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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64화 (64/168)

64화

요즘 루카스에게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오늘은 머리를 엄청 높게 묶었네.’

싸웠다 화해한 이후로 자꾸만 시에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왜 자꾸 봐?”

“내가? 아니거든.”

더 문제는, 자꾸만 시에나가 예뻐 보인다는 거다!

벚꽃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도 예쁘고, 커다랗고 반짝거리는 눈도 예뻤다. 키가 큰 것도 멋있고, 오동통한 뺨은 좀 귀여운 것도 같았다.

‘말도 안 돼. 뭔가 이상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에나 블레이크라니. 이건 정상이 아니었다.

‘차라리 춤 수업에서 만났던 마리안느 바셋이라면 모를까…….’

잘난 척 대마왕에, 나무껍질처럼 까칠한 말투, 무서울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승부욕. 처음 본 날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거슬리기만 하던 성격도 요즘은 괜찮아 보였다.

아니, 꽤 근사해 보이기까지 했다.

“벌써 여름이라니 시간이 너무 빨라. 앞으로 시험까지는 공부에만 전념해야겠어.”

시에나가 다리를 척하고 꼰 뒤 책장을 휙휙 넘기며 중얼거렸다. 책상에 엎드려 그런 시에나를 보고 있던 루카스가 툭 물었다.

“전념이 뭔데?”

“한 가지에만 마음을 쏟는 거.”

전념.

루카스가 새로 배운 단어를 입안으로 중얼중얼 되뇌어 보았다. 전념이라. 제법 근사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에나가 가르쳐 준 뜻대로라면, 요즘 루카스가 ‘전념’하고 있는 것은 시에나였다.

복잡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깜빡하고 있으니, 시에나가 루카스의 팔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너도 공부 좀 해.”

“또 잔소리.”

루카스가 콧등을 찡그리며 볼을 부풀렸다.

“너 그러다 똑 떨어진다?”

“흥이다.”

“데미랑 나랑 둘이서만 다녀야 할 수도 있어.”

움찔.

반쯤 감겨 있던 루카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것만은 안 될 일이었다.

시에나와 데미안은 아카데미에서 알콩달콩 좋은 시간을 보내고, 저는 황궁에서 꼬장꼬장한 유모와 까칠한 할아버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림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런 루카스를 힐끔 쳐다본 시에나가 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난 셋이 같이 다니고 싶어. 입학도 졸업도 같이하고 싶다고. 네가 떨어지면 곤란하단 말이야.”

같이 다니고 싶다니. 입학도 졸업도 같이하고 싶다니!

루카스의 입꼬리가 슬쩍 솟았다.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로 루카스가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그래. 그러니까 그러고 있을 시간에 단어라도 하나 더 외워.”

“알았어.”

루카스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여태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열정이 루카스의 안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공부와 루카스 사이, 일시적인 동맹이 성립된 순간이었다.

***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엘레노어였다.

‘호오, 루크가 에나를 좋아하는구나?’

귀여운 녀석들.

엘레노어가 아이들을 보며 씩 웃었다. 모르는 척해 주려 해도 자꾸만 입꼬리가 솟았다.

시에나의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오늘 루카스는 누구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로 수업에 참여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수업을 지켜보고 있던 카이델이 깜짝 놀랄 만큼 말이다.

“루카스가 좀 평소랑 다른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답니다.”

엘레노어가 피식 웃으며 데미안의 책을 정리해 건넸다. 카이델이 한 손으로 그것을 가볍게 건네받았다.

“데미안은…….”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묻자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데미안은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지난주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해요.”

“다행이군.”

카이델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다음 주에는 뫼젠으로 출장 가신다면서요?”

“응. 하지만 길게 머물진 않을 거야.”

“그럼 데미는…….”

“다행히 집에 외숙이 와 있어.”

카이델의 한쪽 손에는 요즘 제국에서 제일 유행하는 연극의 귀빈석 티켓이 쥐여 있었다. 집사인 조나단이 그를 위해 힘들게 구해 준 것이었다.

뫼젠 출장을 떠나기 전, 카이델은 엘레노어에게 꼭 데이트를 신청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미 다 들켜 버린 것 같지만, 제 마음을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뭐라고 말할까. 그냥 자연스럽게 슥 건네볼까.

카이델이 작고 얇은 티켓을 손으로 꼭 쥐었을 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엘레노어가 빠르게 돌아섰다.

“엘렌.”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델의 얼굴이 벌레라도 씹은 듯 구겨졌다.

“리안?”

“공작 각하께서도 계셨군요.”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다가왔으면서, 아드리안은 뻔뻔하게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카이델의 이마에 설핏 핏줄이 섰다.

“요즘 많이 바쁜 줄 알았는데.”

“안 그래도 상단 일 때문에 왔어. 해 줄 이야기가 있어서.”

상단 일이라는 말에 엘레노어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카이델,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전 아드리안이랑 잠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요.”

가볍게 손을 흔든 엘레노어가 아드리안과 함께 멀어졌다. 카이델이 물끄러미 제 손바닥 위의 티켓을 내려다보았다.

“아드리안 블레이크…….”

카이델이 바득바득 이를 가는 사이, 아드리안은 크나큰 만족감을 느끼며 엘레노어와 정원을 함께 걸었다.

“그게 정말이야?”

