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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내게 집착한다-54화 (54/168)

54화

아서와 아드리안의 시선이 엘레노어에게 향했다.

“잉크가 아니라 종이를 바꾸는 건, 가능한가요?”

“종이?”

“지금 쓰고 있는 종이가 두껍고 매끈하기는 하지만, 전에 써 보니 약간 잉크가 천천히 스미는 것 같더라고요.”

엘레노어의 말에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우리 인쇄소에서 쓰는 몇 가지 종이가 있는데, 일단 한번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샘플들을 보고 몇 가지 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약간 더 거칠지만 번짐이 덜한 종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심지어 가격도 원래 사용하던 것보다 저렴했다.

일단 바꾼 종이로 몇 주간 발행해 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다음 주에 발송될 분량의 학습지를 꼼꼼히 살피는 것까지 끝낸 엘레노어가 문을 나서며 말했다.

“오늘도 수고했어, 리안.”

아드리안이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오늘 널 보셨으면 엄청 자랑스러워하셨을 텐데. 언제 저녁 먹으러 와.”

“응, 그럴 때도 됐네. 언제가 괜찮은지 말해 줘.”

“넌 언제든 환영이야, 엘렌.”

낮이든 밤이든, 혹 새벽이든.

***

시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시에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또 졌어! 이번에는 진짜 열심히 했는데.’

데미안의 시험지를 힐끔 쳐다본 시에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두 문제 차이로 데미안을 이기지 못했다. 강아지랑 노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말이다.

언제 한번 데미안을 이겨 볼 날이 오기는 할까. 요즘 따라 시에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데미안은 정말 착하고 괜찮은 아이였다. 이야기도 잘 들어 주고, 양보도 잘했다. 음식을 먹을 때 흘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좀 질투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애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매번 앞서갔다.

“몇 점이냐?”

그때 루카스가 고개를 쭉 빼고 시에나의 시험지를 들여다보았다. 시에나가 신경질적으로 시험지를 확 접었다.

“신경 끄시지.”

“싫은데.”

루카스가 얄밉게 혓바닥을 메롱 하고 내밀었다. 시에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루카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너는 몇 점이야?”

“100점.”

“와. 너 진짜 똑똑하다!”

루카스가 데미안의 팔을 툭 치며 감탄했다. 데미안이 배시시 웃으며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데미는 다 맞았대.”

“그걸 왜 나한테 말해?”

평소보다 까칠하게 반응하는 시에나를 보며 루카스가 빙글빙글 웃었다.

“흐응. 질투하는 거지?”

그 말이 시에나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시에나가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신경 끄고 공부나 해. 맨날 혼자 다 틀리면서.”

“왜 갑자기…….”

약간 당황한 루카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입술을 뗐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랑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시에나는 까칠하게 굴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루카스가 잠시 고민하던 때, 시에나가 옆자리로 옮겨 앉으며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너랑 이렇게 멍청하게 떠들 시간 없어. 혼자 놀든지 해.”

개미 눈곱만큼 미안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빈정이 상한 루카스가 시에나에게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잠시 나갔다 온 엘레노어가 묘하게 냉랭한 공기를 감지했다.

“무슨 일 있었어?”

묵묵부답.

“왜 그래?”

엘레노어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래도 루카스와 시에나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금방 풀리겠지?’

잠시 둘을 지켜보던 엘레노어가 어깨를 으쓱했다.

루카스와 시에나는 처음 만난 날부터 티격태격했다. 하루라도 입씨름을 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미운 정이 무섭다고, 둘은 은근히 서로를 챙겼다.

루카스가 칠칠맞지 못하게 뭔가를 흘리고 가면 그것을 주워드는 것은 시에나였고, 시에나가 신나서 뭔가에 대해 떠드는 말에 가장 열성적으로 대답해 주는 것은 루카스였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예상은 빗나갔다.

“시에나?”

“…….”

“루카스?”

“…….”

“오늘도 말 안 할 거야?”

시에나와 루카스는 2주째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두 아이 사이의 일이 아니었다.

말 많은 두 아이가 묵언 수행하듯 입을 꾹 다물자, 수업 분위기가 축축 처지기 시작했다. 엘레노어가 아무리 목소리 톤을 높이고 농담을 건네도 돌아오는 것은 시큰둥한 반응뿐이었다.

“진짜로?”

엘레노어가 허리를 척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에나는 펜 끝으로 책을 톡톡 건드리며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고, 루카스는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리고 엘레노어의 시선을 피했다.

아이들과 함께 수업하는 일 때문에 몸이 힘든 적은 많았지만, 마음이 힘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 엘레노어는 수업이 다가오면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주인의 마음을 닮아가는 건지, 창가에 둔 제라늄 화분도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하지만 정말 문제는 따로 있었다.

“데미.”

“…….”

“괜찮아. 둘은 그냥 잠시 다툰 거야. 친구끼리는 원래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가까워지기도 해.”

냉랭하고 어색한 분위기 속에 데미안까지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엘레노어가 그런 데미안을 꼭 안아 주며 달랬지만, 데미안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더는 안 되겠어.

엘레노어가 결심한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엄한 표정을 지었다.

“시에나, 루카스. 두 사람은 오늘 끝나고 남아.”

“네?”

“싫어요!”

두 아이가 얼굴을 구기며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더는 이렇게 못 넘어가.”

하지만 이번에는 엘레노어도 단호했다.

“서로 이야기하고, 쌓였던 걸 푸는 거야.”

“얘랑 이야기하기 싫어요.”

“나도거든?”

