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카이델은 데미안의 방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데미안을 볼 낯이 없었다.
엘레노어가 백작저로 돌아가기 전, 마차 앞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엘레노어, 데미안이 나를 용서해 줄까.’
‘바보 같은 소리. 용서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애초에 데미는 당신을 원망한 적이 없었으니까.’
엘레노어는 씩 웃으며 그의 팔을 툭 두드려 주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그녀를 떠올리자 그의 안에서 작은 용기가 솟았다. 카이델이 데미안의 방문을 두드렸다.
“데미안, 잠시 들어가겠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자, 놀란 얼굴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데미안이 보였다.
“혹시 내가 깨운 건…….”
카이델의 말에 데미안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연한 하늘색으로 꾸며진 데미안의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카이델은 제가 데미안의 방을 직접 살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간 참담한 마음이 되었다.
“선생님은……?”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엘레노어는 방금 막 돌아갔어.”
“…….”
“전해 들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 모두 네 곁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어.”
카이델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다음 순간, 데미안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카이델이 데미안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다.
“미안하다, 데미안.”
데미안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형은…… 나한테 잘해 줬어요.”
“아니, 네가 그 모든 걸 혼자 견뎌야 했던 건 내 잘못이야. 너는 아직 어리고, 나는 그런 너를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니.”
데미안의 커다란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입술을 꼭 깨물고 작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 보려는 노력이었지만, 카이델의 부드러운 목소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먼저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데미안.”
“내가 말하지 않았던 건데…….”
“어른으로서 너를 지켜주지 못했던 것도.”
카이델이 손을 뻗어 데미안의 뺨을 닦아냈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피부는 아직도 아기 같기만 했다.
“형으로서 네게 편히 기댈 곳이 되어 주지 못했던 것도 미안하다, 데미안.”
데미안의 눈가를 꼼꼼히 닦아낸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그가 데미안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용서해 줄 수 있을까?”
데미안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델이 팔을 뻗어 데미안을 꽉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어색한지 뻣뻣하게 서 있던 데미안도 이내 카이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데미안은 한참이나 카이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코를 훌쩍거렸다. 데미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그럼 내가 안 미워요?”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카이델이 눈썹을 슥 추켜올렸다.
“내가 너를 왜 미워하지?”
“엄마가…….”
데미안의 말에 카이델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떼어냈다.
“말도 안 돼, 데미안. 다시는, 정말 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 말아라. 네 잘못이 아니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
“약속해.”
“약속할게요.”
카이델이 다시 데미안을 꽉 끌어안았다. 작고 마른 몸이 힘을 빼고 편안하게 기대왔다.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데미안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떻게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상 유일한 내 가족인데.”
“……정말요?”
“그래, 정말로.”
데미안이 코를 훌쩍이며 카이델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따뜻하고 든든했다.
카이델이 달래듯 데미안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약속하마. 누구도 네게 그런 말로 상처 줄 수 없게 하겠다고. 네가 나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애쓰겠다고.”
***
「엘렌에게.
안녕, 엘렌. 힐데야. 그동안 잘 지냈지?
나는 종일 궁에 박혀서 따분한 일이나 거드는 중이야. 너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서도 좀이 쑤시지 않는 거니?
벨리움에서 가져온 물건들이 반응이 꽤 좋아. 아마 이번 계기로 양국 간에 교류가 늘지 않을까 생각해. 겸사겸사 길도 좀 닦였으면 좋겠다. 돌아와서 일주일을 끙끙 앓았지 뭐니.
당분간은 카이델이 뫼젠과 벨리움을 자주 왔다 갔다 하게 될 거야. 그러니 답장은 그에게 건네주렴.
그 짜증 나는 여자가 벌인 문제는 잘 해결되었는지 궁금해. 답장에 잊지 말고 꼭 써 줘.
벨리움이 아직도 생생해. 너희 어머니 표 호박파이도 먹고 싶고, 밖에서 먹은 생선 요리도 그립고.
다들 보고 싶다. 재수 없는 황태자만 빼고. 카이델도 쓸데없이 많이 봤으니까 걔도 빼고.
병나지 않게 적당히 설렁설렁 살고 있으렴. 언젠간 널 다시 볼 날이 왔으면 좋겠어.
피곤한 힐데가」
***
「힐데에게.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힐데도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따분한 일상도 금세 적응하시리라 생각해요.
아, 문제는 잘 해결되고 있습니다.
완벽한 해결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여전히 고객들을 야금야금 빼앗기고 있거든요.
하지만 제일 큰 걱정은 덜었어요.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늘이 도우신 게 아닐까요?
그리고 여기서는 다들 잘 지내고 있답니다. 아드리안은 일 때문에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고, 전하께서도 늘 그렇듯 바쁘시죠. (안 궁금하다고 하셨지만.)
