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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59화 (59/168)

59화

뜨거운 주전자에 덴 하녀가 본능적으로 손을 홱 뺐다.

그 충격에 찻잔이 넘어지며 미지근한 찻물이 엘레노어의 치마폭 위로 쏟아졌다.

“어머. 괜찮아요, 엘레노어?”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좋아. 정말 죄송합니다, 영애님. 제가…….”

실수한 하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엘레노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제 에이프런으로 다급하게 젖은 치마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일어나세요.”

당황한 엘레노어가 그녀를 만류했지만, 하녀는 정신없이 젖은 치마를 꾹꾹 짜내듯 닦아냈다. 이 순간 그녀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듯싶었다.

“내 손님한테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게 몇 번째야? 더는 못 참아요. 짐 싸서 나갈 준비 해요.”

엘레노어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나이스, 저 때문이라면 저는 정말 괜찮아요. 다 식은 차라 뜨겁지도 않았고, 오늘은 날이 좋으니 치마도 금세 마를 거예요.”

“엘레노어, 무척 관대하네요. 하지만 제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요. 무능한 하녀를 두는 건 집안의 품격을 갉아먹는 일이니까요.”

엘레노어를 보며 아름답게 웃어 보인 아나이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래서 나이 든 사람은 뽑지 않으려고 했는데.”

쓸데없는 동정이 이렇게 위험하다니까.

안절부절못하던 하녀가 아나이스를 향해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일제히 미간을 찌푸렸다.

“아가씨,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감히 어딜 건드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제 손에 닿자, 아나이스의 얼굴에 경멸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아나이스가 늙은 하녀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를 밀쳤다. 하녀가 찻물에 젖어 축축해진 잔디 위로 나동그라졌다.

당황한 엘레노어가 큰 소리를 냈다.

“아나이스!”

자리에서 일어난 엘레노어가 손을 내밀어 하녀를 일으켰다. 제게 내리꽂히는 시선을 느꼈지만, 엘레노어는 하녀가 치마에 엉망으로 엉겨 붙은 풀잎들을 털어내는 것을 거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비해 희끗희끗한 머리, 약간 그을린 피부, 얼굴에 비해 거칠고 주름진 손, 굽어진 어깨.

어쩌면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 행동이 이젠트 공녀의 심기를 거스르리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차마 늙은 하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하녀는 엘레노어의 먼 기억 속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아나이스가 엘레노어를 보며 물었다. 엘레노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은 좀 지나치셨던 것 같아요. 같은 사람을 그렇게…….”

“같은 사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엘레노어.”

아나이스가 엘레노어의 말허리를 잘랐다.

“저 여자랑 내가 어떻게 같은 사람인가요. 우리는 같지 않아요.”

아나이스는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제 손등을 닦아냈다. 더럽고 불결한 것이 닿았던 것처럼, 아주 꼼꼼하게 정성 들여서. 그 손짓이 무척이나 고상하고 우아했다.

“집시들이나 떠들고 다닐 말을 엘레노어에게서 듣다니 뜻밖이네요. 누구보다 그걸 잘 아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나 봐요.”

“그게 무슨…….”

엘레노어가 눈썹을 찌푸렸다.

“엘레노어. 선생님이 되어 달라는 그 수많은 요청 중에 당신은 딱 세 가문만을 골랐어요. 블레이크 소후작과는 원래 친했다지만, 다른 두 아이를 맡은 이유는 결국 그 가문 때문이 아닌가요?”

아나이스는 엘레노어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방금 한 말은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요. 현명한 일이라 생각해요. 그저, 그런 당신이 내게 그런 충고를 늘어놓는 건 위선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위선이라고.

엘레노어는 아나이스의 말에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엘레노어. 당신과 나조차도 같지 않아요. 그걸 잊지 말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아나이스가 엘레노어의 어깨를 한 번 잡았다 놓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오늘 모임은 여기서 파해야겠네요. 이렇게 끝난 것도, 옷을 망친 것도 유감이에요.”

“아나이스.”

“전하께 안부 전해주세요.”

아나이스가 엘레노어를 보며 생긋 웃었다. 공작저 쪽으로 돌아선 그녀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카이델에게도.”

엘레노어는 그 자리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잠시 웅성거리던 영애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뿔뿔이 흩어지고, 저 멀리에서 마차가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

“달리아.”

달리아가 엘레노어의 팔을 톡 건드렸다. 가기 전 인사를 건네기 위해서였다. 그냥 쌩하니 돌아서려던 달리아가 엘레노어를 향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넌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른 거야. 애초에 여기 온 것부터가 그렇지.”

“뭐?”

“이젠트 공녀가 네게 감정이 좋을 리가 없잖아. 여긴 왜 온 거야?”

달리아의 말에 엘레노어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황태자 전하 때문이라면 아니야. 그냥 의례적인 파트너일 뿐이라고…….”

“나도 황태자 전하를 말하는 게 아니야. 세상에.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달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튼, 아까 네 행동은 옳은 일이었을지 몰라도 똑똑한 일은 아니었어. 세상에는 규칙이라는 게 있고 상식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때로는 마음에 안 들고 잘못되었더라도 따라야 하는 거야.”

