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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68화 (68/168)

68화

느릿느릿 정원을 거닐며 한낮의 여유를 만끽하던 타프만 백작은, 갑작스럽게 뒤통수에 가해진 얼얼한 충격에 멈춰 섰다.

“감히 어떤 놈이……!”

그가 시뻘게진 얼굴로 홱 돌아섰다. 그곳에는 깜짝 놀란 얼굴의 엘레노어와 세 아이가 서 있었다.

‘또 저 이상한 여자가 벌인 짓이겠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니까.

그가 으득 이를 갈았다.

엘레노어는 씩씩대며 다가오는 그를 보고는 속으로 고소한 웃음을 삼켰다.

‘나이스 샷, 루크.’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선생님이었다. 속으로는 탭댄스를 출지언정 겉으로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엘레노어가 놀란 표정을 꾸며 내며 말했다.

“어머나. 죄송해요, 백작님. 루카스가 실수를 했네요.”

버럭 하고 소리를 지르려던 백작이 순간 흠칫했다.

“루카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속삭였다.

“황자님이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엘레노어는 그 급격한 태도 변화에 내심 놀라며 루카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루카스, 사과드려야지.”

“미안해요…….”

루카스가 엘레노어의 등 뒤에 몸을 숨기며 말했다. 자그마한 얼굴에 경계심이 묻어났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백작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의 뺨 근육에 잔 경련이 일었다.

“그럼 이만.”

가볍게 묵례한 백작이 자리를 뜨고, 엘레노어가 통쾌하게 웃으며 루카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루카스가 두 배쯤 더 사랑스러워 보였다.

루카스가 엘레노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좋아서.”

***

쿵.

선잠이 들었던 엘레노어는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잘못 들은 것이겠지 하며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다시 한번 큰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엘레노어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벽 너머에 누군가 있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각. 내내 고요하던 공간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엘레노어는 꽁꽁 얼어붙었다.

엘레노어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능성이 시뮬레이션 되기 시작했다.

1. 공작저에는 유령이 사는 비밀의 방이 있다.

2. 무언가 귀중한 것을 빼돌리려 도둑이나 첩자가 숨어들었다.

3. 내내 엘레노어를 못마땅해하던 백작이 사람을 보내 그녀를 쓱싹하려 한다.

상상은 갈수록 무시무시해졌다. 엘레노어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당한 방어 무기를 찾던 엘레노어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두꺼운 책을 집어 들었다. 여차하면 내리치든 던지든 하기 위해서였다.

엘레노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소리는 잠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무슨 소리지?’

그때 엘레노어의 눈에 테라스가 들어왔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연결된 테라스를 통해서 옆방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확인만 하는 거야…….’

엘레노어는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800페이지는 족히 될 법한 두께의 책을 쥔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쿵.

그때 옆방에서 또 커다란 소음이 났다. 묵직한 것을 바닥에 내던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깜짝 놀란 엘레노어의 손에서 순간 힘이 빠져나갔다. 묵직한 책이 손끝에서 힘없이 미끄러졌다.

‘안 돼!’

엘레노어가 절규하며 팔을 휘적거렸지만, 다음 순간 테라스에 둔탁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엘레노어의 얼굴에 쩌저적 실금이 갔다.

다음 순간 누군가 테라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난 망했다.’

터벅터벅, 괴한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던 엘레노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엘레노어?”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칼날도, 오싹한 기운도, 무시무시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에 엘레노어가 슬며시 실눈을 떴다.

“……카이델?”

카이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비볐다. 엘레노어도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질문을 쏟아냈다.

“그대가 왜 여기 있지?”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요?”

카이델이 제가 나온 방을 가리키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야 여기는 내 집이고, 저기는 내 방이고…….”

아, 맞다. 여기 공작저였지.

엘레노어는 제 질문이 좀 이상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리의 정체가 카이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리자 엘레노어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테라스 난간을 꽉 붙잡은 엘레노어가 물었다.

“모레 돌아오시는 거 아니었어요?”

“빨리 돌아오려고 최대한 서둘러 끝냈지.”

“잘 다녀오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고마워.”

허둥거리며 두 사람이 늦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완전히 진정되지 않은 가슴이 쿵쿵 두방망이질했다.

카이델이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다. 촤라락, 페이지를 넘겨본 그가 궁금한 듯 물었다.

“책은 왜 들고 나온 거지?”

“혹시 이상한 사람이면 내려치려고…….”

“벌레 잡듯이?”

카이델이 한쪽 눈썹을 슥 추켜올리며 물었다. 엘레노어가 머쓱함에 배시시 웃었다.

“아닌 밤중에 얻어맞을 뻔했군.”

그가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내가 물을 차례인 것 같은데. 그대는 왜 여기 있지?”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조나단이 아무 말 않던가요?”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들어왔어. 새벽에 수선스러워지는 게 싫어서.”

“아.”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이 고요히 가라앉은 테라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잠시 서 있었다.

