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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67화 (67/168)

67화

“데미안, 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엘레노어의 말에 데미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또 누구보다 착하고 똑똑하고 소중한 사람이고.”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눈가를 부드러운 소매로 살살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형이랑 같아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형이랑 너는 다른 사람인걸. 장미랑 튤립을 비교하지는 않잖아. 그냥 다른 색과 향을 가진 꽃일 뿐이지.”

데미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끙차.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생에서 배운 제일 큰 깨달음 중 하나였다.

“너는 그냥 너로 살면 돼.”

***

아침 식사 자리.

데미안이 팅팅 부은 눈을 비벼가며 오물오물 흰 빵을 씹어 삼켰다. 배고팠는지 접시에 반쯤 코를 박은 채였다.

엘레노어는 타프만 백작에게 데미안이 백작저에서 며칠 머물러도 괜찮을지 물었다.

“안 되오.”

곧바로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네? 하지만…….”

“혹시 데미안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그때는 무슨 수로 책임지려고? 그때도 각하의 ‘친구’니 괜찮다고 말할 거요?”

백작이 빈정거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어제의 일로 무척이나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허락할 수 없어.”

하지만 엘레노어는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에 그레이비 소스를 들이부어 주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는 중이었다.

엘레노어가 눈썹 끝을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허락하실 수 없다니 어쩔 수 없지요……. 아무래도 집을 떠나는 데는 보호자의 허락이 필요하니까요.”

순순한 엘레노어의 태도에 백작은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물이 담긴 잔으로 손을 뻗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네요. 공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여기서 쭉 머무르는 수밖에요.”

쿨럭.

엘레노어의 폭탄선언에 사레가 들린 백작은 한참이나 기침을 했다. 간신히 물을 마시고 진정한 그가 한쪽 눈썹을 슥 추켜올리며 물었다.

“뭐?”

“데미안과 단단히 약속했거든요. 공작님이 오실 때까지 같이 있어 주겠다고.”

엘레노어의 말에 그가 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으르렁거렸다.

“겨우 아홉 살배기 어린애랑 한 약속일 뿐이오.”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교사로서 학생과 한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지요.”

그런 건 교육상 좋지 않으니까.

엘레노어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백작이 데미안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넌 나이가 몇인데 그 며칠을 혼자 있지도 못한단 말이냐?”

데미안이 어깨를 움찔하며 얼어붙었다.

‘어딜 감히.’

주먹을 불끈 쥔 엘레노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어머, 백작님도 참. 방금까지는 아홉 살배기 어린애라고 하셨으면서요.”

생글생글 웃으며 그가 한 말을 꼬집자, 백작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들어갔다.

“영애.”

“데미안 입장에서는 혼란스럽지 않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다가, 혼자서 뭐든 척척 해낼 나이였다가…….”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백작의 한 줄기 인내심을 건드린 듯, 그가 혀를 끌끌 차며 뇌까렸다.

“쯧. 가르치는 이부터가 그러니 애가 저 모양이지. 각하께서 돌아오시면 당장…….”

엘레노어가 백작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백작이 표정을 구겼다. 엘레노어는 태연한 얼굴로 식사를 이어 가며 말했다.

“교사로서 데미안 같은 학생을 맡을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에요. 특출나게 똑똑한 데다 인성까지 갖춘 아이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거든요.”

엘레노어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데미안을 보며 씩 웃었다. 데미안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거기다 우리 데미가 어디 보통 귀여운가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거리지 않는 구석이 없잖아요. 이런 건 공작님이랑 똑 닮았어요. 그렇죠?”

잔뜩 약이 오른 백작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그는 이제 엘레노어를 향한 적개심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늘에 맹세컨대 엘레노어는 평화주의자였다. 누군가와 다툴 바에는 그냥 조금 양보하고, 큰 소리를 낼 바에는 자리를 피하는 사람 말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이상하게도,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백작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뭐랄까, 짜릿했다.

자신감을 얻은 엘레노어가 짝, 하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이건 예전에 공작님께 허락받은 일이기는 하지만 미리 말씀드릴게요. 뭔가 허락하는 일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엘레노어가 접시 위의 닭고기를 칼로 슥슥 썰어놓으며 말했다.

“수업도 여기서 할 생각이에요. 루카스 황자님과 블레이크 후작가의 시에나도 함께요. 괜찮으시겠어요?”

“황자님이?”

황자인 루카스가 온다는 말에 백작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아무리 엘레노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황족 앞에서까지 뻗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수업이라니 어쩔 수…….”

“허락하셨으니 됐네요.”

엘레노어는 그가 말을 끝까지 이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식사 마저 하세요, 백작님. 닭고기 요리가 참 맛있어요.”

엘레노어와 데미안의 눈이 마주치자 데미안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솟았다. 그 웃음이 엘레노어의 전투력을 다시 한번 충전시켰다.

‘데미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뻔뻔해질 수 있어.’

***

수업 날이 되고, 시에나와 루카스가 도착하자 공작저는 전에 없이 시끌벅적해졌다.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적막에 익숙했던 사용인들은 처음 보는 저택의 풍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어리둥절함은 잠시, 그들은 변한 분위기에 만족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와……. 집 진짜 멋있다, 데미.”

