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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62화 (62/168)

62화

“……나 때문이야.”

엘레노어가 그대로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뭐?”

아드리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전부 나 때문이었어.”

엘레노어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티파티에서의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카이델과 그녀 사이가 못마땅했던 것인지도.

무엇이 되었든 발단이 엘레노어 자신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 화살이 그녀를 직접 향했더라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늘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이젠트 공작가에서 갑작스럽게 투자를 철회한 것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방해 공작을 벌이는 것도.”

“뭐라고?”

때마침 사무실로 돌아온 후작이 그것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해요, 클로드. 저 때문이에요. 정말 죄송해요.”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꾸나.”

외투를 벗어 걸어둔 클로드가 엘레노어를 자리에 앉히고 옆자리에 앉았다.

“천천히 다시 말해 보아라. 리안, 너는 차라도 좀 내어오고.”

엘레노어는 클로드에게 그간의 일을 하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드리안이 건넨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그러니까 초대받은 티파티에서 그런 일이 있었고, 공녀가 마음에 둔 공작과 무도회에 참석했다는 거지.”

이야기가 끝났을 때, 클로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네……. 죄송해요.”

엘레노어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왜 사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엘렌.”

“네?”

“몇 번을 들었지만, 나는 네가 잘못한 일을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구나.”

클로드의 말에도 시무룩해진 엘레노어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 때문에 괜히 애먼 클로드랑 리안, 상단 사람들까지 피해를 봤잖아요. 좀 더 신경 써서 행동했어야 했어요. 예상해야 했는데.”

“네가 신도 아니고 무슨 수로 그걸 예상한단 말이냐?”

클로드가 날카롭게 꼬집었다.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너는 우리 파트너야, 엘렌. 우리 중 하나라고.”

엘레노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래, 엘레노어.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딸이야. 네가 태어났을 때, 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널 평생 책임지고 보살피겠다는 맹세도 했지. 네 일은 곧 내 일이기도 해.”

클로드의 크고 단단한 손이 엘레노어의 손등 위에 겹쳐졌다. 그 온기가 엘레노어의 울음보를 톡 터뜨렸다.

엘레노어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자 아드리안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클로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며 엘레노어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그리고 이런 위기는 사업하다 보면 숱하게 오는 것이란다.”

“정말요?”

엘레노어가 훌쩍거리며 물었다.

“그럼. 설마 이번 일이 내가 겪은 인생 최대의 위기일 줄 알았느냐?”

“조금은요…….”

엘레노어가 아드리안 손수건에 콧물을 팽 풀었다.

“10등 안에도 못 들 거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10등 정도는 할 수도 있겠군.

클로드가 중얼거린 말에 엘레노어가 픽 웃었다.

“이런 위기는 잊힐 만하면 한 번씩 돌아와. 징글징글한 놈들이지. 하지만 엘레노어, 문제는 해결하면 그만인 거란다.”

클로드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네 잘못이 아닌 일에 자책하는 건 그만둬라. 너랑 어울리지 않으니까. 상도덕도 없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줄도 모르는 쪽이 잘못한 거니까.”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축 늘어져 있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 일단은 지켜보자꾸나.”

클로드가 수염 난 턱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분명 길이 있을 거다.”

“네, 절대 저쪽에서 원하는 대로 의기소침해 있지 않을 거예요.”

엘레노어의 안에서 오기가 불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전생에서 오기 하나로 버티며 바닥부터 올라간 그녀였다.

엘레노어는 작은 주먹을 꼭 말아 쥐며 다짐했다. 보란 듯이 이겨내고야 말겠다고. 그녀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 주겠다고.

“그래. 그래야 우리 딸이지.”

***

힐데가르트가 떠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이즈멜의 얼굴은 하루하루 환해져 갔다. 처음처럼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와 힐데가르트는 잘 맞지 않았다.

【이제 이런 어색한 식사도 얼마 남지 않았군. 그동안 뫼젠어도 꽤 익혔는데 말이야.】

보통 이쯤이면 힐데가르트의 짜증 섞인 대답이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식탁 위에는 접시와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만 드문드문 울릴 뿐이었다.

이즈멜이 그녀를 불렀다.

【힐데가르트?】

【…….】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드와이트, 혹시 왕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이즈멜이 드와이트에게 물었다. 반듯한 자세로 서 있던 드와이트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곰곰이 최근의 기억을 되짚던 이즈멜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제법 오래됐군.”

“무엇이 말입니까?”

“왕녀가 내 신경을 긁어대던 게 말이야. 분명 반가워야 할 일인데, 이상하게 거슬린단 말이야.”

깨작깨작 제 접시를 비워내는 힐데가르트를 물끄러미 보던 이즈멜이 드와이트에게 물었다.

“오늘은 뭘 하고 싶다던가?”

“엘레노어를 만나러 가시겠다고 합니다.”

반가운 이름에 이즈멜이 눈을 번쩍 떴다.

“엘레노어?”

부럽다…….

