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그냥 내가 먼저 사과했어.”
“기특하네. 먼저 사과도 하고.”
“에나도 그랬어. 나는 사과도 잘하고 칭찬도 잘한다고. 용감한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대.”
과자를 오물거리며 한참이나 재잘대던 루카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이즈멜을 보았다. 그는 어쩐지 산만해 보였다.
루카스가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물었다.
“형님, 듣고 있어?”
“……뭐라고?”
반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이즈멜이 화들짝 놀라며 루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카스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루카스의 말에 이즈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일이 많네.”
그가 일부러 수선스럽게 책상 위의 서류뭉치들을 정리했다. 결과적으로는 이미 반듯하게 놓인 서류들을 괜히 한 번 건드려 보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런 형의 어설픈 동작을 빤히 보던 루카스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흐응. 형님도 싸웠구나?”
“뭐?”
“선생님이랑 싸운 거지?”
어린 동생에게 정곡을 찔린 이즈멜이 어깨를 움찔했다.
“싸우기는. 우리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즈멜이 발끈하자 루카스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
“나는 거짓말 안 해.”
“또 거짓말.”
루카스가 과자를 냠냠 베어 물며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일방적으로 실수한 거야.”
“일방적이 뭔데?”
“엘레노어는 잘못한 게 없고, 나는 잘못한 게 있다고.”
그제야 루카스가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가 혀를 쯧쯧 차며 형을 타박했다.
“잘 좀 하지 그랬어.”
데미네 형이나 에나 삼촌은 친하게 잘 지내던데.
예전 같았으면 곧바로 반박하는 말이나 캐묻는 말이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잠잠했다.
루카스가 고개를 들자 시무룩한 이즈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즈멜의 머리 위에만 짙은 먹색의 비구름이 낮게 드리운 것 같았다.
“그러게…….”
좀 더 놀릴까 말까. 잠깐 고민하던 루카스가 양손으로 턱을 괴며 이즈멜과 눈을 맞췄다.
“형님도 먼저 사과해.”
“사과했어.”
“선생님이 용서 안 해 준대?”
“아니. 괜찮대.”
“그런데?”
루카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미안하다고 했고, 괜찮다고 했으면 끝난 거 아닌가?
이즈멜이 힘없이 웃으며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너는 아직 몰라도 괜찮아, 루크.”
이즈멜이 루카스의 주머니 가득 간식을 챙겨 넣어주었다. 루카스가 까치발을 들고 이즈멜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이즈멜의 집무실을 나서며 루카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야겠네.’
루카스의 작은 머릿속이 두 사람을 화해시킬 계획으로 분주해졌다.
***
루카스에게서 초대장이 도착했다. 무척이나 뜬금없이.
“안녕. 내 아지트에 선생님을 초대‘함’니다.”
철자 실수 하나를 발견한 엘레노어가 픽 웃었다. 그래도 이번엔 딱 하나뿐이니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다.
‘언젠가 루카스도 전하처럼 근사한 편지를 쓰게 될까.’
정중한 인사말로 시작해 위트 있는 추신, 근사한 서명으로 끝나는 그런 편지 말이다. 엘레노어는 그런 날이 오면 어쩐지 조금 서운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삐뚤빼뚤 손으로 그린 지도까지 든 초대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좀 불안하긴 해도…… 루크가 직접 초대했는데 가야지.”
엘레노어가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날씨가 부쩍 더워졌다. 엘레노어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연둣빛 풍경에서 초여름을 읽어냈다.
황후와 이즈멜의 표식 덕에 황궁 깊숙한 곳까지 마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도, 루카스가 표시한 곳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가야 했다.
“자꾸만 산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데……. 이게 맞아?”
엘레노어가 슬슬 불안함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팔을 쭉 뻗어 감싸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크고 오래된 나무들이 방향 감각을 잃게 했다.
“이쯤이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발이 조금씩 욱신거리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엘레노어의 시야 끝에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루카스가 편지 아래에 그린 도형의 정체가 이것인 것 같았다.
“와!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건데.”
2층 높이에 만들어진 오두막은 비밀스러우면서도 동화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엘레노어의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조심조심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오두막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서자 바닥이 약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근사하다……!”
오두막 안의 작은 테이블 위에 찻주전자와 작은 찻잔 두 개, 예쁘게 쌓인 쿠키들이 놓여 있었다. 예쁜 분홍빛이 도는 차는 여전히 따뜻했다.
저건 뭘까.
다반 아래 손바닥만 한 쪽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 엘레노어가 손을 뻗었다.
「선생님이랑 형님도 서로 이야기하고 싸였던 걸 풀어요. 화해하면 기분이 좋아요.
루카스 씀」
엘레노어가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이 이즈멜과 그녀 사이의 어색함을 풀어 보려는 루카스의 깜찍한 설계였다. 시에나와 루카스를 화해시킨 것과 똑같은 방법이었다.
“루크, 이 녀석이…….”
