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혼란스러운 표정의 달리아를 보며 아나이스가 싱긋 웃었다.
“아랫것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니 이런 일도 있는 거죠.”
달리아는 순간 등줄기가 섬찟했다. 어쩐지 조금씩 적법한 선을 넘는 느낌이었다.
“우리 쪽에서 먼저 이 사업을 꿰찰 거예요. 뫼젠어에 능통한 사람을 수소문해야겠어요. 혹시 달리아가 아는 사람 있어요?”
달리아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한 발을 뺐다.
“아니요. 생각나는 사람이 없네요.”
“하긴, 최대한 접점이 없는 사람으로 구하는 게 더 안전하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아나이스가 테이블 위에 서류를 툭 내려놓았다.
“가을쯤 발표할 수 있게 준비하면 좋겠어요. 그때는 한창 아카데미 시험 준비로 정신없을 때니까.”
당황할 엘레노어를 생각하니 답답하던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슬며시 웃던 아나이스가 달리아 쪽을 바라보며 새로운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달리아. 전부터 궁금했는데, 달리아는 왜 엘레노어를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모리스가와 에버렛가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엘레노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달리아가 흠칫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특별히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럼요?”
잠시 고민하던 달리아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의도치 않아도 자꾸 악연으로 엮이게 되는 관계가 있더라고요.”
***
달리아와 에버렛 가문의 질긴 악연이 시작된 것은 그녀가 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모리스 백작 부인은 달리아의 머리 장식을 고쳐 주는 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리아, 정말 꼭 가야겠니?”
“네, 갈 거예요. 허락해 주셨으면서 인제 와서 안 된다고 하시면 안 돼요.”
“가정교사랑 수업하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는지 난 당최 모르겠구나. 어차피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집으로 돌아올 텐데…….”
달리아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다행스럽게도 문밖에서 달그락대는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달리아를 아카데미 시험장까지 데려다줄 에버렛 백작가의 마차였다.
달리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마차가 왔어요!”
“말리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구나.”
모리스 백작 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에버렛 백작 부인이 그 딸인 엘레노어의 손을 잡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달리아는 약간의 수줍음을 느끼며 어머니의 치맛자락 뒤에 반쯤 몸을 숨겼다.
“다이앤, 어서 와요.”
“오랜만이에요, 아멜리아.”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되네요. 선뜻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폐라니 말도 안 돼요! 엘렌이랑 듀이도 친구랑 함께 가서 더 즐겁대요. 그렇지 엘렌?”
에버렛 백작 부인의 말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었다. 반짝거리는 초록색 눈과 결 좋은 금발이 인형 같은 아이였다. 달리아는 한눈에 엘레노어가 마음에 들었다.
엘레노어는 활짝 웃으며 모리스 백작 부인과 눈을 맞췄다. 저와 동갑으로는 보이지 않는 성숙하고 당당한 태도였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모리스 백작 부인. 달리아랑 무사히 다녀올게요.”
“어머, 싹싹하기도 하지. 그래, 엘레노어. 우리 리아, 잘 부탁해.”
“네.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엘레노어가 달리아를 향해 작은 손을 척 내밀었다.
“가자, 달리아.”
***
엘레노어는 아카데미로 가는 며칠 내내 밝고 당당했다. 웃긴 이야기도 무진장 많이 알았다. 좀 이상한 구석도 있었지만, 달리아의 눈에는 그마저도 꽤 근사해 보였다.
가는 길목에 묵는 여관에서 달리아는 엘레노어와 같은 방을 썼다. 저녁을 먹은 뒤, 침대 위에 누워 뒹굴뒹굴하던 엘레노어가 물었다.
“달리아, 공부할 거야?”
“응, 시험이 며칠 뒤잖아. 난 이 시험 정말 잘 치고 싶거든.”
“그럼 방해 안 할게. 드와이트 방에 있을 테니까 조용히 공부해.”
엘레노어가 살그머니 일어나 문을 열었다. 달리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너는 공부 안 해?”
“응?”
“곧 시험이잖아.”
“난 됐어. 드와이트나 좀 더 도와줘야겠다.”
달리아를 향해 살포시 웃어 보인 엘레노어가 방을 나섰다.
‘음……. 엘레노어는 공부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나 보다. 같이 수업 듣고 싶은데.’
그런 달리아의 생각이 완벽한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합격자 명단도 나오기 전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막 벨리움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마차에 짐을 싣던 중, 머리가 희게 센 노인 한 명이 달리아에게 다가왔다.
“엘레노어 에버렛?”
“아니요. 저는 달리아예요. 엘레노어는 저기 있어요.”
달리아가 손가락으로 엘레노어를 가리켰다.
“고맙구나.”
가볍게 달리아의 어깨를 두드린 노인이 엘레노어를 향해 다가갔다. 달리아는 살금살금 그의 뒤를 따랐다.
엘레노어의 앞에 멈춰 선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엘레노어니?”
엘레노어는 눈앞의 노인을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네. 그런데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엘레노어의 무심한 목소리에 남자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엊그제 입학 시험을 치렀지? 나는 그 학교의 교장 아스터란다.”
