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이즈멜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난간을 붙잡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엘레노어가 보였다.
“우산도 없이 오셨어요?”
이즈멜은 대답 없이 엘레노어를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옅은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엘레노어는, 이 순간 약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미 돌아갔을 줄 알았어.”
“일단 올라와서 이야기하세요. 비를 너무 많이 맞으셨어요.”
빨리요.
엘레노어가 재촉하며 이즈멜에게 손짓했다. 어느새 엘레노어의 머리카락도 빗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래.”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즈멜이 계단을 반쯤 뛰듯이 올라갔다. 엘레노어가 이즈멜에게 방금까지 그녀가 덮고 있었던 담요를 건넸다.
“감기 걸리시겠어요. 날이 아무리 따뜻해졌대도 빗물은 차가운걸요.”
“추워. 두르고 있어.”
이즈멜이 거절하자 엘레노어가 뒤꿈치를 들고 그의 어깨에 직접 담요를 둘러주었다. 말 안 듣는 아이를 챙기듯 야무진 손놀림이었다.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에게서 들을 말은 아니네요.”
체온만큼 따뜻한 담요에서 은은하게 엘레노어 향기가 났다. 내내 불안하게 두근거리던 이즈멜의 심장이 천천히 진정되었다.
“먼저 돌아갔을 줄 알았어.”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시간이 훅 지나가 버렸어요. 정신 차려 보니 밖에 비가 오고 있었고요.”
엘레노어가 이즈멜에게 다 식은 차를 조금 따라 건넸다. 이즈멜이 얌전히 그것을 받아 마셨다.
“아! 첫 장에 건드리지 말라고 적혀 있었는데 읽어서 죄송해요. 기다리다 심심해서…….”
엘레노어가 사과하자 이즈멜이 곧바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급하게 장례식을 다녀오느라 루크가 남긴 쪽지를 뒤늦게 봤어.”
“장례식이요?”
“페르난도 공.”
엘레노어가 연회에서 그를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현 황제의 사촌인 그는 외모부터 깐깐하고 엄격해 보이는 남자였다.
“어렸을 때 나를 가르쳤던 스승이야.”
“어렸을 때요?”
“다섯 살 정도부터.”
“와, 정말 어렸을 때네요.”
엘레노어의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댄 이즈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이 오두막이 내 아지트였어. 지금은 루크가 더 자주 쓰지만.”
엘레노어가 무릎을 꼭 끌어안았다.
“페르난도 공은 좋은 분이셨나요?”
“엄한 분이셨지.”
이즈멜이 엘레노어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가 입꼬리를 슥 끌어 올렸다.
“그대에게 비밀 하나 말해 줄까?”
엘레노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이즈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를 미워했어. 언젠가 황태자가 되고, 성년이 지나 그만한 힘이 생기는 순간 반드시 그를 무너뜨릴 작정이었지.”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순간 이즈멜의 표정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늘 장난기가 흐르던 붉은 눈동자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우아한 초승달 같던 웃음은 부스러져 있었다.
이즈멜은 제가 엘레노어 앞에서 그때의 일을 끄집어낸 것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그때 일을 털어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엉망으로 흐트러진 꼴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인 것도 처음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 아니, 할 수 없었어.”
“어째서요?”
“모르겠어. 어쩌면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를 두려워했던 거겠지.”
엘레노어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페르난도 공이 혹시 전하를…….”
“신체적인 학대를 생각한다면, 아니야. 나는 어쨌거나 황자이니 내게 직접 체벌을 가할 수는 없었어. 내게는 늘 정중했지.”
“그럼?”
“내가 무언가 잘못할 때마다 날 돌보던 사람들이 대신 고통받아야 했어.”
엘레노어가 눈을 크게 떴다. 이즈멜이 쓰게 웃었다.
“완벽한 예법이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
이즈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레노어가 물었다.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
“지금? 글쎄.”
이즈멜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런 날이 오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슬펐어요?”
“그보다는 좀 허무했어. 약간은 화가 나기도 하고.”
이즈멜이 엘레노어를 보며 눈을 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그저 평온해. 다른 무엇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정말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이즈멜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공에게 조금은 고맙기도 해. 그 덕분에 더 준비될 수 있었으니까. 그 시간에서 배운 것도 있고.”
“배운 것이라면…….”
“황태자라는 게 어떤 자리인지 말이야. 내가 뭔가를 잘못하면, 무고한 다른 이들이 고통받지.”
루크보다 어린 나이에 그걸 깨쳤어. 꽤 총명하지 않아?
이즈멜이 시시한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그런 면에서 공은 좋은 선생님이었어. 아주 조금은 감사하기도 해. 언젠가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엘레노어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즈멜은 다시 그녀에게 익숙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엘레노어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감사하지 마세요.”
“뭐라고?”
“페르난도 공은 좋은 선생님이 아니었어요. 그 시간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건, 전하께서 훌륭한 분이기 때문이에요. 그분의 덕이 아니라요.”
엘레노어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먹먹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해하려 애쓰실 필요도 없어요. 그가 전하께 한 일은 명백하게도 잘못된 일이었으니까요. 상처 주지 않고 같은 가르침을 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확신해요.”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엘레노어의 뺨을 타고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놀란 이즈멜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이즈멜은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당황한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엘레노어, 우는 거야? 난 정말 괜찮아. 그냥 장례식도 다녀오고, 어렸을 때 추억이 있는 공간에 있다 보니 너무 감정적이 된 거야.”