아이들은 어쩐 일인지 요즘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고, 저는 덕분에 아주 행복하답니다. 드와이트는 야근이 좀 잦아졌지만 여전히 건강합니다.
언젠가는 저도 뫼젠에 가 볼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날까지 잘 지내고 계세요.
엘레노어 에버렛 드림」
***
답신을 봉한 엘레노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뫼젠이라…….”
뫼젠 왕국과의 교류가 늘 것이라는 왕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빈 종이를 꺼내 들었다.
“벨리움의 외교에서 뫼젠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다면, 그 언어와 문화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늘 거야.”
엘레노어가 깃펜을 들고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사각사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디어들이 종이를 가득 채워 갔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렌, 들어가도 돼?”
“리안?”
당연히 하녀일 줄 알았는데, 아드리안이 문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요즘 많이 바쁘다며?”
아드리안이 문을 닫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익숙하게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응, 선물 때문에 잠시 들른 거야.”
“선물?”
엘레노어의 시선이 아드리안의 손에 들린 커다란 꽃다발로 향했다. 크고 작은 연분홍빛 꽃들로 이루어진 꽃다발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뭘 이런 걸 다…….
아드리안의 옆자리에 앉은 엘레노어가 헤벌쭉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미안하지만 이건 네 거 아니야.”
엘레노어가 흠칫했다.
“……진짜?”
“응, 진짜.”
민망해진 엘레노어가 입술을 삐죽이자 아드리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엘레노어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럼 저 꽃다발은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그럼 누구 건데?”
거래처 사람?
아니, 그렇다기엔 너무 로맨틱했다. 엘레노어가 꽃다발을 장식한 고급 레이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엘레노어를 조금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았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여성분을 위한 거지.”
엘레노어의 눈동자에 지진이 났다. 머릿속에 혼란이 일었다.
얼마 전에는 좋아한다더니, 이제는 또 다른 여자에게 꽃을 선물하고…….
엘레노어가 고장 난 로봇처럼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이마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바보야, 너희 어머니 말이야. 결혼기념일이잖아.”
“오늘이 며칠인데?”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달력을 쳐다보았다. 날짜 위에 빨간 동그라미가 세 개나 그려져 있었다.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망했다…….”
“준비 안 했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 데미안에게 신경을 쓰느라 기념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번에 부모님이 준비해 주신 성대한 생일파티를 생각해 보면,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날이었다.
‘지금 나가서 뭐든 사 오는 게 나을까. 하지만 곧 식사 시간인데…….’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엘레노어가 문득 아드리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너는 그런 걸 어떻게 몰라?”
아드리안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추켜올리며 반문했다.
끄응.
“지금 사러 가기엔 좀 늦었나?”
“응, 조금 이따 다 같이 식사하기로 했거든…….”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문득 아드리안의 손에 들린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수상쩍게 반짝거리는 엘레노어의 눈을 본 아드리안이 눈썹을 꿈틀했다.
“리안.”
엘레노어가 다정한 목소리로 아드리안을 불렀다. 그녀가 할 말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
“좀 도와줘.”
“흠.”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아드리안이 고개를 느른하게 기울였다. 쉽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그가 팔짱을 꼈다.
“응?”
엘레노어가 고개를 기울이며 배시시 웃었다. 아드리안은 억지로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희미하게 떨리는 입꼬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엘레노어의 손가락이 아드리안의 옷소매를 슬쩍 당겼다.
“으응?”
졌다.
아드리안의 뺨이 허물어지며 그의 입술이 서서히 호선을 그렸다. 아드리안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젓는 사이, 엘레노어가 얼른 꽃다발을 빼앗아 갔다.
“너 나한테 빚진 거다.”
아드리안이 그런 엘레노어를 보며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엘레노어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정에는 있지.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는 값진 마음 말이야.”
“마음이 바뀌었어. 다시 줘.”
아드리안이 손을 내밀자 엘레노어가 홱 몸을 돌렸다.
“어디 가져가 보시지.”
상한 꽃잎 하나 없이 완벽한 상태의 꽃다발을 물끄러미 보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그런데 좀 감동이다. 엄마가 좋아하는 꽃은 또 어떻게 알았대?”
아드리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 나 방금 점수 좀 딴 것 같은데.”
“방금 그 말만 아니었어도 더 감동받았을 거야.”
아드리안이 낮게 웃었다. 시계를 힐끔 본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주말에 뭐해.”
“일.”
허.
짧고 굵은 대답에 아드리안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일.”
이번에도 엘레노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엘레노어의 초록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주먹을 한 번 힘껏 그러쥔 아드리안이 당돌하게 제안했다.
“그래도 나랑 밥 먹자.”
놀란 듯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드리안이 그녀의 머리를 슥슥 흩트려 놓으며 말했다.
“일 같은 건 생각도 안 나게 해 줄게. 주말은 나랑 보내, 엘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