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힐데가르트의 제안대로 세 사람은 근처의 유명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흐음, 난 해산물이 더 좋더라. 그걸로 할래.】
힐데가르트는 두 남자가 그것을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드와이트에게는 그것이 주어진 임무였고, 카이델에게는 좋아하는 여자의 오빠와 엮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도 드와이트와 둘이 먹는 저녁이 훨씬 좋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절절매며 눈치를 보는 카이델이라니!
【둘은 같이 식사한 적 없어?】
【있습니다. 엘레노어의 생일파티…….】
무심코 대답하던 카이델이 드와이트를 보며 흠칫 몸을 굳혔다. 그는 자꾸만 두 사람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생일파티에서 다 함께 모여 식사했었습니다.】
카이델의 말에 드와이트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둘이 따로 본 적은 없는 거네?】
【예.】
힐데가르트가 턱을 괴며 씩 웃었다.
【왜?】
카이델과 드와이트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두 사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더듬더듬 인사를 주고받았다.
“언제 한 번…….”
“예, 좋습니다.”
힐데가르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음식이 나온 이후로는 상황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적어도 각자 집중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델이 문득 입을 열었다.
【뫼젠으로 돌아가실 날이 정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고 적절한 화제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식탁 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습니까? 저는 아직 전달받은 것이 없는데요.】
드와이트가 고개를 들어 힐데가르트와 눈을 맞췄다. 늘 봄날 같던 그의 연초록색 눈동자가 늦가을처럼 서늘했다.
힐데가르트가 당황한 듯 말했다.
【화, 확실한 건 아냐. 정해지면 당연히 너도 알았겠지.】
카이델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오갔다. 어쩐지 주위의 온도가 조금 내려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드와이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평소와 같이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묘하게 서걱거리는 분위기 속에 식사가 이어졌다.
카이델과 드와이트가 승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말없이 미지근한 물을 들이켰다. 그녀도 승마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어쩐지 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카이델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떠날 날이 정해졌다. 원래 예정되었던 날짜보다 한 달이나 당겨진 날짜였다.
‘내가 왜 드와이트한테 떠날 날짜를 숨기려는 거지?’
힐데가르트가 손바닥에 뺨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드와이트가 그런 힐데가르트를 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물만 드시고 계신데요.】
【응? 아니야. 맛있게 먹고 있어. 그냥 좀 번거로워서 그래.】
힐데가르트가 변명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럼…….】
드와이트가 깨끗한 커트러리로 힐데가르트의 접시에 올려진 것들을 먹기 좋게 직접 손질해 주었다.
【드십시오.】
【고마워…….】
힐데가르트의 포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드와이트도 제 접시를 천천히 비워 나갔다. 더없이 자연스럽고 또 친밀한 그 행동에, 카이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힐데가르트와 카이델의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슥 고개를 돌렸다. 카이델의 시선에서 약간의 질책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카이델이 세 사람분의 식사를 계산했다. 드와이트가 마차를 식당 앞으로 부르러 간 사이 카이델이 힐데가르트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와이트 에버렛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지, 당연히 드와이트는 착하고, 귀엽고, 다정하고…….】
힐데가르트가 어물쩍 넘어가려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카이델은 그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를 진지한 상대로 생각하시냐는 말씀입니다.】
카이델의 말에 힐데가르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떠날 사람이었고, 그는 남을 사람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드와이트가 좋았고 그와 보내는 모든 순간 즐거웠지만, 그녀가 그리는 미래에는 그가 없었다.
【장난은 그만하면 충분히 치셨습니다.】
【장난은 아니었어.】
【제가 말하는 장난이란, 책임지지 못할 일을 말하는 겁니다.】
카이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서는 눈치가 빠른 분이십니다. 드와이트 에버렛은 그의 마음을 감추는 데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고 말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었다.
빤히 쳐다볼 때마다 붉어지는 목덜미를 보면서, 썰렁한 농담에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휘어지는 두 눈을 보면서 그의 마음을 모르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녀는 기꺼웠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에게 상처 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카이델이 힐데가르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힐데가르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려는 의도는 없었어.】
【의도가 없었다고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드와이트가 들어왔다. 카이델이 재빨리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난 먼저 가 있을게.】
힐데가르트가 성큼성큼 가게를 빠져나갔다. 드와이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아, 공작 각하.”
카이델이 고개를 돌려 드와이트를 마주 보았다.
“오르골은 엘렌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주인을 잘못 찾아온 것 같아서.”
“고마워.”
카이델이 곧바로 덧붙였다.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바로 준비할 테니까.”
“오늘 식사로 선물은 받은 셈 치겠습니다.”
드와이트가 괜찮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엘렌이 무척 좋아하더군요.”
“선물을?”