엘레노어가 낡은 러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약간 묵은 흙먼지 냄새가 났지만, 기분 나쁠 정도는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엘레노어가 구석에 있는 작은 책장으로 다가갔다. 책장 옆에는 먼지 쌓인 목검 몇 개가 비스듬히 서 있고, 책장에는 손때 묻은 소설책 몇 권이 꽂혀 있었다.
-이즈멜 바이든 폰티우스 드 벨리움. 손대지 말 것.
무심코 책 한 권을 뽑아 든 엘레노어가 책의 첫 페이지에 적힌 글씨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의 유려한 글씨체는 아니지만, 반듯반듯한 글씨가 귀여웠다.
손대지 말라는데, 그냥 내려놓아야 하나. 꼬맹이 시절의 전하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의 전하는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엘레노어의 내면에 격한 갈등이 일었다.
“몰래 보고 꽂아 두자.”
이즈멜이 쓰던 것으로 보이는 격자무늬 담요를 끌어다 덮은 엘레노어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엘레노어가 문득 간과하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해냈다. 분명 이 자리는 두 사람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것. 그런데 아까부터 이곳에 있는 건 그녀 하나였다.
엘레노어가 문 쪽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나저나 쪽지대로라면 지금쯤 전하께서도 여기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
***
평소와 다름없이, 그러니까 더 정확히는 무도회 이후로 쭉 그랬듯이, 이즈멜은 약간 우울하고 무기력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힐데가르트에게 드와이트를 붙여 준 이후로 이즈멜의 업무 부담이 늘었다. 이즈멜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일하지 않는 동안에는 엘레노어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가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일 줄은 몰랐는데.’
이즈멜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잠시 회의를 다녀온 사이 편지와 처리해야 할 공문들이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었다.
“전하.”
그때 헨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페르난도 공의 부고가 도착했습니다.”
쿵. 가슴 한구석이 북처럼 울렸다. 이즈멜이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잠시라도 얼굴을 비추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물론 가 봐야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즈멜이 번쩍 고개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헨리에게 갈아입을 옷과 마차를 준비시켰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 이즈멜은 유난히도 말이 없었다. 헨리가 건네준 애도사를 천천히 읽어 보는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너무 많은 감정이 뒤섞여 복잡해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었다.
헨리가 그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물론이야.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지?”
이즈멜이 입꼬리를 익숙하게 말아 올렸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유려한 필치로 써 내려간 애도사의 한 구절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부디 평안히 잠들기를.
“페르난도 공께서는 전하의 스승이셨으니까요. 꽤 오래 전하를 가르치셨지요.”
“그래, 칠 년쯤.”
“추억이 많으시겠습니다.”
헨리의 말에 이즈멜이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기억이 많지.”
이즈멜은 장례식 내내 묘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관을 바라보았다. 옛 스승의 죽음은 그에게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 감정을 무어라 해야 할까.
슬픔? 허무함? 아니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그에게서는 조금의 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엄숙한 얼굴로 애도사를 읊은 그는, 제게 인사를 하러 모여드는 이들을 향해 우아한 미소를 남기고 마차에 올랐다.
아무도 그의 감정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몇 년간이나 호흡을 맞춘 수석 보좌관 헨리조차도.
“비가 올 모양이야.”
마차에 탄 이즈멜이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소나기가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오늘은 그냥 들어가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헨리의 제안에 이즈멜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보니 이것저것 책상에 쌓여 있던데.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면서 편히 쉬기는 그른 것 같아.”
“급한 것은 없을 겁니다. 요즘 좀 무리하시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이즈멜이 괜찮다는 듯 헨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가 익숙한 제 공간에 들어서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이즈멜은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감정을 추스른 이즈멜이 제 앞의 서류 더미를 끌어왔다.
툭.
정갈한 문서들 사이 어설프게 끼어 있던 종이 한 장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뭐지?’
「형님이랑 선생님이랑 화해하게 도와줄게. 이번에는 절대 망치면 안 되! 알았지!!!
루카스 씀」
이즈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급하게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젠장!”
루카스가 쪽지에 적어 둔 시간에서 이미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루카스의 쪽지를 한 손으로 구겨 쥔 이즈멜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헨리가 뒤에서 큰 소리로 그를 부르고, 지나가던 관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이 순간 이즈멜에게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밖으로 나오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꽤 굵었지만, 그것도 정신없이 달려가는 이즈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즈멜의 이마에 엉겨 붙었다. 빗물에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이 눈을 따갑게 했다.
“제발, 제발…….”
달려가는 내내 이즈멜은 수백 번이나 중얼거렸다. 루카스의 말이 맞았다. 또 망칠 수는 없었다.
이즈멜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두막 앞에 멈추어 섰다. 그의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 묻어 있는 공간이었다.
‘정말 오랜만인데.’
그 시절 그를 가르친 스승이 죽은 오늘, 이곳에서 엘레노어를 만난다는 것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엘레노어!”
이즈멜이 약간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로 엘레노어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깨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또, 또 다 망쳐 버렸다.
이즈멜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걸음을 떼려던 때였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