이즈멜이 엘레노어에게 다가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 들었지만, 빗물에 젖은 손수건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으며 작게 속삭였다.
“잘 견디셨어요.”
이즈멜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안에 큰 파랑이 일었다.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이즈멜이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잘 견뎌서 어른이 됐지. 가끔은 몸만 큰 것처럼 느낄 때도 있지만.”
“그건 저도 그래요. 모두 그렇게 느낄 거예요.”
엘레노어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콧물을 연신 훌쩍거리는 엘레노어를 물끄러미 보던 이즈멜이 작게 웃었다.
방금까지 어른스럽게 그를 위로하던 이가 맞는 걸까. 딸기주처럼 빨갛게 변한 코끝을 마구 문지르는 엘레노어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해 보였다.
이즈멜이 말했다.
“루크에게는 좋은 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이야.”
엘레노어가 기쁜 듯 활짝 웃었다. 방금까지 울었던 흔적이 가시지도 않은 얼굴로.
그 순간 이즈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파도가 모래성을 덮친 것처럼 그의 안에서 무언가 허물어졌다.
그의 안에서 허물어진 것이 무엇인지, 이즈멜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란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루크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이런 일을 꾸민 것만 봐도, 루크에게 그대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는 알 것 같지 않아?”
엘레노어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이즈멜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제가 엘레노어를 좋아한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았다. 어느 순간 그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불어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 안의 일이라 생각했다.
이즈멜의 머릿속에는 늘 계획이 있었다. 그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았다. 누군가의 호감을 얻어내는 법도, 어른스럽고 우아하게 당황스러운 상황에 대처하는 법도.
하지만 이 순간 엘레노어 앞에 앉은 그는 꼭 멋모르는 열여섯 소년 같았다. 좋아하는 소녀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그런 사춘기 소년 말이다.
“비가 얼른 그쳐야 할 텐데요. 금방 지나갈 소나기라 생각했는데…….”
비는 아직도 추적추적 내리며 흙을 적시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이즈멜은 엘레노어의 옆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작게 대답했다.
“빨리 그쳐야 할 텐데.”
루카스가 또 한 번 옳았다. 이즈멜은 엘레노어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는 이 비가 아주 오래도록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
【벨리움에 있는 커플들은 다 여기 모여 있는 느낌이다.】
힐데가르트가 쌍쌍이 지나가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드와이트가 그런 그녀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여기 많이 와 봤나 보다? 오늘은 안 헤매네?】
【예?】
평소에는 자주 지도를 들여다보던 드와이트가 자연스럽게 앞서 걷자, 힐데가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약간의 질투심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트하러 자주 왔었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농담이야. 왜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자꾸 더 놀리고 싶게.
힐데가르트가 드와이트의 팔을 살짝 두드리며 웃었다.
【너처럼 잘생기고 귀여운 남자라면 당연히 데이트도 많이 했겠지. 부끄러워할 것 없어.】
【아닙니다!】
드와이트가 손사래를 쳤다. 실은 매번 거리에서 헤맨 것이 민망했던 그가 전날 미리 답사를 다녀왔기 때문이었지만, 그것도 그리 밝히고 싶은 사실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예쁘고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둘러보고, 운하에 배들이 오가는 것도 구경했다.
드와이트는 힐데가르트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잘 알았다. 덕분에 벨리움과 뫼젠 간의 대화는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게 이어졌다.
【드와이트, 넌 애칭 같은 것 없어? 엘레노어는 다들 엘렌이라고 부르던데.】
힐데가르트는 문득 생각난 궁금증에 드와이트를 붙잡았다.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만 그렇게 부르십니다.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알고 싶어!】
힐데가르트가 눈을 반짝였다. 잠시 망설이던 드와이트가 작게 속삭였다.
【듀이…….】
【듀이? 귀엽다. 나도 그렇게 부르고 싶은데.】
듀이, 듀이. 힐데가르트가 입안으로 몇 번 굴려 보았다.
【그냥 드와이트라고 부르시는 쪽이 더 좋습니다.】
【그래? 나는 마음에 드는데, 듀이.】
눈썹을 으쓱한 힐데가르트가 드와이트에게 제안했다.
【이건 어때? 내가 너를 듀이라고 부르는 대신, 너도 나를 힐데라고 부르게 해 줄게.】
어때? 듀이.
드와이트는 코앞에서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어린아이 같아 늘 싫어했던 애칭도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그때였다.
【왕녀 전하?】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힐데가르트와 드와이트가 돌아섰다.
【카이델?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그냥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카이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힐데가르트의 옆에 있던 드와이트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발렌타인 공작 각하.”
“드와이트 군.”
둘을 서로를 여전히 어려워했다. 카이델은 드와이트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드와이트는 여전히 카이델이 무서웠다. 그가 엘레노어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아는 지금도 그랬다.
서먹서먹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힐데가르트의 눈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그녀가 두 남자의 등을 탁 두드리며 제안했다.
【우리 같이 저녁 먹으러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