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깜빡 깜빡 깜빡.
엘레노어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농담처럼 웃어넘기기에 적당한 시간은 이미 지나 버렸다. 농담 같지도 않았고.
“방이 좀 더운 것 같죠? 밖에서 기다릴까요?”
엘레노어의 말에 카이델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서 두 걸음쯤 뒤처져 걸으며 카이델이 툭 물었다.
“그래서 내 첫인상은?”
“솔직하게요?”
“그래. 솔직하게.”
“처음에는 좀 무서웠어요. 처음 몇 번만요. 키도 크시고, 눈매도 날카로우시니까요. 지금은 편해요.”
주절주절 변명하듯 몇 마디를 덧붙이던 엘레노어가 홱 돌아섰다. 느긋하게 그녀를 따라 걷던 카이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전보다 편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맞먹는다는 뜻은 아니고…….”
“그래도 되는데.”
좀 더 노력해야겠군.
카이델이 속으로 작게 뇌까렸다.
엘레노어와 카이델이 천천히 햇살 좋은 정원을 거닐었다. 큰 창 너머로 책상 앞에 앉은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카이델이 참나무에 묶인 나무 그네를 가리키며 말했다.
“못 보던 그네인데.”
“아드리안이 선물해 줬어요. 어렸을 때 여기 있던 그네를 정말 좋아했었거든요.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기도 하고 그랬어요.”
엘레노어가 그네로 걸어가 앉았다. 카이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에 서서 그넷줄을 밀어 주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날리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저기, 궁금했던 게 있는데요.”
“응.”
“제가 요즘 힐데랑 시간을 좀 보냈거든요. 그러니까, 왕녀님이요.”
힐데라고.
엘레노어가 다정하게 애칭을 불러 주는 것에 카이델은 미약한 질투심을 느꼈다.
요즘 왕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에버렛 남매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닌다는 것은 유명했다. 아무래도 드와이트 에버렛에게 흑심을 품은 게 아닐까, 약간의 의심이 들었다.
“들었어. 그런데 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중에 카이델 이야기도 좀 있었어요. 아카데미 다닐 때 이야기요.”
별로 좋은 이야기를 했을 것 같지가 않은데.
불안한 느낌을 감지한 카이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올려다보며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두 눈에 장난기가 반짝였다.
“아카데미 다닐 때,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되게 많으셨다고 하던데.”
“내가? 아니야.”
“책상 위에 선물도 쌓여 있고 그랬었다던데요.”
카이델이 눈썹을 꿈틀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매번 뜯어보지도 않고 분실물 보관 상자에 넣으셨다고…….”
흐린 옛 기억을 더듬던 카이델이 눈을 번쩍 떴다. 가끔 제 것이 아닌 물건들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게 그럼…….
카이델의 얼굴에 오만 감정이 스쳐 가는 것을 지켜보던 엘레노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물어도 답을 들은 것 같네요. 저도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닌 줄 알았어요.”
엘레노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델이 참나무에 살짝 기대어 팔짱을 끼고 서서 그런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내 지쳐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한층 편안해진 것을 보니 좋았다. 그의 마음도 느른하게 풀어졌다.
카이델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별로 인기 있는 학생은 아니었어. 오히려 그 반대였지. 다들 나를 어려워했거든.”
엘레노어가 카이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피식 웃으며 한참 잊고 살았던 학창시절의 일을 끄집어냈다.
“한 번은 짝을 지어 과제를 해야 했는데, 캐플런 코넬리라는 동급생이 내 짝이 됐어. 키가 작고 왜소한 녀석이었지.”
카이델이 그날의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엘레노어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장면 장면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코넬리가 너무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비 오는 날 운동장을 몇 시간이나 뛰어다녔다고 하더군.”
“왜요?”
“차라리 앓아눕는 게 좋겠다 싶었던 거겠지.”
“세상에.”
엘레노어가 탄식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원하는 대로 코넬리는 열감기에 걸려 앓아누웠고, 나는 홀로 두 사람 몫의 과제를 했지.”
“저런.”
조별과제 독박이라면 엘레노어도 전문가였다.
“꽃을 들고 병문안하러 갔더니 잘못했다고 펑펑 울기에 그냥 나왔어.”
엘레노어가 눈썹 끝을 축 늘어뜨렸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속상했을 것 같아요.”
“약간은. 그래도 나중에는 익숙해졌어. 오히려 그게 더 편하기도 했고.”
카이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손을 뻗어 카이델의 팔을 위로하듯 살짝 붙잡았다. 카이델이 제 팔을 붙잡은 작고 흰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거 알아요? 제가 당신이랑 짝이 되었으면 무척 좋아했을 거예요.”
“그래?”
딱히 믿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카이델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엘레노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데다 공부도 잘하는 남학생이 내 짝이라는데. 과제에 집중은 좀 안 됐겠지만, 확실히 즐거웠을 거라고요.”
그 말에 카이델이 낮게 웃었다. 그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엘레노어는 그가 웃을 때 전혀 다른 인상이 되는 것이 좋았다. 볼 가운데 길게 보조개가 패는 것도, 눈가에 희미하게 주름이 잡히는 것도.
머리 위로 바람이 살랑살랑 불며, 나뭇잎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엘레노어는 내내 스트레스에 무겁게 눌려있던 마음이 한층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도 좋았을 거예요. 분명 우리는 A+를 받았을 테니까. 그보다 더 좋은 점수가 있다면 분명히 그걸 받았을 거고요.”
