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화장한 주말, 엘레노어는 아드리안과 마주 앉아 식사 중이었다. 식당에서 딱 한 자리뿐인 테라스 석을 차지한 두 사람은 한낮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요즘 아버지도 뫼젠 이야기를 많이 하셔. 아마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상단이라면 전부 뛰어들려 할걸.”
“하긴 그렇겠지. 다들 탐낼 만한 거니까.”
포크로 면을 돌돌 말던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했다.
역시 내게 좋은 생각은 남에게도 좋은 생각인 법. 엘레노어는 며칠을 고민해 짜낸 아이디어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했다.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왕녀님이랑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면, 브로든이 경쟁에서 이기는 데 도움이 좀 될까?”
아드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움이야 확실히 되겠지만, 그걸 끌어들이는 건 좀 치사하지 않나?”
“그래? 그래도 내 이름은 네 손에 맡길게. 치사해지고 싶을 때 얼마든지 날 이용해도 좋아.”
엘레노어가 가슴께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아드리안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입안 가득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보던 아드리안이 슬쩍 물었다.
“데미안 일은 어떻게 됐어? 한동안 공작저에서 지낼 정도로 신경 많이 썼잖아.”
데미안을 위한 일이니 대놓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아드리안은 엘레노어가 공작저에 머무는 내내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공작이 없었다고 해도 마음이 쓰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잘 해결됐어. 다음 주에 물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아마도.”
엘레노어가 생긋 웃으며 여상히 답했다.
아드리안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오랜만에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공작에 관한 이야기로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거 알아?”
엘레노어가 화제를 돌렸다.
“그게 뭔데?”
“우리 아까부터 일 얘기만 하고 있는 거. 일 같은 건 생각도 안 나게 해 준다더니.”
엘레노어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분명 근황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전부 일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이젠트 공녀가 불을 지핀 오기가 여전히 엘레노어의 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생각나는 것들이 다 일이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됐지. 나도 나름 재밌는 사람일 때가 있었는데.”
엘레노어가 작게 푸념했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워라밸은 옆집 멍멍이 이름이다.
노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약간 슬프지만, 어쩌면 엘레노어는 노동이 체질인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런 엘레노어를 보던 아드리안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엘렌 넌 일할 때 제일 행복해 보이는걸.”
“내가?”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열심히 일하는 것은 같지만, 나머지는 전혀 달랐다.
체력을 쥐어짜고, 자존심을 갈아 넣어가며 하는 일이 아니었다. 맞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아가며 버티는 일도 아니었다.
생각에 잠긴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보던 아드리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엘렌, 넌 가끔 되게 이상해.”
“뭐가?”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평생 너를 봤는데, 가끔 너는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져. 내가 아는 엘레노어 에버렛이 맞나 싶을 만큼.”
잠시 말을 고르던 그가 말했다.
“혼자 다른 시간을 사는 것 같아.”
움찔.
본질을 꿰뚫는 듯한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뜨끔했다.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한 그녀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게 내 매력이야.”
“알아.”
아드리안의 눈이 예쁘게 휘었다.
“그래서 내가 너 좋아하잖아.”
***
배부르게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나란히 상점가를 걸었다.
엘레노어가 말했다.
“아, 엄마가 꽃 엄청 좋아하셨어.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났을 거야.”
“나 없으면 어떡할래, 너.”
아드리안이 너스레를 떨자 엘레노어가 눈썹을 으쓱해 보였다.
“그냥 그렇게 넘어가는 건 마음이 좀 그래서, 오늘 나온 김에 둘러보려고.”
그때 엘레노어의 눈에 보석상의 붉은 간판이 들어왔다. 고급스럽고 차분한 느낌이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어, 저기 가 보자.”
“장신구 가게?”
아드리안이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엘레노어가 그를 끌고 가게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엄마 아빠 선물로 괜찮을 것 같아.”
아드리안은 문 주변에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전에 엘레노어에게 선물할 반지를 샀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드리안이 가슴께를 슬쩍 짚었다. 옷감 너머, 반지의 윤곽이 손끝에 닿았다.
“부모님께 선물할 만한 걸 찾고 있어요.”
“일단 이쪽부터 보시지요.”
가게 주인이 꺼내놓은 회중시계를 둘러보던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향해 손짓했다.
“거기서 뭐 해? 같이 골라 줘.”
아드리안이 쭈뼛쭈뼛 다가와 그녀의 옆에 섰다. 가게 주인은 아드리안을 알아본 것 같았지만, 눈치껏 모르는 척 빙긋 웃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엘레노어는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모두 골랐다. 아드리안이 한숨을 돌리려는데, 엘레노어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네 것도 골라 봐.”
아드리안이 극구 사양하며 손사래를 쳤다.
“내 거? 됐어.”
하지만 엘레노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매번 받기만 했으니 오늘은 베풀고 싶었다.
“시계는 지금 쓰는 것도 새것이니까……. 커프스단추로 보여 주세요.”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손을 진열 상자 위에 얹어 놓았다.
“네가 안 고르면 내가 고를 거야.”
엘레노어가 이것저것을 대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다 잘 어울렸다.
“이것도 예쁘고 이것도…….”