이즈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가끔 주고받는 편지 몇 통으로도 그럭저럭 만족했지만, 요즘은 턱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엘레노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싶고, 웃음기가 잔뜩 배 살짝 뭉개진 목소리를 두 귀로 듣고 싶었다.

아이들이 춤 동작을 전부 익힌 이후로는 수업을 핑계로 엘레노어를 보는 일도 뜸해졌다. 아이들의 습득력은 마른 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보다 빠른 듯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이즈멜이 고개를 내저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가 드와이트를 보며 제안했다.

“오늘 왕녀의 동행은 드와이트, 자네가 맡는 게 어떤가? 요즘은 자리에만 있었지?”

이즈멜의 제안에 드와이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저희 집에 말입니까?”

“요즘 내내 야근하지 않았나? 집에 가서 낮잠이라도 좀 자다가 오라는 뜻이야.”

드와이트가 잠시 침묵했다. 그가 정중하게 미소 지으며 이즈멜의 제안을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밀린 일들이 조금 남아서.”

“그래?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이즈멜이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쉬엄쉬엄해. 건강이 우선이지. 엘레노어도 요즘 그대가 피곤해 보인다고 걱정이 많더군.”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드와이트가 힐데가르트에게 이즈멜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통역해 주었다. 힐데가르트는 드와이트의 순하고 반듯한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카이델과 만난 날 이후로 힐데가르트는 그를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생각한 최선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되도록 외출도 하지 않았고, 꼭 나가야 할 땐 뫼젠에서부터 함께 온 기사를 대동했다. 드와이트는 별말 없이 그런 그녀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잠시 머뭇대던 힐데가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이 그렇게 많아? 이즈멜이 제안한 대로 가서 좀 쉬면…….】

【예. 그간 밀린 것들이 조금 남았습니다. 엘레노어는 뫼젠어에 능통하니 통역이 필요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드와이트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벚나무의 잎 같은 초록색 눈동자가 힐데가르트를 선명하게 비추었다.

【그래도 제가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함께 가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했지만, 어쩐지 힐데가르트에게는 조금 서늘하게 느껴졌다.

【……아냐, 괜찮을 것 같아. 일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와이트가 그녀에게서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즈멜과 몇 마디 업무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순간 힐데가르트의 마음 한구석이 따끔했다.

그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듀이, 그렇게 그를 부르고 그가 활짝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난 진심도 아니었잖아. 떠나고 나면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사람이야.’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반했다. 그냥 다정하게 웃어 주기만 해도 그랬다. 때로는 그마저도 필요 없었다. 그녀는 아름다웠으니까.

승자가 정해진 게임 같았다. 힐데가르트는 적당히 그 게임을 즐겼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일어나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좀 이상했다.

***

【안녕, 엘렌.】

【힐데, 오랜만이에요. 오늘 날이 좀 덥죠?】

엘레노어는 마차에서 내린 힐데가르트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차 대신 시원한 주스를 마시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곧 뫼젠으로 돌아가신다고요.】

【응, 그렇게 됐어.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싶어서 온 거야.】

처음에는 그렇게 불편하던 사람인데, 그새 정이 든 걸까. 엘레노어는 그녀가 떠나는 게 좀 아쉬웠다.

말 안 듣는 학생 같은 느낌이었다. 제멋대로 굴 땐 열이 뻗쳤다가도, 진심으로 미워할 수는 없는 그런 학생 말이다.

【보고 싶을 거예요.】

【나도. 가끔 편지하면 답장해 줄래? 너무 자주 쓰지는 않을게. 넌 늘 바쁘니까.】

【기꺼이요.】

【드와이트도 많이 아쉬워하겠어요.】

그 순간 힐데가르트가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엘레노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아, 응.】

힐데가르트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너야말로 무슨 일 있어? 누가 봐도 고민이 산더미처럼 쌓인 얼굴인데.】

【아…….】

【무슨 일이야? 세 명 중에 누가 속을 썩여?】

엘레노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사업 때문이에요.】

【사업?】

말해도 되나?

엘레노어가 우물쭈물하자, 힐데가르트가 제 가슴께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나한테는 편하게 털어놔도 돼. 며칠 뒤면 훌쩍 떠날 사람이잖아.】

그런가.

잠시 고민하던 엘레노어가 힐데가르트에게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속에 담고 있던 것을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런 못된……. 내가 나서서 혼내 줄까?】

힐데가르트는 자기 일처럼 펄쩍펄쩍 뛰며 열을 냈다. 엘레노어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한참이나 애써야 했다.

【아니요! 그리고 전하께는 절대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절대요.】

【알았어, 알았어.】

떠나는 마차에 올라타기 전, 힐데가르트가 엘레노어를 꽉 끌어안았다.

【지지 말고, 기죽지 말고.】

【네. 조심히 가세요, 힐데.】

엘레노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엘레노어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힐데가르트가 작게 속삭였다.

【고맙고 미안했어. 잘 지내, 엘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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