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뫼젠으로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머리를 슥슥 올려 묶는 힐데가르트에게 그녀의 기사가 다가와 귀띔했다.
【곧 출발합니다. 국경까지는 발렌타인 공작이 동행할 겁니다.】
【카이델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에는 실망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것을 느낀 힐데가르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심 드와이트가 함께 가기를 바랐던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문제 있으십니까?】
【아니. 준비되면 내려갈게.】
기사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방문을 닫고 나왔다.
‘인사는 하러 올 줄 알았는데.’
드와이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힐데가르트는 그 사실이 눈물 나게 서운한 저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창가를 서성이던 힐데가르트의 시야에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드와이트였다. 그는 그녀의 기사와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힐데가르트의 안에서 뜨거운 감각이 울컥 차올랐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가 나선형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앗!】
【조심하셔야지요.】
그런 그녀의 앞에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콩 부딪친 힐데가르트가 약간 비틀거리자, 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드와이트……?】
【인사드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지금 출발하십니까?】
드와이트가 옅게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힐데가르트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왕녀님……?】
당황한 드와이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가 다급히 손수건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오늘따라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 드와이트를 빤히 보던 힐데가르트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드와이트, 나를 좋아했어?】
텅 빈 주머니를 뒤지며 허둥지둥하던 드와이트의 손놀림이 느려졌다. 그가 시선을 들어 힐데가르트와 눈을 맞췄다.
【아주 조금이라도…….】
【예, 좋아했습니다.】
드와이트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담담하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힐데가르트의 크고 예쁜 눈에서 굵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날, 들었던 거지? 카이델이랑 내가 하는 이야기.】
드와이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죄송합니다. 엿들으려는 생각은 없었…….】
【미안해.】
힐데가르트가 사과를 건넸다. 드와이트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흔들거렸다.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정말 미안해, 드와이트.】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툭 떨구며 말을 이었다.
【이즈멜이 한 말이 맞아. 난 정말이지 엉망이고, 소문대로 제멋대로고 이기적인 철부지야.】
【왕녀 전하.】
드와이트가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힐데가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드와이트의 올곧은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차분하게 숨을 고른 그가 입을 열었다.
【소문보다 용감하고, 소문과 달리 따뜻한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담담한 고백에 힐데가르트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소문처럼 제멋대로인 당신도 좋아했습니다. 그러니 용서하겠습니다.】
드와이트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귀엽고 조금 어리바리한 황태자의 막내 보좌관. 힐데가르트가 느낀 드와이트의 첫인상은 그랬다. 착하고, 순진하고, 풋풋한 소년.
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앞에 선 남자는 커다란 나무 같았다. 그녀보다 훨씬 강하고 성숙했다.
힐데가르트가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뗐다.
【한 번만 더 용서해 줄래?】
【그게 무슨…….】
드와이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발뒤꿈치를 든 힐데가르트가 두 손으로 드와이트의 뺨을 감싸 쥐고 입술을 포갰다.
짧은 입맞춤 끝에 천천히 입술이 멀어졌다.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힐데가르트가 젖은 얼굴로 활짝 웃어 보였다.
【……안녕, 듀이.】
***
【내달 중으로 뫼젠에 방문하게 될 것 같습니다. 국왕 폐하를 직접 뵙고 남은 일을 의논하는 것이…….】
카이델의 말이 멎었다. 힐데가르트는 그의 말을 조금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차창 밖만 물끄러미 내다보는 그녀는 평소답지 않았다. 카이델이 서류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울었나?’
힐데가르트의 눈가가 약간 붉어진 것을 본 카이델이 눈썹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그저 시선을 돌려 주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외면하기 어려웠다.
첫째, 두 사람은 몇 시간째 마차 안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둘째, 정말이지 믿기 힘들게도 그녀는 엘레노어의 친구였다.
셋째, 어쩐지 그녀가 우울한 이유는 그가 몇 주 전 부탁했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드와이트 에버렛과는 인사하셨습니까.】
힐데가르트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델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왜 안 괜찮겠어.】
힐데가르트가 툭 대꾸했다. 그녀의 목소리 끝이 까슬하게 갈라져 나왔다.
마음이 불편해진 카이델이 사과를 건넸다.
【어쩌면 그때는 제가 선을 넘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맞아, 그랬어.】
힐데가르트가 카이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었어. 네가 엘레노어를 생각해서 그랬다는 것도 알아. 넌 보기보다 착한 놈이니까.】
보기보다?