아드리안은 손이 진짜 예쁘구나.
문득 자기 손을 힐끔 쳐다본 엘레노어가 잽싸게 두 손을 그러쥐었다.
0전 1패. 이상하게 진 기분이었다.
“난 이게 좋아.”
엘레노어의 고민이 길어지자, 아드리안이 재빨리 그중 하나를 골랐다. 엘레노어의 눈동자처럼 선명한 초록색 보석이 반짝이는 것이었다.
포장까지 마친 상자를 건네받은 아드리안이 상자를 살살 쓸어 보며 말했다.
“고마워. 소중하게 잘 간직할게.”
“간직하지 말고 써 줘.”
아드리안이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러다 닳기라도 하면.”
“다시 사 줄게. 평생.”
평생.
엘레노어의 말을 곱씹던 아드리안이 슬며시 웃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래, 그 말 책임져라.”
***
이젠트 공작가의 응접실.
아나이스와 달리아가 찻잔을 들고 있었다. 달리아가 교재를 개발하는 것에 도움을 준 이후로, 아나이스는 그녀를 총애하며 하루가 멀다고 불러들였다.
사교계의 여왕, 아나이스의 총애에는 많은 이점이 따랐다. 다른 영애들의 동경 어린 눈빛부터, 부모님의 칭찬까지. 달리아는 그를 위해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을까요? 나만한 투자자를 찾기란 힘든 일일 텐데.”
달리아는 고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공녀를 못 본 척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오늘 공녀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이런 날은 그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다.
“발렌타인 공작저에서 머물렀다는 말 들었어요? 어쩌면 그리도 분별이 없는지……. 이 사실이 더 알려지면 카이델까지 소문에 휩쓸리게 생겼어요.”
아마 그분은 그런 소문이 난다면 무척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달리아는 속마음을 숨기며 생긋 미소 지었다.
“공작님께서는 그 시기에 뫼젠에 계셨잖아요. 신경 쓸 것 없어요, 아나이스.”
“하긴 그렇죠.”
아나이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카데미 일로 달리아가 엘레노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아나이스는 달리아에게 급속도로 마음을 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어요. 황태자 전하와 엮여 있지만 않았더라면…….”
아나이스는 엘레노어가 처음으로 카이델과 춤추던 밤을 기억했다. 그 순간부터 싫었지만, 그저 해프닝처럼 지나가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꼭 그것이 신호탄이 된 것처럼, 존재감 없던 백작 영애는 온갖 일로 세간의 집중을 받았다. 처음에는 빈정거리는 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호의적인 시선도 점차 늘어갔다.
아나이스의 인내심은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팔짱을 끼고 연회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늘 마음에 품어 왔던 카이델, 황태자와의 친분이 주는 특별함, 동경 어린 눈빛들. 엘레노어는 아나이스에게서 그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녀님, 그 하녀가 막 도착했습니다.”
그때 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누군가의 도착을 알렸다.
‘그 하녀?’
달리아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들어오라고 해.”
아나이스가 재빨리 대답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떠는 소녀 하나가 쭈뼛쭈뼛 걸어 들어왔다.
달리아가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주변을 습관처럼 힐끔거리는 것이, 공작가의 하녀 같지는 않았다.
하녀가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이젠트 공녀님. 저, 저는 크, 클로에…….”
“됐고 가져온 것부터 이리 내.”
아나이스가 클로에의 말을 자르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클로에가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들고 걸어왔다.
“굼뜨기는.”
클로에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를 홱 잡아챈 아나이스가 혀를 찼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달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나이스, 저 하녀는 누구인가요?”
“에버렛 가의 하녀예요. 엘레노어 밑에서 일하는.”
달리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엘레노어의 하녀가 왜…….”
종이를 휙휙 넘겨보던 아나이스가 중얼거렸다.
“돈 몇 푼에 제 주인을 배신한 거죠. 뫼젠어 관련 사업을 할 생각인가 보네요. 왕녀랑 어울려 다니더니, 뭔가 주워들은 게 있는 모양이에요.”
아나이스의 입매가 삐딱하게 비틀렸다. 달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엘레노어 에버렛의 사업 계획서인가요?”
“그런 것 같네요. 글을 모른대서 걱정했는데, 용케 제대로 찾아왔네.”
아나이스가 설핏 웃었다. 아름답고 서늘한 미소였다.
“그, 그럼 약속하신 도, 돈은 받을 수 있는 거지요?”
옆에서 덜덜 떨고만 있던 클로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나이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가의 하녀가 다가가 클로에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려무나. 괜찮은 게 생기면 그때그때 가지고 오고, 처신 잘하고. 엘레노어에게 말했다간 네 목숨으로 용서를 구해야 할 거야.”
날카롭게 경고한 아나이스가 나가 보라 지시했다. 테이블에 앉은 파리를 쫓듯 무심하고 짜증스러운 손짓이었다.
“예, 공녀님…….”
클로에가 사색이 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항상 제게 친절했던 엘레노어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숨통을 꼭 죄어 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도박 빚은 하루하루 늘어만 갔고, 밤새 삯바느질까지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공녀가 제시한 금액은 클로에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떡해. 어떡하지…….’
뒤늦게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