“그럼 어쩔 수 없지. 저녁도 둘이서 마주 보고 먹어야겠네.”

엘레노어가 단단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시에나와 루카스가 떼쓰듯 칭얼거렸지만, 엘레노어는 흔들리지 않았다.

입술을 삐죽거리던 루카스가 옆에 앉아 있던 데미안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데미안은요?”

“데미안은 왜? 싸운 건 너희 둘인데.”

루카스가 데미안을 보며 물었다.

“데미, 너 집 가면 뭐해?”

“숙제.”

“여기서도 할 수 있겠네!”

루카스가 데미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죽어도 시에나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던 루카스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 만년필 신기하댔지? 그것도 빌려줄게! 세 밤 빌려줄게!”

데미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약간 솔깃했다.

‘세 밤이나?’

제 형이 선물해 줬다며 루카스가 며칠을 자랑하던 만년필이 떠올랐다. 은색 펜촉이 무척이나 근사한 물건이었다.

“데미, 그냥 같이만 있어 주면 안 돼?”

쟤랑 둘이 있기 싫어.

시에나도 데미안을 보며 말했다. 거의 울먹거리는 시에나를 보니 데미안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데미안이 엘레노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데미, 네가 있고 싶으면 당연히 있어도 돼. 가고 싶으면 가는 거고.”

데미안이 고민하는 사이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했다. 잠시 뒤, 데미안을 데리러 온 카이델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 카이델이 엘레노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

“루카스랑 시에나가 다툰 게 오래가네요. 데미안도 중간에서 불편해하고, 솔직히 저도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끝을 봐야겠어요.”

엘레노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낮게 대답했다. 늘 발그레하게 생기가 감돌던 뺨이 창백했다.

“데미안, 가자.”

엘레노어가 데미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란히 선 카이델과 엘레노어를 번갈아 바라보던 데미안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잠깐만 더 있다가 가도 돼요?”

“하지만 형도 왔고…….”

엘레노어가 카이델을 가리키며 데미안을 설득하려 했다.

“괜찮아. 난 기다릴 수 있어.”

카이델이 재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이상하게 그의 표정이 밝았다.

그렇다는데 엘레노어가 따로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래요, 그럼…….”

엘레노어가 루카스와 시에나를 마주 앉혔다. 데미안이 둘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아 숙제로 내어준 책을 펼쳐 들었다.

“이제 서로 왜 기분이 상했는지 이야기하는 거야.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는 절대 중간에 끊거나 놀리면 안 돼.”

“하지만…….”

“오늘은 ‘하지만’도 안 돼.”

엘레노어가 시에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끄응.”

잔뜩 골이 난 시에나와 루카스가 볼을 부풀렸다.

“한 시간 뒤에 올게. 그때 선생님한테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말해 줘.”

엘레노어가 데미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데미안이 감독관인 거야. 할 수 있지?”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와 시에나는 서로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엘레노어의 말에 얌전히 따랐다. 이러나저러나 참 착한 아이들이었다.

“지금부터 시작해.”

***

시에나와 루카스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준 엘레노어가 거실로 향했다. 카이델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하녀가 그의 앞에 따뜻한 찻잔을 내려놓고 멀어졌다.

엘레노어가 다가서자 카이델이 시선을 들었다.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괜찮으시겠어요?”

“응.”

“솔직히 데미가 남겠다고 할 줄은 몰랐어요. 둘이 다투고 나서 중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든요.”

엘레노어가 카이델의 옆에 털썩 앉았다. 긴장한 카이델의 몸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아, 맞아. 혹시 화초 가꾸는 것 잘 아세요?”

“왜?”

“제라늄 잎이 좀 시들해졌어요. 물도 잘 줬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잠깐 봐주실래요?”

카이델이 선뜻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엘레노어가 제 방문을 열고 성큼성큼 창가로 다가갔다.

“뭐가 문젤까요?”

“마지막으로 물을 준 게 언제지?”

“어제요.”

카이델이 손가락으로 흙을 만져 보고, 잎을 이리저리 살폈다.

“과습이 문제인 것 같군. 그래서 시들해진 거야.”

“과습이요?”

카이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조만큼이나 위험한 게 과습이지.”

카이델이 책상 위에 있는 종이에 화분을 관리할 때 유의해야 할 것들을 몇 가지 휘갈겼다.

“생각보다 까다롭네요. 그냥 길가에 피어난 꽃들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맞아. 적당한 흙, 빛, 바람, 물, 온도, 관심, 무관심…….”

카이델이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식물은 예민해서, 어떤 조건이 조금만 채워지지 않아도 금방 꽃이 시들해지고 잎이 윤기를 잃어. 동시에 강인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그 부분을 채워 준다면 금세 다시 기운을 차리기도 하지.”

카이델의 말에 엘레노어가 그와 눈을 맞췄다. 엘레노어의 입가에 아주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건 무슨 표정일까.

카이델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웃지?”

“그냥, 당신은 알수록 첫인상이랑은 참 다른 사람 같아서요.”

“내 첫인상이 어땠는데?”

무서웠죠. 그것도 엄청.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엘레노어가 카이델에게 화살의 촉을 돌렸다.

“제 첫인상은 어떠셨는데요?”

카이델이 흠칫했다. 황궁에서 엘레노어와 마주쳤던 순간,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잠시 오해했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아이의 손을 꼼꼼하게 닦아 주던 것, 툴툴거리는 척 다정한 염려를 늘어놓던 것, 무심한 얼굴로 턱을 들어 눈을 맞추던 것.

카이델이 약간의 기대감을 담고 저를 바라보는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꼭 그날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예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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