“물론 그랬겠지.”
카이델이 머릿속으로 열여섯 시절의 엘레노어를 그려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렇게 당신한테 홀딱 반해서 책상 위에 선물을 올려 두면, 당신은 열어 보지도 않고 그걸 분실물 상자에 넣었겠죠.”
“말도 안 돼. 그 반대라면 모를까.”
카이델이 단호하게 말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당신을 싫어했을 거라고요?”
“아니. 내가 그대를 좋아했을 거야.”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학교에서 제일 예쁜 데다 공부도 잘하는 여학생이 내 짝이라는데, 당연히 그랬겠지.”
A+를 책임지고 받아내겠다는 패기까지 있는데, 반하지 않았을 리가.
카이델이 웃는 낯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대는 날 무서워했을 거야. 나는 좋아하는 여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딱딱하게 얼어 있었을 테고, 그대는 그런 날 이상하게 생각했겠지.”
“제가요?”
“물론 그대는 캐플런 코넬리보다 용감하니, 비가 오는 날 운동장을 뛰어다니지는 않았겠지만…….”
“아니에요!”
엘레노어가 발끝으로 땅을 짚어 조금씩 흔들리던 그네를 완전히 멈춰 세웠다. 카이델이 엘레노어의 앞에 와서 섰다.
“당신의 첫인상이 좀 날카롭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어쩌면 당신 말대로 좀 겁을 집어먹었을 수 있겠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요.
“하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다 보면 분명 알았을 거예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카이델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한 꺼풀 가시었다.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 시간에 그대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그대를 친구로 둔 소후작은 행운아야.”
“그러니까요. 아드리안도 그걸 알아야 하는데.”
약간 쑥스러워진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말을 농담으로 받았다.
“당신처럼 좋은 친구를 사귈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좀 안됐네요.”
엘레노어가 싱긋 웃으며 건넨 말에 카이델이 마주 미소 지었다.
엘레노어와 대화를 나눌 때면, 카이델은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무색무취의 제 인생이 엘레노어라는 색과 향으로 덧입혀지는 것만 같았다.
엘레노어가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며 치맛자락을 탁탁 털었다.
“이쯤이면 루크랑 에나가 화해했을까요?”
“글쎄. 들어갈까?”
엘레노어가 뒷문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둘도 언젠가는 깨닫겠죠. 깨달음이 늘 그렇듯 오래 걸리겠지만, 편안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라고요.”
***
“미안.”
30분이 넘게 이어지던 침묵을 깬 것은 루카스였다. 더는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뭐가.”
시에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깐족거린 것. 기분 나쁜 줄 몰랐어.”
루카스의 말에 시에나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루카스는 까불거리지도 않았고, 시비를 걸어오지도 않았다.
‘으음……. 저렇게 나오니까 더 미안하잖아.’
사실 시에나는 루카스에게 화풀이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자존심 때문에 먼저 사과하기가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도 미안해. 사실 그날은 나한테 짜증이 났던 거였어.”
루카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맨날 실수하잖아. 시험도 이제 몇 달만 남았는데.”
시에나의 말에 루카스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똑똑하잖아. 시험은 당연히 잘 치겠지!”
“데미안처럼 똑똑하지는 않잖아.”
시에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얌전히 숙제하고 있던 데미안이 고개를 들었다.
턱을 괸 채 시에나와 데미안을 번갈아 보던 루카스가 말했다.
“왜 데미안처럼 똑똑해야 해?”
“뭐?”
시에나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루카스를 보았다.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는 너처럼 똑똑하면 돼.”
루카스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시에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쩐지 마음이 갓 구운 빵처럼 말랑말랑하고 폭신폭신해졌다.
“넌 어려운 말도 많이 알고 글씨도 우리 중에 제일 빨리 쓰잖아.”
너랑 싸워서 이기는 게 얼마나 힘든데.
루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에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시에나가 의자를 조금 더 바짝 당겨 앉으며 루카스에게 말했다.
“난 네가 부러워.”
“나? 왜?”
루카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공부도 못하고, 어려운 말도 모르고, 키도 시에나보다 작은데 대체 뭐가 부럽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카스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였다.
“너는 사과도 잘하고, 칭찬도 잘하잖아.”
“그게 뭐?”
루카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시에나에게 몇 번 들어 본 적 없는 칭찬이라 귀를 쫑긋 세웠는데, 겨우 저런 것들이라니. 누가 그런 걸 못한단 말인가.
“그건 진짜 용감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시에나가 턱을 살짝 치켜들고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귀가 팔락거렸다. 시에나가 저렇게 쳐다보는 시선에는 이상한 설득력이 있었다. 저런 눈빛, 저런 말투로 감자를 달걀이라고 우기면 그 말을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루카스가 배시시 웃었다. 시에나가 그런 루카스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우리 그럼 화해한 거지?”
“당연하지. 너랑 나는 동맹이잖아.”
동맹. 시에나와 루카스의 맞잡은 손을 타고 전우애와 비슷한 감각이 찌르르 흘렀다.
“우리가 싸우니까 오늘도 데미네 삼촌만 좋았잖아.”
“정말이지 똑똑한 녀석이라니까.”
“일단 저 둘을 빨리 떨어뜨려 놓자.”
툭, 데구루루.
가만히 듣고 있던 데미안의 손에서 만년필이 떨어졌다. 어쩐지 약간 오싹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