“그 규칙과 상식은 대체 누가 정하는데? 잘못된 것이라면 따르는 게 아니라 바꾸어야지.”

엘레노어가 달리아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내 상식은 사람을 사람처럼 대해야 한다는 거야. 땀 흘려 일해 삶을 꾸려가는 데는 귀천이 없다고 믿어.”

“엘레노어 에버렛. 그런 건 귀족답지 못한 말이야. 대체 넌 왜 그렇게 네 멋대로야?”

달리아가 팔짱을 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은 건지, 그녀는 누군가 들으면 기함할 말들을 쏟아냈다.

“내 발로 직접 뛰어가며 일하는 것도,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는 것도 전부 ‘귀족다운’ 행동은 아니지. 사실 난 아직도 사람들이 말하는 ‘귀족다운’ 게 뭔지 잘 모르겠어.”

엘레노어가 달리아와 눈을 맞췄다.

“그러니 그냥 나는 나로 살래. 귀족답지는 못해도 사람답게, 즐겁게.”

달리아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엘레노어는 여전히 당당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엘레노어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 태도만큼은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러웠다.

‘저렇게 살면 어떤 기분일까.’

입술을 꼭 깨물고 있던 달리아가 나직이 읊조렸다.

“……난 널 위해 조언해 주는 거야.”

“알아, 달리아. 고맙게 생각해. 오늘 나를 솔직하게 대해 주는 건 네가 유일했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넌 어땠을지 모르지만, 난 오랜만에 널 봐서 반가웠어. 진심이야.”

달리아의 마차가 준비되어 서 있었다. 달리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엘레노어를 지나쳐 걸었다.

열 걸음쯤 갔을 때였을까. 달리아가 돌아섰다.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고개를 돌려 달리아와 눈을 맞췄다. 잠시 머뭇거리던 달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젠트 공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발렌타인 공작이야. 알고는 있으라고.”

***

카이델의 집무실은 보통 커튼이 반쯤 쳐져 조금 어둑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릴 만큼 적막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그의 집무실은 사람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외숙과 그 동행들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각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그래서인지 얼굴이 좋으십니다. 그야말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온 외숙이 싱글벙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카이델은 그의 그런 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히 머물다 가십시오. 한동안 수도에 머무실 것이라고요?”

“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카이델은 외숙에게 무척 너그러운 편이었다. 그가 어머니와 무척 가까운 사이였고, 어렸을 때부터 유난할 정도로 저를 챙겼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저녁은 데미안과 함께하시죠.”

카이델의 제안에 외숙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식사를, 같이 하십니까?”

“매일은 아니라도 최대한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편입니다.”

카이델이 덤덤하게 긍정하자, 외숙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군요.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합니다. 못 본 지 오래되어…….”

외숙은 말끝을 흐리며 카이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익숙한 발걸음으로 손님방으로 향하던 그는 복도 끝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못 본 사이 꽤 많이 자란 데미안이었다.

“오랜만이구나.”

“…….”

“쯧. 여전히 바보처럼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게냐?”

외숙은 얼어붙은 데미안을 위아래로 훑으며 못마땅하다는 듯 끌끌 혀를 찼다.

“뭐라도 달라졌을 줄 알았더니……. 한심한 것. 제 형이랑은 어쩜 저렇게 다른지. 형제라는 게 믿어지지를 않는구나.”

데미안이 어깨를 한껏 움츠리며 떨리는 두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고개가 툭 떨구어졌다.

‘괜찮아. 저런 말은 그냥…….’

칼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덜덜 떨리는 작은 주먹으로 향했다. 외숙이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아카데미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겠지? 네 가정 교사인지 뭔지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떠도는 소문이 많더구나.”

문득 생각났다는 듯 외숙이 엘레노어를 화제로 꺼내 들었다. 데미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외숙의 회보랏빛 눈동자가 그런 데미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여자는 아닌 것 같던데……. 공부나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지 의문이야.”

외숙이 손가락으로 턱을 툭툭 두드리며 한쪽 입꼬리를 슥 끌어 올렸다. 그 말이 데미안을 쿡 찌르듯 자극했다. 데미안이 말아 쥔 주먹에 힘을 주며 목에 힘을 주었다.

“서, 선생님은 조, 좋은 분…….”

또박또박 말하고 싶었던 마음과는 달리, 데미안의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문장의 끝으로 갈수록 기어들어 가 마지막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였다. 데미안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하지만 외숙에게는 그마저도 무척 의외의 모습이었다. 허, 그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외숙이 데미안을 향해 느릿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데미안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이윽고 등이 차가운 벽에 닿았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그 선생이 널 어떻게 가르쳐 놓았는지. 다음 주에는 내가 널 가르쳐 주마.”

허리를 숙여 데미안과 눈을 맞춘 외숙이 싱긋 웃어 보였다. 일견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은 어딘지 삐딱하게 비틀린 데가 있었다.

데미안의 눈이 한계까지 동그랗게 커졌다. 제 여동생의 것과 똑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더 망쳐 놓지나 않았기를 바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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