무심코 시선을 살짝 떨군 엘레노어가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

지금까지는 경황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의 셔츠는 완전히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벌어진 셔츠 틈으로 단단하게 짜인 조각 같은 몸이 드러났다.

“그, 옷을 갈아입고 계셨나 봐요…….“

엘레노어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작게 속삭였다. 카이델은 그제야 단정치 못한 제 모습을 인지하고 그녀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아, 미안.”

“마저 갈아입으세요.”

제 방으로 들어가던 카이델이 별생각 없이 제안했다.

“추운데 잠시 들어와서 기다리지.”

엘레노어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늦은 시간, 어둑한 침실. 남녀가 같이 있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물론 테라스도 그리 건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내 제 실수를 깨달은 카이델이 두 손을 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래. 미안.”

방으로 들어간 카이델이 옷장으로 다가가 가운을 꺼내 걸쳤다.

엘레노어는 힐끔힐끔 곁눈질로 그의 방을 살폈다. 그녀가 머무는 방과 구조는 같은데 분위기는 약간 달랐다. 좀 더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났다.

‘카이델이랑 어울리는 방 같아.’

필요 없는 가구나 장식품은 하나도 없는 방은, 주인을 똑 닮아 있었다. 엘레노어의 시선이 카이델에게 향했다. 제 공간 속의 그는 모든 것이 완벽히 몸에 익은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가운을 여민 카이델이 얇은 외투를 들고 나왔다.

“아직도 밤은 약간 쌀쌀해.”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 외투를 직접 입혀 주었다. 최대한 작고 가벼운 것으로 들고 나왔는데도 엘레노어는 그의 외투에 푹 파묻힌 사람처럼 보였다.

엘레노어가 작게 코를 킁킁거렸다. 외투에서 카이델 향기가 났다. 따뜻한 물과 깨끗한 비누로 막 씻고 나온 것 같은 향기.

그런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이델이 물었다.

“그대와 이렇게 마주치리라고는……. 언제부터 머물렀지?”

“며칠 되었어요. 황궁에서 오페라를 보고 데미를 데려다주려고 왔는데, 아무래도 조금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요. 허락을 먼저 구해야 했겠지만…….”

“아니, 엘레노어.”

카이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름다운 푸른색 눈동자 가득 엘레노어의 얼굴이 비쳤다.

“그대는 내게 어떤 허락도 구할 필요 없어.”

카이델이 엘레노어가 머무는 방 안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조나단이 이 방을 내어주었겠군.”

“네, 정말 근사해요. 아무래도 중요한 방인 것 같은데…….”

“어머니가 쓰시던 방이야. 거의 10년이나 비어 있었지.”

카이델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런 방을 제가 써도 괜찮은가요? 의미가 클 텐데…….”

“물론.”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은 누군가 쓰기 위한 거야. 부담 느끼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가 그대라서 기뻐.

행여 부담이 될까 뱉지 못한 말이 카이델의 입안에 고였다.

엘레노어는 평소보다 흐트러지고 편안해 보이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카이델은 크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잘 없었다. 하지만 그와 꽤 오래 알고 지낸 지금, 엘레노어는 이제 눈만 보아도 그의 기분을 대강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이 순간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려니 입술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카이델, 할 말이 있어요. 중요한 이야기예요.”

“듣고 있어.”

카이델이 엘레노어와 시선을 맞추며 그녀에게 집중했다. 엘레노어가 입술을 작게 달싹거렸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엘레노어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뫼젠에서 벨리움까지 왔는데, 일단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오늘 밤만은 그가 걱정 없이 푹 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까, 내일 아침 일찍 이야기해요. 피곤하실 걸 생각 못 했어요.”

카이델이 뒷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난 괜찮은데.”

“제가 안 괜찮아요. 지금도 쉬셔야 할 시간이잖아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등을 끙차 하며 떠밀었다. 카이델은 턱도 없이 약한 힘에 순순히 떠밀려 걸어갔다.

“일어나자마자 만나요. 눈뜨자마자.”

문간에 선 카이델이 비스듬히 기대 엘레노어를 내려다보았다, 눈뜨자마자, 문 하나만 열어젖히면 그녀를 볼 수 있다니. 현실감 없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엘레노어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보통 몇 시에 일어나세요?”

“다섯 시.”

“다, 다섯 시……?”

엘레노어가 움찔했다.

이 남자는 잠도 없나…….

“내일은 일곱 시까지 자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다섯 시는 무리였다. 엘레노어가 뻔뻔하게 뱉은 말에 카이델이 슬며시 웃었다.

“그럴게.”

바람이 카이델의 머리를 살랑살랑 흐트러뜨렸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만이 둘 사이의 침묵을 채워 주었다.

엘레노어는 갑작스럽게 조금 수줍어졌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옷 원피스에 슬리퍼 차림인 것? 그에게 허술하고 어설픈 모습을 보인 것? 그것도 아니면…….

엘레노어가 외투의 앞섶을 손으로 여미며 밤 인사를 건넸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 엘레노어.”

카이델의 입매가 희미하게 휘어졌다.

“내일 보자. 눈뜨자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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