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죄송하지만 누구신지요?”
엘레노어가 물었다. 남자가 안경을 슥 추켜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타프만 백작이오. 데미안과 발렌타인 공작의 외숙이지.”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숙이 머물 것이라던 카이델의 말이 떠올랐다.
“아, 공작님께 들었어요. 당분간 공작저에 머무신다고요.”
“영애는?”
엘레노어가 얼른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를 건넸다.
“데미안을 가르치고 있는 엘레노어 에버렛입니다.”
엘레노어를 위아래로 훑은 백작이 고개를 까딱하며 대답했다.
“그래,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하고 무척이나 친절한 영애군. 시간이 늦었으니 조심히 돌아가길 바라네.”
묘하게 사람을 깔보는 태도에 엘레노어의 감정이 상했다. 하지만 카이델과 데미안의 친척이었기에 엘레노어는 그런 감정을 꾹꾹 눌러 참았다.
‘응?’
그때 데미안이 엘레노어의 손을 꼭 쥐었다. 자그마한 손은 차갑게 식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시선을 내렸다. 데미안은 어쩐지 잔뜩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엘레노어는 뭔가 심상찮은 기색을 읽어내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게…… 죄송하지만, 백작님. 공작저에서 잠시 머물까 하는데요.”
“뭐라고?”
“데미안과 미리 약속한 게 있어서요. 그렇지, 데미?”
데미안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백작이 표정을 굳히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의 기운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안타깝지만 난 그 요청을 허락해 줄 수 없소. 손님을 들이는 것은 공작 각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니.”
엘레노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백작을 마주 보며 말했다. 평소였다면 그냥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절대 물러서거나 양보할 수 없었다.
“공작 각하가 계시지 않을 때는 데미안이 그 권한을 대신하지요. 저는 데미안의 손님이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 일에 백작님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백작의 눈매가 대번에 매서워졌다. 엘레노어는 움찔하는 대신 오히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각하께서 계셨으면 분명히 허락하셨을 거예요.”
엘레노어의 말에 백작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나?”
“그건…….”
카이델은 날 좋아하니까.
하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다. 데미안이 듣고 있기도 했고,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열이 올랐다.
적당한 말을 찾던 엘레노어가 말했다.
“각하와 저는 친구니까요.”
엘레노어가 턱을 치켜들었다. 이런 때일수록 당당함이 생명이었다.
“친구?”
“제 생일파티에도 오셨고, 무도회에도 같이 갔죠. 승마도 가르쳐 주기로 하셨고, 그네도 밀어 주셨고…….”
엘레노어가 카이델과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나갔다. 반쯤은 아무 말이나 질러 본 것이었는데 말하고 보니 정말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절친한 사이예요. 제가 오는 걸 막으실 리가 없어요.”
“맞습니다. 각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에버렛 영애를 맞이하셨을 겁니다.”
언제 도착한 것인지, 현관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집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발렌타인 공작가의 집사, 조나단 로스티니입니다. 조나단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그가 친절하게 웃으며 엘레노어를 맞이했다. 공작의 최측근인 조나단까지 나서자 백작에게는 더는 꼬투리 잡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야…….”
못마땅한 눈으로 엘레노어와 데미안을 번갈아 보던 백작이 홱 멀어졌다.
데미안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제 방으로 향하고, 엘레노어는 조나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응접실로 향했다.
“이렇게 갑자기 방문할 예정은 아니었는데……. 정말 죄송하게 되었어요.”
“아닙니다. 원하시는 만큼 편안하게 머무시면 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사용인들이 그녀가 묵을 방을 준비하는 동안, 조나단은 재빨리 차와 간단한 다과를 준비시켰다. 그가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극은 재미있게 보셨습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연극이요? 아, 오페라 말씀이세요?”
“며칠 전에……. 아니, 아닙니다.”
조나단은 어째서인지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하녀가 다가와 조나단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니, 영애를 그쪽 방에 모실 수는 없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 지금 타프만 백작님과 그 일행분들이 많이 와 계셔서 크고 깨끗한 손님방은 거의 다 찼다고 합니다.”
“저는 작은 방도 괜찮은데요. 아니면 그냥 데미안 방에 있는 소파에서 자도 괜찮고요.”
엘레노어의 말에 조나단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영애를 그렇게 모셨다간 각하를 볼 낯이 없어집니다.”
잠시 고민하던 조나단이 하녀에게 무언가를 귀띔했다. 그가 엘레노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준비된 방이 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
이건 방이 아니라 집이잖아!
조나단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선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하시는 만큼 머무시면 됩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설렁줄을 당기십시오.”