카이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번져 가는 것을 보며 드와이트가 픽 웃었다. 여전히 어려운 상대지만, 이 순간만큼은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다음번엔 엘렌이랑 셋이서 식사하시지요.”
드와이트가 제안했다.
“그래. 근사한 곳을 알아봐 두지.”
***
마차에 탄 엘레노어의 허리는 평소보다 잘록하고 꼿꼿했다. 이젠트 공작가에서 열리는 티파티에 참석할 것이라는 말에, 하녀들이 코르셋을 엄청나게 졸라댄 결과였다.
‘불편해 죽겠네. 있던 입맛도 없어지겠다.’
마음도 몸도 불편했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집순이 기질이 DNA에 깊이 새겨진 것만은 같았다. 어머니의 성화에도 꿋꿋이 버텨 왔건만, 무도회에서 한 약속 한 번에 발등이 찍혔다.
자나 깨나 입조심!
엘레노어가 속으로 ‘집에 가고 싶다’를 천 번쯤 중얼거리는 사이, 마차는 공작가의 정문을 통과해 정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진한 꽃향기가 흘러들어왔다.
저 멀리 알록달록 화사한 드레스들이 보였다. 엘레노어가 가슴 위에 두 손을 포개어 쥐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나도 저 영애들처럼 우아할 수 있어! 그냥 조용히 있다가 오는 거야.”
엘레노어가 완벽하게 관리된 잔디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엘레노어! 와 줬군요. 어서 와요.”
엘레노어를 발견한 아나이스가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그녀가 엘레노어에게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여기 앉아요.”
아나이스가 제 옆자리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했다. 부러움이 깃든 시선이 엘레노어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보던 아나이스가 말했다.
“오늘 좀 긴장한 것 같네요”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아서요. 혹시 실수할까 봐…….”
“좀 그렇긴 하죠?”
아나이스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엘레노어는 그 순간 약간의 싸늘함을 느꼈다. 하지만 아나이스가 생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자, 그 느낌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러니 자주 만나요, 우리. 다들 엘레노어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고 있답니다.”
엘레노어가 어색하게 그녀를 따라 웃었다.
본격적인 티파티가 시작되자 엘레노어도 조금 편안해졌다. 그냥 다른 영애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차를 홀짝이고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차도 향긋하고, 디저트도 맛있네.’
영애들끼리 나누는 대화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엘레노어에게 익숙한 화제는 아니었지만, 다들 말재주가 있어 꼭 토크쇼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도 만났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함께 치렀던 달리아 모리스였다. 어느새 예쁜 숙녀가 된 그녀를 보니 신기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달리아?”
엘레노어가 달리아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냥 뭐.”
달리아는 모호한 미소를 띤 채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그녀는 곧 엘레노어에게서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약간의 머쓱함을 느끼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는데, 아무래도 너무 오랜만이었던 모양이다.
‘그럴 수 있지.’
엘레노어가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때 아나이스가 입을 열었다.
“엘레노어처럼 귀한 손님을 두고 우리끼리 매번 하던 이야기만 했네요. 엘레노어, 자기 이야기 좀 해 봐요.”
“제 이야기요?”
아나이스가 엘레노어를 보며 물었다.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러자 아나이스의 옆에 앉아있던 영애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직접 사업을 하신다기에, 백작저가 어려운 게 아닌가 걱정을 했었답니다.”
“괜한 걱정이었지만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레노어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피부를 휘감는 공기에서 선명한 적의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표정이 굳어진 엘레노어가 막 입술을 떼려던 때였다. 아나이스가 재빨리 엘레노어의 손등 위에 부드러운 손을 포갰다.
“무척 인상 깊었어요.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지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말 좀 해 봐요.”
아나이스가 예쁘게 웃었다. 엘레노어는 얼떨떨한 가운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태도로 사람들을 대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들은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걸다가도 중간중간 그녀를 미묘하게 깎아내렸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얼굴이 굳어지면 곧바로 그녀를 치켜세우며 화제를 돌렸다.
엘레노어는 그런 화법에 꽤 익숙했다. 전생에서도 자주 겪어 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화를 내야 하나? 그냥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어야 하나?
엘레노어가 고민하던 그때였다.
“차가 다 식었네요. 새로 내어오라 이를게요.”
미지근해진 찻물에 인상을 찌푸린 아나이스가 가볍게 종을 흔들었다. 나이가 지긋한 하녀가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다.
“그거 가져갈 때 이것도 치워요. 왜 이렇게 퍽퍽해?”
아나이스가 손끝으로 반쯤 먹은 케이크 접시를 툭 밀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굼뜨게 행동하지 말고 빨리빨리. 다들 기다리잖아요.”
“예예.”
하녀가 약간 떨리는 손으로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아나이스의 케이크 접시를 치우던 그녀의 손등이 아직 뜨거운 찻주전자에 닿았다.
“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