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별일 아니기만을 바라는 엘레노어의 간절한 희망과는 반대로, 상황은 꽤 심각한 듯했다. 클로드는 물론 아드리안까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들었지만, 몇 주가 지나도록 그다지 진전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유가 뭘까? 그렇게 갑작스럽게…….’
엘레노어는 블레이크 후작 부자가 얼마나 꼼꼼하게 상단을 운영해 왔는지 알았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더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데미, 어디 아파?”
엘레노어가 데미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하고 이마를 짚어 보았지만 열이 있지는 않았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에나와 루카스도 데미안이 오늘따라 힘없이 축 처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시에나가 제 몫의 쿠키를 데미안에게 슥 내밀었다. 초콜릿 칩이 듬뿍 박힌 쿠키는 데미안이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데미, 이거 너 먹을래?”
데미안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에나가 쿠키를 생크림에 푹 찍었다.
“이래도?”
데미안은 쿠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시에나와 루카스가 심각한 얼굴로 눈을 맞췄다.
“데미, 내 만년필 쓸래?”
루카스가 떨리는 손으로 이즈멜에게 선물 받은 만년필을 내밀었다. 데미안이 평소에 항상 부러워하던 것이었다.
데미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확실해. 뭔가 문제가 있어. 그것도 엄청나게 큰 문제가.
루카스와 시에나가 다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데미안 무슨 일 있어요?”
시에나가 엘레노어에게 소곤소곤 귓속말로 물어왔다.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가 봐. 나중에 한번 알아볼게.”
엘레노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시에나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데미안은 원래도 수업 내내 별말이 없었다. 드문드문 ‘네’ ‘아니오’ 하고 답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데미안이 입을 꾹 닫고 있으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시에나와 루카스도 전처럼 신나게 떠들거나 다투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데미안이 이곳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수업이 끝나고, 카이델이 데미안을 데리러 왔다.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카이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엘레노어의 손에 끌려 구석으로 향했다. 엘레노어가 허리에 손을 턱 짚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봐요. 데미한테 뭐라고 했어요?”
“무슨…….”
“다그치거나, 화를 내거나, 아니면 무섭게 쳐다보거나.”
카이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따라 데미안이 힘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고요. 걱정이에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래? 별일 없었는데…….”
“흠, 어쩌면 그냥 오늘 좀 기운이 없는 것일 수도 있죠. 누구나 그런 날은 있잖아요.”
여전히 찜찜함이 남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뭔가를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카이델과 엘레노어가 붙어선 것을 본 루카스와 시에나가 와다다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시에나가 두 사람 사이에 쏙 끼어들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공작님!”
루카스도 카이델의 다리를 덥석 끌어안으며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카이델은 당황한 얼굴로 루카스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래, 둘 다 안녕.”
시에나도 카이델의 다른 한쪽 다리를 붙잡고 폴짝폴짝 뜀뛰기를 했다. 고목에 매미 두 마리가 달라붙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카이델이 어정쩡하게 서서 엘레노어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그는 여전히 아이들이 제게 치대오면 어쩔 줄 모르며 절절맸다.
‘도와줘, 제발.’
‘괜찮아요. 해치지 않아요.’
‘이러기야?’
엘레노어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으쓱해 보였다.
“오늘도 목말 태워 주세요!”
시에나가 카이델의 손가락을 꼭 붙잡으며 눈을 빛냈다. 옆에 있던 루카스도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먼저 말했거든?”
“알거든?”
티격태격하는 두 아이를 보며 카이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델이 순순히 몸을 숙이는 것을 보고 엘레노어가 웃음을 터뜨렸다. 서슴없이 그에게 안기고 기어오르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데미안이 엘레노어의 치맛자락을 살짝 구겨 쥐었다.
“데미도 같이 놀지 않고?”
엘레노어가 계단에 살짝 걸터앉으며 물었다. 데미안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는 데미안을 무릎에 앉히고, 데미안을 꼭 안아 주었다.
“그냥 선생님이랑 이렇게 있을까?”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엘레노어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에나랑 루크는 진짜 신났나 보다. 그치.”
시에나와 루카스의 웃음소리가 점점 높아져 이제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카이델이 한쪽 팔마다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 들고 분수대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카이델은 좀 지쳐 보이고…….”
엘레노어가 중얼거린 말에 데미안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솟았다. 조금이나마 데미안이 웃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데미는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그렇지?”
데미안이 엘레노어의 품속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말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무슨 이야기든 괜찮으니까.”
“……네.”
“뭔가를 속에 너무 오래 품고 있으면, 마음에 감기가 들어. 가끔은 그냥 입 밖으로 흘려보내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데미안이 물끄러미 엘레노어의 눈을 마주 보았다.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촉촉하게 반짝거렸다.