부유한 백작 영애로 태어나 화려한 것에는 나름대로 면역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방은 화려함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싶었지만, 엘레노어의 턱이 점점 더 벌어졌다.
“정말 아름답네요.”
“공작저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입니다.”
“그런 방을 제가 써도 되나요……?”
“편히 사용하시면 됩니다.”
돔처럼 둥근 천장, 웅장하면서도 화사한 베이지색 러그, 잘 가꾸어진 화초들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방에 딸린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들어서자 네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너른 침대가 보였다.
“데미안에게 가 보고 싶은데…….”
“하녀가 곧 도련님을 이리 데려올 겁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조나단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 뒤 문을 닫고 멀어졌다. 엘레노어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푹신.
엘레노어는 완벽한 쿠션감에 전율하며 좌로 두 바퀴, 우로 두 바퀴를 굴렀다. 전생에서 처음으로 호텔 침대 위에 누워 보았을 때 느꼈던 감격이 차올랐다.
“평생 여기서 뒹굴뒹굴하면 소원이 없겠네…….”
구름처럼 희고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은 엘레노어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엘레노어가 대답하자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데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데미안이 쭈뼛쭈뼛 방으로 들어섰다. 엘레노어가 몸을 일으켰다.
“앉아서 이야기할까?”
엘레노어의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침대 옆에 놓인 티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야기할 준비가 된 것 같아?”
“……네.”
“힘들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한참이나 테이블 위의 화병만 물끄러미 보고 있던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백작님은 나를 안 좋아해요.”
“왜?”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데미안은 한참이나 입술을 꼭 깨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엘레노어는 가만히 그런 데미안을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데미안이 속삭였다.
“나는 형 같지 않으니까요.”
엘레노어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그리고…….”
데미안의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지금껏 외숙을 비롯한 몇몇 가신들에게서 들어왔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작고 마른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아놓았던 것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어느 순간 엘레노어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의젓한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다. 차라리 떼라도 쓰고, 응석이라도 부렸더라면.
“선생님한테 와.”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번쩍 들어 다리 위에 앉히고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등을 살살 쓸어 어루만지자, 데미안의 몸이 덜덜 떨렸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뚝뚝 눈물만 떨어뜨리던 데미안의 입술 사이로 끅끅거리는 울음이 새기 시작했다.
“크게 소리 내서 울어도 괜찮아, 데미.”
엘레노어는 데미안을 꽉 안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괜찮아. 이젠 다 괜찮아질 거야.
데미안이 가는 팔을 뻗어 엘레노어를 꽉 끌어안았다.
“아가.”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자,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젖은 뺨을 살살 닦아냈다.
“선생님이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데미안이 말없이 엘레노어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오늘은 이 방에서 자고 갈래?”
엘레노어가 소곤소곤 묻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같이 정원도 둘러보고, 서재도 둘러보고 그렇게 할까?”
“……네.”
“형이 올 때까지 백작저에서 지내도 괜찮겠다.”
데미안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게 하자.”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생긋 웃었다. 데미안이 훌쩍거리며 물었다.
“형한테, 말할, 흐끅, 거예요?”
엘레노어는 데미안의 눈에서 걱정과 망설임을 읽어 냈다.
“데미, 카이델은 너를 좋아해. 네가 형을 아끼고 좋아하는 만큼, 카이델도 그래.”
데미안이 모호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못 믿겠어?”
“못 믿는 건…… 아닌데.”
엘레노어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카이델이 무뚝뚝하긴 해. 웃지 않을 때는 좀 서늘한 인상이고. 목소리도 낮고, 눈썹도 이렇게 날카롭게 쭉……. 이건 우리끼리 하는 말이다?”
엘레노어가 다급하게 덧붙인 말에 데미안의 입술이 씰룩했다.
“그래도 알고 보면 정말 좋은 사람이잖아. 표현하는 방법은 조금 더 익혀야겠지만.”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 거니까.
엘레노어가 데미안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가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싫다면 말하지 않겠지만, 데미안. 카이델만큼 널 걱정하고, 널 지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을 사람은 없어.”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데미안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카이델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이 짠했다. 서로를 그렇게 아끼고 걱정하면서도 정작 두 사람만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니.
“……걱정할 거예요.”
데미안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엘레노어가 그런 데미안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눈을 맞췄다.
“데미, 그러잖아도 카이델은 늘 너를 걱정해. 네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혹 밖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데미안이 커다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엘레노어가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쁜 게 아니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뒤에는 늘 무시무시한 생각이 따라오는 법이거든. 데미도 형이 멀리 떠나거나 제때 돌아오지 않으면 걱정이 되잖아, 그치?”
데미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가 싱긋 웃어 보였다.
“카이델은 너를 사랑해, 데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