카이델이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덕분에 마음을 정했어. 누굴 응원할지.】
【예?】
힐데가르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엘레노어 말이야. 나는 솔직히 이드리안이 제일 마음에 들었거든. 성격도 좋아 보이고, 엘레노어랑도 제일 친한 것 같고.】
이드리안?
【아드리안 말입니까?】
【아, 맞아. 아드리안. 매번 헷갈린다니까.】
힐데가르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내 어두웠던 얼굴이 제법 밝아져 있었다.
【아무튼, 난 너한테 걸게. 친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아카데미에서의 정도 있고…….】
카이델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혼란이 왔다.
【감사하다고 해야 합니까?】
힐데가르트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감사하니?】
카이델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그럼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그게 네 제일 큰 장점이니까. 빈말은 안 하는 거.】
아니, 역시 얼굴인가.
힐데가르트가 중얼거린 말에 카이델이 눈썹을 슥 추켜올렸다. 차라리 좀 우울하고 조용하게 있도록 두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데가르트는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어갔다.
【물론 엘레노어가 아깝지만……. 셋 중에 네가 제일 든든하긴 해. 재미없고 건방지긴 해도 허튼짓은 안 하지.】
카이델의 입가가 미세하게 씰룩였다. 유치하다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흐응.
힐데가르트가 그런 카이델을 물끄러미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고민하고 있어.】
【무엇을요.】
【너한테 이걸 말해도 될지 안 될지.】
힐데가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느낌상 안 될 것 같은데, 또 생각해 보면 빈틈은 있거든.】
그녀는 엘레노어가 했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이즈멜한테 말하지 말라고는 했는데, 너한테 말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 했으니까…….】
【엘레노어가 말입니까?】
카이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당당하게 요구했다.
【저한테 걸지 않으셨습니까. 말해 주십시오.】
【하, 너 제법 뻔뻔한 구석도 있구나?】
힐데가르트가 척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카이델만큼 이 상황을 말끔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슬쩍 떠보듯 물었다.
【이젠트 공녀랑 잘 아는 사이니?】
【나름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늘…….】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내 말은, 사적으로 잘 아느냐고.】
【모릅니다.】
카이델이 곧바로 대답했다. 힐데가르트가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카이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알아야 합니까?】
【아니, 잘하고 있어. 계속 모르도록 해.】
힐데가르트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카이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마음을 정한 힐데가르트가 카이델에게 엘레노어의 상황에 대해 전해주었다. 카이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갔다.
힐데가르트가 카이델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내가 왜 말해 줬는지 알 것 같아?】
【예.】
【그래. 넌 똑똑한 녀석이니 알아서 잘할 거라 믿어.】
카이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마차 안에 다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창밖을 내다보던 힐데가르트가 문득 물었다.
【이번엔 감사하니?】
【예, 감사합니다.】
카이델이 곧바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힐데가르트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네가 잘 지켜봐 줘. 그러니까…….】
엘레노어도, 드와이트도.
힐데가르트는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을 내뱉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델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잘 지켜보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
“진심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브로든 상단 사무실, 클로드와 마주 앉은 카이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클로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발렌타인 공작가가 제안한 투자금은 이젠트 공작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였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모든 서류를 갖추고 서명하는 것만 남았을 때, 내내 묵묵히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던 카이델이 입을 열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압도된 클로드가 마른침을 삼켰다.
“대외적으로 발렌타인 공작가가 브로든 상단에 투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무엇보다 엘레노어가 몰랐으면 합니다.”
뜻밖의 말에 클로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부탁합니다.”
방에서 나온 카이델은 복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던 아드리안과 마주쳤다.
“갑작스럽게 투자를 결정하신 건 무슨 이유입니까?”
“상단에 투자하는 이유야 명확하지 않나? 수익을 내기 위해서지.”
카이델이 무심하게 걸음을 떼며 답했다.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 경우에는 그 이유가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드리안이 물었다.
“엘렌 때문입니까?”
“그래.”
카이델은 더 버티지 않고 인정했다.
“엘렌에게 들으신 겁니까?”
엘레노어가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것 같지 않은데.
아니나 다를까, 카이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렌에게 말씀하실 겁니까?”
아드리안의 말에 카이델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델이 아드리안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소후작, 그대라면 어떻게 할 텐가?”
“예?”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어. 마음을 쓸 테니까. 하지만 그게 엘레노어를 속이는 게 될까 봐 걱정돼.”
아드리안의 한쪽 입매가 비스듬히 솟았다.
“일단 저였다면 그런 것을 연적에게 묻지는 않았을 겁니다.”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저는 입을 다물고 있을 테니, 각하의 뜻대로 결정하십시오. 엘렌은 이해해 줄 겁니다.”
카이델이 알겠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