엘레노어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그냥 손을 내밀면 돼, 데미. 옆에 있어 줄게.”
***
엘레노어는 급한 전갈을 받고 브로든 상단의 사무실로 향했다.
“최대한 빨리 왔어요. 무슨 일이에요?”
아드리안이 굳은 얼굴로 엘레노어에게 무언가를 넘겨주었다. 얇은 책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엘레노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학습지……?”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고 있는 내용이야 비슷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편집 형태도 비슷하고, 신문 광고도 전부 우리가 냈던 곳에서만 냈어. 보란 듯이 말이야.”
엘레노어가 빠르게 한 장 한 장을 훑어 나갔다. 매끈한 표지부터, 첫 장의 삽화까지 엘레노어의 학습지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화려했다.
“빠져나간 투자자들이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어.”
“이유를 모르겠다니? 우리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운데…….”
아드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윤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아. 종이도 제일 비싼 것을 썼고, 잉크도 그래. 뭐든 우리보다 더 좋은 걸 썼는데, 이렇게 되면 단가가 무척 올라가거든.”
“그런데?”
“가격도 우리보다 저렴해. 거의 마진이 없는 수준으로.”
아드리안의 말에 엘레노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가능해?”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목적이 이윤추구가 아니라면 가능하지.”
엘레노어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많이들 저쪽으로 몰리겠구나.”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옆자리에 앉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조금씩 옮겨가고 있는 건 사실이고, 계속 저렇게 광고를 해댄다면 상황은 더 나빠질 수도 있지.”
“공부하던 교재를 바로 바꾸는 건 쉽지 않으니까. 시험까지 반년도 채 남지 않았고…….”
엘레노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야. 내년부터는 사람들이 전부 이 교재를 찾게 될 거라고.”
아드리안과 엘레노어, 둘뿐인 사무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책상 위에 놓인 교재를 빤히 바라보던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악의적으로 벌인 일 같아, 엘렌.”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누가 그런 짓을 해? 대체 왜?”
엘레노어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누군가 망치로 쾅 하고 내리친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머리가 멍하고 마음이 욱신거렸다.
“원래 잘되는 사람 곁에는 시기하는 사람이 붙는 법이야, 엘렌. 너무 걱정하지 마. 방법이 있을 테니까.”
아드리안이 손가락으로 엘레노어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살살 훔쳐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할게. 네가 밤잠 설쳐 가며 고민한 시간이 무의미해지지 않도록. 미리 너무 걱정하지 마.”
엘레노어가 팔을 뻗어 아드리안을 꼭 끌어안았다. 아드리안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자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클로드는 어디 가셨어?”
“남은 투자자들을 만나고 계셔. 그분들까지 덩달아 동요하시지 않도록. 곧 오실 거야.”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을 안았던 팔을 풀며 제안했다.
“내가 투자자들을 직접 만나서 설득이라도 해 볼까? 어쩌면…….”
“그러지 마.”
아드리안은 엘레노어가 말을 맺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을 거야.”
엘레노어는 아드리안이 뭔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드리안.”
엘레노어가 아드리안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서서히 좁혀지고, 엘레노어가 턱을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말해줘.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아드리안의 금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엘레노어의 얼굴이 가까웠다. 가라앉은 기분 때문일까. 엘레노어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알고 싶어.”
말해 주지 않으려 했다. 엘레노어가 이런 일에 깊이 마음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올곧게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아드리안은 말도 안 되게 약해지고 말았다.
“투자자 중의 한 명이 이쪽 일에 크게 관여한 것 같아.”
“그게 누군데?”
엘레노어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드리안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이 일은 그냥 나한테 맡겨 줘. 해결한 뒤에 이야기해 줄게.”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책을 꼼꼼히 살피던 엘레노어가 마지막 장을 펼쳐 들었다. 그녀가 깨알 같은 글씨들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아냈다.
-D. 모리스
깜짝 놀란 엘레노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모리스라면…… 달리아?”
엘레노어의 중얼거림에 아드리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공중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만났다.
아드리안의 눈을 보자, 얼마 전 인쇄소에 갔을 때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너 이젠트 공녀님이랑 잘 알아?’
‘잘 알지는 못해. 그래도 몇 번 보기는 했지. 투자자니까.’
그는 분명 이젠트 공녀에 대해 이야기하며 투자자라 말했다. 공작가에서 열린 티파티에서 달리아를 보았고…….
싸한 예감이 스쳤다. 엘레노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혹시, 그 투자자가 이젠트 공작가 사람이야?”
엘레노어의 물음에 아드리안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긍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