“응, 한시름 놓았어. 사실 전보다 자금 상황은 훨씬 좋아졌지……. 그러니 너도 마음 좀 편히 가지라고.”

아드리안이 전해준 소식에 엘레노어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래도 아직 학습지 문제는 남아 있는 거잖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더 생각해 볼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눈이 완전히 접힐 만큼 활짝 웃는 엘레노어를 보자, 아드리안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웃으면 주변에 반짝이는 햇살이 고여 드는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홀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벅차면서도 카이델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사실상 그가 되찾아준 것이나 다름없는 미소였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 치졸함은 감수해야지.’

살랑살랑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 죄책감은 금세 휘발되었다.

“아, 그거 알아?”

“뭐?”

“루크는 에나가 좋은가 봐. 티가 엄청 나는데, 보고 있으면 귀여워 죽겠다니까. 심장이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아.”

엘레노어가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아 잡고 방방 뛰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아드리안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널 볼 때 내 마음이 그래.

아드리안이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꿀꺽 삼켜냈다. 엘레노어가 들었다면 닭살이 돋는다며 팔을 마구 쓸어내렸을 것이다.

“시에나가 같이 입학하고 또 같이 졸업하고 싶다고 했더니 엄청 열심히 공부하는 거 있지? 너무 잘됐어. 루카스가 머리는 진짜 좋은데, 공부하는 걸 좀 귀찮아하는 게 문제였거든.”

“그래?”

“시에나는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어.”

“아홉 살 인생도 녹록지 않구나.”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애들을 보고 있으면 커서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게 돼. 루카스랑 데미안은 형들을 닮았겠지?”

그럼 둘 다 정말 잘생겼겠다.

“시에나는 정말 사랑스럽게 자랄 것 같아. 다른 부분은 엄마를 많이 닮은 것 같은데, 눈은 볼 때마다 널 닮았다고 느껴.”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 보아도 참 예쁜 눈이다. 여름의 빛을 머금은 금색 눈동자는 꼭 태양처럼 아름다웠다.

“내 눈에는 그냥 다들 아기 같은데, 눈 깜빡하고 나면 쑥 커 있겠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아드리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루카스랑 시에나가 서로 좋아해서 맺어지는 날이 올까?”

엘레노어가 묻자 아드리안이 흠,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아드리안이 엘레노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나 같아서 응원하고 싶어져.”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너랑 루크는 좀 다르지.”

“어떻게?”

“루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티가 나. 넌 아니고.”

“흠.”

“그리고 루크 나이 때 너는 나한테서 도망 다니느라 바빴잖아. 기억 안 나?”

엘레노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드리안이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랬지. 뭘 몰라도 한참 모를 때라서.”

아드리안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본 엘레노어가 불쑥 물었다.

“그럼 열일곱 살 때는?”

“뭐?”

“그때도 뭘 모를 나이야?”

아드리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엘레노어는 그제야 제가 뭐라고 한 것인지 깨닫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해 본 말이야. 신경 쓰지 마.”

***

하지만 무엇이든 신경 쓰지 말라면 더 신경이 쓰이는 법.

아드리안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엘레노어의 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의 인동무늬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열일곱…….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열일곱이라면 아드리안의 기억에도 선명히 남은 시간이었다.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속절없이 이끌리는 마음에 마음고생을 하던 때였으니까.

학기가 끝난 방학이면 에버렛 가의 별장이나 블레이크 영지의 저택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드와이트와 종일 산과 들을 쏘다니고,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때쯤 커다란 바구니를 든 엘레노어가 둘을 찾으러 왔다.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되면 엘레노어는 어김없이 기나긴 편지를…….

“편지.”

아드리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 뒀었더라.

손이 닿는 대로 서랍을 열어젖히며 찾은 끝에, 그는 책상 제일 아래쪽 서랍에서 끈으로 칭칭 묶은 편지 더미들을 발견했다. 아카데미 시절 받은 것을 전부 모아둔 것이었다.

아드리안은 리본 끝을 당겨 풀고 편지를 하나하나 살폈다.

「엘레노어 에버렛 씀.」

편지 중 열에 아홉은 엘레노어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때도 자주 온다고 생각은 했지만, 모아두고 보니 정말 상당한 양이었다.

아드리안은 그중 열일곱 살 이후에 온 것을 추려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작은 언덕을 이루었다.

“이렇게 많이 왔었나?”

아드리안이 맨 위에 놓인 것을 펼쳐 들었다.

「여기는 종일 비가 퍼붓는 중이야. 네가 있는 곳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화창한 날이기를 바라. 난 이런 날씨도 나쁘지 않지만, 넌 맑은 날 밖을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아드리안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 그래도 네게 답장이 오지 않으면 기운이 빠져. 가끔은 화가 나고, 네 등짝을 마구 내리쳐 주고 싶어진다고. 그래도 용서할게. 내가 말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니.」

아드리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편지에는 답장했었나?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과거의 제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기고 싶었다.

「너한테 말해 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네게서 듣고 싶은 것도. 네가 오늘은 뭘 먹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혹시 예쁜 여학생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고 있는 건 아닌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어.」

아드리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미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꼭…….

「나는 늘 널 생각해. 널 걱정하고 그리워해. 내가 널 생각하는 반만큼만 네가 날 생각한다면 참 좋겠다. 답장 기다릴게.

사랑을 담아, 엘레노어 에버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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