시에나가 천장의 인동무늬를 올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루카스는 창밖으로 보이는 연무장을 보며 콧김을 뿜어댔다.

“밖에 놀러 나가면 안 돼요?”

루카스의 제안에 엘레노어가 눈썹을 으쓱했다.

“다 같이 집중해서 수업을 일찍 끝내면 나가서 노는 것도 괜찮겠지.”

“좋아요!”

접시에 정갈하게 담긴 간식이 줄줄이 놓이고,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조나단이 문을 닫았다.

“데미네 형 와도 계속 여기서 수업하면 좋겠다.”

루카스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을 들은 엘레노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집이 뭐가 어때서?”

“어…….”

루카스가 적당한 대답을 찾아 머리를 굴렸다. 조금만 더 뒀다간 귀에서 김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아 엘레노어가 얼른 웃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장난이야. 선생님도 데미랑 집 바꾸고 싶은데, 뭘.”

보상이 걸려 있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평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몇 주 내내 축 처져 있던 데미안도 예전처럼 방싯방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단어 시험은 그냥 안 치면 안 돼요?”

“맨날 쳤잖아요!”

“응, 안 돼요.”

엘레노어에게 시에나와 루카스의 투덜거림은 이제 그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처럼 들렸다. 단어 시험과 오답 노트까지 전부 끝내고 나서야 엘레노어가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이제 끝! 나가자.”

와아.

지루함에 몸을 뒤틀던 루카스가 제일 먼저 방을 뛰쳐나갔다. 데미안과 시에나가 그 뒤를 따라 뜀박질을 시작했다.

루카스는 창 너머로 보았던 연병장 쪽으로 와다다 달려갔다. 널찍한 연병장에서는 기사들이 모여 몸을 단련하고 있었다.

“얘들아,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허겁지겁 아이들을 따라잡으러 달려온 엘레노어가 입 주변에 손을 대고 크게 외쳐 주의를 주었다. 그 순간 연병장이 조용해지며 수많은 눈동자가 거짓말처럼 엘레노어에게로 향했다.

‘뭐, 뭐지.’

엘레노어는 약간의 오싹함을 느끼며 쭈뼛쭈뼛 아이들 쪽으로 다가섰다. 눈동자들이 엘레노어의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이쪽으로는 오면 안 되는 것이었나?’

엘레노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사실은 늘 흙냄새와 땀 냄새만 풍기는 공간에, 예쁜 여자가 갑작스럽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엘레노어에게서 은은하게 퍼져오는 꽃향기에 기사들이 코를 킁킁거렸다.

“안녕……하세요?”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그것이 신호탄이 된 것처럼 기사들이 앞다퉈 그녀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영애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도련님도 함께 오셨군요. 연병장을 둘러보러 오셨습니까?”

“제가 바로 이 구역의 안내 담당입니다.”

“제가 아이들을 참 좋아합니다. 곰 인형을 닮아서 아이들도 저를 좋아하고…….”

“저희가 뭔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갑작스럽게 우르르 모여들어 눈을 빛내는 기사들에 당황한 엘레노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 질문에 먼저 답을 해야 할까. 엘레노어가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였다.

“없어요!”

“우리 선생님 괴롭히지 마!”

시에나와 루카스가 눈을 부릅뜨고 엘레노어와 기사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데미안도 그 옆에 서서 팔을 옆으로 쭉 뻗고 있었다.

표정은 제법 비장했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귀엽게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기사들은 입술을 꾹 깨물고 웃음을 참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죄송해요.”

엘레노어가 그런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아이들이 뛰어놀 만한 곳이 없는지 찾던 중이었어요.”

“그러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지요.”

기사들은 스스럼없이 아이들에게 그늘진 곳을 내어주었다. 한 사람은 창고를 뒤져 약간 바람이 빠진 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엘레노어는 막내 기사가 설치해 준 차양 아래 앉아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노는 것을 지켜보았다.

‘카이델 말이 맞았네.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더워진 날씨 탓인지 평소보다 빨리 지친 아이들이 엘레노어 쪽으로 걸어왔다.

“선생님, 목말라요.”

“땀난 것 좀 봐. 어서 들어가자.”

엘레노어가 손부채질로 아이들의 목덜미를 식혀 주며 말했다. 아이들은 그새 조금 친해진 기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 마차 기다리는 것 같다. 서두르자.”

저 멀리 마차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엘레노어가 루카스와 시에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선생님은 집에 안 가요?”

“응? 가야지…….”

언제가 되었든 카이델이 오면.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두 아이의 시선을 피했다.

“어, 공을 그냥 들고 왔네.”

그때 루카스가 제 손에 들린 고무공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레노어가 여상히 말했다.

“그냥 놔두고 가. 나중에 선생님이 챙길게.”

“세게 던지면 저쪽까지 닿을 것 같은데…….”

“쓰읍.”

엘레노어가 만류했지만, 루카스는 이미 그 아이디어에 단단히 꽂힌 것 같았다. 경험상 이런 순간 루카스를 말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얍!”

루카스가 두 손으로 힘껏 공을 던졌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빠르게 날아가서…….

“헙.”

누군가의 뒤통수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그야말로 명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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