“아! 안녕하세요, 교장 선생님.”
“그냥 아스터도 괜찮아. 너를 꼭 만나 보고 싶었단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달리아는 깜짝 놀랐다. 눈앞에 전설적인 학자, 아스터 로고스토아가 있었다. 각국의 수장들도 그의 제언을 구하기 위해 아카데미까지 발걸음 할 정도였다.
달리아는 아스터와 엘레노어, 에버렛 백작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문밖을 서성거렸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문이 달칵, 열렸다. 달리아가 엘레노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슨 일이야?”
“아……. 나를 직접 가르치고 싶으시대.”
달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그냥 평범한 학교생활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그냥 거절했어.”
“그건 더 말도 안 돼!”
달리아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레노어가 달리아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인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달리아.”
***
「아카데미 입학 필기시험 1호 만점자 탄생」
「시대의 신동. 엘레노어 에버렛」
「아스터 로고스토아 “제자로 삼고 싶은 수재” 발언 화제」
「아카데미 수석 입학자, 입학 포기 선언에 충격」
달리아는 책상 앞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었다.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뒤적거리며 꼼꼼하게 읽어 나갔다.
막연한 동경이 타오르는 질투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런 감정을 성숙하게 처리하기에 달리아는 너무 어렸다.
모든 신문이 엘레노어에 대해 떠들어댔다. 달리아는 엘레노어에 이어 2등을 차지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
“달리아, 저녁 먹으러 내려와라.”
심지어는 달리아의 부모님조차도.
“오늘 모임에서 에버렛 백작과 만났어. 정신없어 보이더군.”
“엘레노어는 입학을 포기했다지요? 정말이지 똑똑한 아이라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달리아를 더 화나게 하는 건 엘레노어가 그 모든 것을 팽개쳐 버렸다는 것이었다. 달리아에게는 평생의 꿈이고 목표인 것이 엘레노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 쌍둥이 오빠도 합격했다지? 남매가 사이좋게 똘똘하니 얼마나 기특해.”
“리아에게는 잘된 일이지요. 엘레노어가 그만두면서 우리 달리아가 입학생 대표가 되었잖아요. 거기다 드와이트처럼 착한 아이가 함께 있을 테니 안심도 되고요.”
거저 얻은 1등 같은 것은 되고 싶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입학조차 하지 않을 테니, 달리아가 그녀를 이겨 볼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터였다. 달리아의 앳된 얼굴에 엷게 그늘이 드리웠다.
***
봄이 오고, 달리아는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학기가 지나면서 ‘에버렛’이라는 이름은 서서히 잊혔다. 보수적인 집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뻤기 때문이다.
“졸업생 대표 연설이 있겠습니다. 드와이트 에버렛!”
행정학부의 드와이트가 달리아를 누르고 수석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기까지는 그랬다. 달리아는 입학과 졸업에서 모두 차석을 차지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2등이 달리아 모리스, 그녀였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도 에버렛이라는 이름은 심심찮게 신문 1면에 등장했다.
「드와이트 에버렛, 아카데미 337회 졸업생 대표」
「드와이트 에버렛, 황실 공채 수석 합격!」
「엘레노어 에버렛, 혁신적인 교육 방법 제안」
「이달의 인물: 엘레노어 에버렛을 인터뷰하다!」
그럴 때마다 달리아의 손에서 신문이 파스슥 구겨져 들어갔다. 엘레노어는 여전히 달리아를 보란 듯이 뛰어넘고 있었다.
엘레노어에 대해 생각할수록, 달리아는 이룬 것 없는 지금의 자신이 작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좋은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했는데, 이젠트 공작가의 막내아들 공부나 간간이 봐주고 있는 신세라니.
그때 밖에서 모리스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아, 다들 기다리고 있어. 어서 내려와서 부인들한테 인사하렴.”
“금방 내려갈게요.”
화려하고 묵직한 목걸이를 액세서리 함에서 집어 들며 달리아가 대답했다.
인형 같은 모습으로 치장하고 사람들 틈에 끼어 방긋방긋 웃어 보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맞지 않은 구두를 신고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엘레노어는 지금도 제 힘으로 뭔가를 이루고 있겠지.’
달리아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질투심과 열등감이 그녀를 조금씩 좀먹어 갔다. 달리아도 그것을 알았지만, 엘레노어를 생각할 때마다 패배감에 휩싸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도 이런 내가 싫어.’
***
루카스는 이즈멜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수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집중하려 애썼지만, 30분쯤 지나자 루카스의 머리 위에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숙제하기 싫다.”
“뭐?”
그때 묵묵히 일하던 이즈멜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예민한 그의 신경을 건드린 듯, 눈썹이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왜 그러냐는 듯, 루카스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숙제 싫다고.”
흠칫.
이즈멜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러지 마. 좋아해 줘…….”
싫어하지 마.
이즈멜이 힘없이 중얼거리며 보고 있던 서류로 시선을 툭 떨궜다.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형을 이상하게 쳐다본 루카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가끔 보면 형님은 참 이상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