치는 바람에 내 옷에 술을 쏟았다고.”
엘레노어가 남자가 가리킨 가슴팍을 힐끔 보았다. 서너 방울이나 흘렸을까. 손톱만 한 얼룩이 보였다. 애초에 셔츠가 지저분했기에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얼룩이었다.
엘레노어가 아이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기분이 상하셨겠어요. 얘, 얼른 사과드려.”
“죄, 죄송…….”
겁먹은 듯 엘레노어에게 바싹 붙어 선 아이가 푹 고개를 숙였다.
“사과하면 다야?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순순히 옷값 내놔.”
남자가 아이 쪽으로 성큼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엘레노어가 그 사이를 막아서며 말했다.
“옷값이라니요. 그새 다 말라서 보이지도 않는데!”
“댁이랑은 상관없는 일이니 얌전히 갈 길 가쇼. 아니면 댁이 대신 내주든가.”
“얼마인데요?”
엘레노어는 그냥 남자가 요구하는 돈을 내어주고 아이와 함께 자리를 뜨려 했다. 그게 가장 평화로운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실버.”
하지만 남자가 요구한 것은 말도 안 되는 돈이었다. 엘레노어가 턱을 딱 벌리고 남자를 보았다. 엘레노어의 옆으로 다가온 이즈멜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그때 옆에서 노점 장사를 하던 노파가 엘레노어에게 넌지시 귀띔했다.
“저 양반 상습범이에요. 악질이지. 일부러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부딪치고는 돈을 줄 때까지 저렇게 뻗댄다니까. 불쌍한 애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건네야 끝이 날 거요.”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던 이즈멜이 나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치안대를 불러오겠다.”
“샌님처럼 생긴 게 어딜…….”
그러자 발끈한 남자가 이즈멜을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때였다.
“누구한테 손을 올려, 이 사기꾼 놈아!”
엘레노어가 있는 힘껏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 경쾌한 소리가 거리를 울렸다. 예상치 못하게 공격을 당한 남자가 정강이를 부여잡으며 나동그라졌다.
“아악! 저 미친……!”
이즈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순하디순하던 엘레노어가 발길질을 하다니.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내가 당신 목숨 살린 줄이나 알아!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지.”
당신 방금 정말 죽을 뻔했다고.
한쪽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다른 한쪽 손으로는 이즈멜의 손목을 붙잡은 엘레노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뭔가 답 없는 일을 저질렀을 땐 튀는 것이 상책이었다.
골목을 벗어나서도 한참을 달린 후에야 엘레노어가 멈춰 섰다. 거친 숨을 고르는 엘레노어를 향해 아이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얼른 집에 가봐.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이 망할 체력.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낸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앞으로는 부딪치지 않게 주변을 잘 살피면서 다녀. 나쁜 사람이랑 엮이지 않더라도 아주 억울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나한테 생겼던 것처럼.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슬쩍 노려보며 말했다. 허리를 연신 숙인 아이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고, 엘레노어가 이마를 훔쳐냈다.
이즈멜이 품에서 얼른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가볍게 열 오른 뺨을 닦아낸 엘레노어가 이즈멜의 얼굴을 슥 훑었다. 그는 어쩐지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많이 놀랐어요?”
맞을 뻔해서 무서웠던 건가…….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못 쫓아올 거예요. 한동안은 끙끙거리면서 일어나지도 못할걸요. 제대로 걷어찼거든요.”
이즈멜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박력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손수건은 세탁해서 드릴까요?”
“아니, 그냥 줘.”
엘레노어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든 이즈멜이 다시 그것을 품속에 소중히 챙겨 넣었다. 엘레노어는 찝찝한지 세탁해서 돌려주겠다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그는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가 이즈멜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 호위 역할 어땠어요?”
“끝내줬지.”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재능이 있나 봐요.”
엘레노어의 얼굴에 뿌듯한 웃음이 차올랐다. 어느덧 평소처럼 순하고 귀여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이즈멜은 그런 엘레노어를 힐끔거리며 그녀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마차 쪽으로 걸어가던 엘레노어가 슬며시 걱정됐는지 이즈멜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진짜 힘껏 찼는데…… 괜찮을까요?”
박력 있게 걷어차더니 이제는 그게 조금 미안해진 눈치였다. 그게 또 못 견디게 귀여워 이즈멜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피멍 정도는 들겠더군. 그래도 목숨에 비하면 싼값이지. 죄책감 느끼지 마.”
큰일이었다. 엘레노어를 반하게 해야 하는데, 그만 자꾸 반하고 있었다.
***
평화로운 여름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에는 생크림 같은 구름이 떠다니고, 주변은 온통 짙은 초록이었다.
엘레노어는 현관 앞 계단에 앉아 발렌타인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린 문으로 시에나와 루카스가 뛰어다니며 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가 큰 소리로 주의를 시켰다.
“얘들아, 뛰지는 마! 넘어지면 다쳐.”
“네!”
언제나 그렇듯 대답은 참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엘레노어가 픽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서 다그닥거리는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가 멈추고 카이델과 데미안이 차례로 내렸다. 엘레노어를 힐끔 쳐다본 두 사람이 쭈뼛쭈뼛 손을 잡고 걸어왔다. 엘레노어가 흐뭇한 얼굴로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안녕, 엘레노어.”
“안녕하세요, 카이델. 데미도 안녕.”
데미안이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엘레노어가 그런 데미안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약속한 건 잘 지키고 있어요?”
엘레노어가 묻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에는 둘이 무슨 이야기 했는데요?”
카이델과 데미안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발렌타인 형제가 나누는 대화는 늘 엘레노어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끝이 났다. 엘레노어야말로 두 사람이 공유하는 가장 큰 공통점이었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는 엘레노어가 외숙과 맞서던 날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이델은 데미안이 그렇게 신나서 재잘대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카이델은 진지한 표정으로 데미안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엘레노어가 그와 ‘절친한’ 친구 사이라고 당당히 말했다는 대목에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카이델이 살짝 미소 지으며 둘러대자 엘레노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실이냐는 듯 데미안을 바라보자 데미안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찜찜했지만 엘레노어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전에 비할 수 없이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흠, 오늘은 조금 더 과감한 걸 시켜 볼까.’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눈을 휘며 씩 웃었다.
카이델은 반쯤 넋을 잃고 그런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저렇게 웃으면 그는 여름의 태양 아래 놓인 초콜릿처럼 힘없이 녹아내리고 말았다.
“뽀뽀해 줘요.”
엘레노어가 장난스럽게 오늘의 미션을 내렸다. 그리고 1초 뒤.
‘!’
그녀의 뺨에 무언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